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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 TOP 30-2(15~1위)

작성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2024-05-13 20:30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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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까지의 기록만 반영했습니다.

*PED 사용이 적발된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다른 포지션에서 쌓은 커리어 역시 종합적으로 고려했습니다.

*재일교포의 경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밝힌 인물을 포함했습니다.

*자료의 부족으로 누락된 인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의 주관을 많이 반영했습니다.

 

1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justaballgame.tistory.com/51

 

15위 윤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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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49년 7월 2일

투타: 좌투좌타

주요 소속팀: OB 베어스

 

1970년대 실업야구 최고의 강타자 중 하나로 큰 체격에도 부드러운 스윙과 빠른 발, 준수한 외야 수비 등 모든 것을 갖춘 만능 외야수였다. 국제무대에 강해 아시아선수권과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타격왕에 오른 경험이 있다.

 

실업야구 시절 MVP와 타격왕 등을 비롯해 많은 타이틀을 따낸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는 1980년부터 플레잉 코치로 뛰다가 은퇴할 계획이었으나 KBO리그가 탄생하자 마음을 바꿔 만 32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 데뷔를 선택했다.

 

프로야구 원년, 그는 나이를 잊은 듯 맹타를 휘둘렀고 4할을 기록한 백인천에 이어 타격 2위에 올랐다. 출루율은 4할, 장타율은 5할을 훌쩍 넘길 정도로 우수한 성적이었고, 베스트 10의 우익수로도 선정됐다. 이후로도 윤동균은 OB의 중심타자로 꾸준하게 활약했다.

 

윤동균은 1989년 만 40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고, KBO 최초의 은퇴 경기가 열렸다. 그의 통산 OPS는 0.790으로 그가 투고타저 시대에 활약한 노장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높은 수치임이 분명하며, KBO리그가 빨리 생겼다면 더 대단한 활약을 선보였을 것이 확실하다.

 

주요 시즌: 1982년(KBO) 77경기 타율 0.342 97안타 OPS 0.965

 

14위 박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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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29년 3월 11일

투타: 우투우타

주요 소속팀: 육군 야구단

 

이영민과 김영조의 뒤를 잇는 홈런왕으로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홈런이 거의 나오지 않던 시기에 활약했음에도 역대 4명에 불과한 실업야구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다고 전해진다.

 

학창 시절에는 투수였으나, 실업 야구 무대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해 오랜 기간 슬러거로 이름을 날렸다. 30대 중반인 1965년에도 대표팀에 뽑히고, 30대 후반인 1968년까지 현역생활을 이어간 것은 최근의 기준으로도 놀라운 일이며, 그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롱런이었다.

 

박현식은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6회 연속 출전으로 아시아 야구 연맹에게서 공로상을 받아 ‘아시아의 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6회 대회 결승전에서는 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야구사 첫 우승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박현식은 은퇴 이후 지도자 및 행정가로도 활동했고, 특히 인천 야구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SK 와이번스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야구 꿈나무들에게 ‘박현식 타자상’을 시상한 바 있다.

 

주요 시즌: 미상

 

13위 이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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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05년 12월 1일

투타: 우투우타

주요 소속팀: 식산은행 야구단

 

한국 야구 초기의 기반을 다진 레전드로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야구뿐만 아니라 육상은 물론 축구까지 잘하는 최고의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이영민은 당시 일본 야구 최고의 강속구 투수 미야다케를 상대로도 초장거리 장외홈런을 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고, 일본이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상대하기 위한 팀을 꾸릴 때 포함된 한국인 선수는 그가 유일했다.

 

NPB가 창설될 때 그 역시도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었으나, 한국인 차별에 불만을 갖고 프로에 입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해방 직후까지 선수로 활동한 이영민은 이후 야구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이영민은 육상 대회에서 5종목을 석권하고 400M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축구에서도 선수로 여러 대회를 우승하고 대표팀 감독을 맡아 올림픽 첫 승 및 8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런 여러 업적들을 감안하면 이영민은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한야구협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 1958년부터 고교야구에서 최고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시상하고 있다.

 

주요 시즌: 미상

 

12위 박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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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79년 4월 21일

투타: 우투좌타

주요 소속팀: LG 트윈스

 

통산 2504안타를 기록해 KBO 역대 최다 안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며 역대 3명뿐인 200홈런-200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이다. LG의 암흑기와 도약기를 모두 겪고 원클럽맨으로 영구결번까지 지정된 구단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2년, 프로 무대에 데뷔했고 그 해 KBO 신인왕에 올랐다. 2004년에는 커리어 첫 3할 타율을 기록했고, 2005년에는 도루왕과 득점 1위 타이틀을 따내 이듬해 열린 WBC에도 승선했다. 이 시기의 박용택은 2할 후반대 타율과 많은 도루를 기록하는 가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2009년 타격왕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타격에 눈을 뜨며 박용택은 한 단계 높은 선수가 됐다. 2018년까지 10년 연속 3할 타율이라는 KBO 역대 유일한 기록을 세웠으며, 3차례 외야수 골든글러브와 1차례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박용택은 2009년 타격왕 등극 당시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그 사건을 은퇴식 날 롯데 팬들 앞에서 사과할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20년에 가까운 꾸준한 활약과 훌륭한 팬서비스까지, 박용택은 이 순위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주요 시즌: 2009년(KBO) 111경기 타율 0.372 168안타 18홈런 22도루 OPS 0.999

 

11위 손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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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88년 3월 18일

투타: 우투좌타

주요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KBO 역대 최고의 안타 제조기로 박용택의 통산 안타 1위 기록을 경신할 것이 유력하며, 향후 커리어에 따라 3000안타도 노려볼 수 있는 선수이다. 또한 단순히 안타만 많이 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선구안과 일발 장타, 준수한 주력까지 보유한 팔방미인이기도 하다.

 

2007년 롯데에서 데뷔한 손아섭은 2010년 0.306로 첫 3할 타율을 기록했고, 2018년까지 무려 9년 연속 3할 타율을 이어갔다. 이 기간 외야수 골든글러브 5회, 최다안타 타이틀 3회, 6년 연속 4할 출루율, 2년 연속 20-20 등 다 쓰기에 버거울 정도로 많은 기록을 쌓았다.

 

간혹 롯데 시절 손아섭을 두고 ‘이기적이다’, ‘찬스에 약하다’와 같은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손아섭은 오히려 뛰어난 워크 에씩으로 다른 팀 팬들에게까지 많은 존경을 받은 선수였으며, 그 어떤 지표로 평가해도 찬스에 강한 클러치 히터였다.

 

2022년을 앞두고 롯데 구단의 이해할 수 없는 판단으로 인해 손아섭은 NC 다이노스로 이적하게 됐다. 2023년 손아섭은 최다안타 타이틀을 따냈고 커리어 첫 타격왕에 올랐으며, 지명타자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는 등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손아섭은 국가대표팀에서 WBC에 2번 참가했으며, 2개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고 2015년 프리미어 12 우승을 경험한 바 있다. 특히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는 4강 일본전 9회에 대타로 나서 안타를 기록하며 역전의 중요한 발판을 놓기도 했다.

 

주요 시즌: 2014년(KBO) 122경기 타율 0.362 175안타 18홈런 OPS 0.994

 

10위 이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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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74년 12월 8일

투타: 좌투좌타

주요 소속팀: LG 트윈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컨택 능력을 가진 선수 중 하나로, 우타석으로 흘러나가는 공을 타격해 안타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배트 컨트롤 능력이 뛰어났다. 잠실에서 30-30을 기록할 정도의 장타력과 주력을 가졌으며, 어려운 타구도 쉽게 처리하는 수비 또한 일품이었다.

 

1997년 KBO 신인왕에 오르고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개막전에 3안타를 치고 한 인터뷰로 화제를 끌기도 했다. 1999년에는 최다 안타 1위에 올랐고, 30-30 클럽에 가입하는 역사적인 활약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1년까지 안타 1위 및 외야수 골든글러브 3연패를 달성했고, 2005년에는 커리어 첫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 진출 이전까지 이병규는 타격왕 1회, 안타왕 4회, 득점 1위 1회, 외야수 골든글러브 6회 등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했다.

 

2007년 주니치의 러브콜에 일본 진출이 성사됐으나,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고, 결국 3년 만에 LG로 복귀했다. 국내 복귀 이후 이병규는 3차례 3할 타율을 더 기록했고, 2013년 타격왕과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뒤 2016년을 끝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이병규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대표팀의 단골 외야수였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와 올림픽 동메달 1개를 목에 건 바 있으며, 2006년 초대 WBC 4강 진출을 경험하기도 했다.

 

주요 시즌: 1999년(KBO) 131경기 타율 0.349 192안타 30홈런 31도루 OPS 1.014

 

9위 박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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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73년 10월 2일

투타: 우투우타

주요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KBO 역대 최고의 5툴 플레이어 중 하나로, 마치 쿠바 선수들과 같은 우수한 신체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리틀 쿠바’라고 불렸다. KBO 통산 300홈런-250도루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며, 1번 하기도 힘든 30-30을 무려 3번이나 달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6년, KBO 역사상 최초의 30-30에 더해 홈런왕에 오르는 등 역대 최고 수준의 루키 시즌 활약을 선보이며 만장일치 신인왕을 수상하고 강렬하게 등장했다. 1997년에는 부상으로 96경기만 나왔음에도 20-20을 달성하고 OPS 1을 넘기며 활약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또 다시 30-30을 기록하며 외야수 골든글러브 3연패를 달성했고, 2000년에는 2번째 3할 타율과 3번째 30-30을 기록하며 전성기의 방점을 찍었다. 데뷔 첫 5년 동안의 박재홍은 KBO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선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01년 이후의 박재홍은 전성기만큼의 강력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강타자라고 불리기에는 충분했다. 2001년 이후로도 3할 타율을 3번, 두 자릿수 홈런을 8번이나 더 기록했으며, 통산 300홈런과 267도루를 남기고 2012년에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박재홍은 대표팀에도 여러 차례 선발되어 아시안게임 금메달 2회와 올림픽 동메달 1회를 따낸 바 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졌던 그가 해외 진출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더 본격적으로 경쟁할 수 있었다면 그 또한 꽤나 재미있는 볼거리였을 것이다.

 

주요 시즌: 2000년(KBO) 132경기 타율 0.309 151안타 32홈런 30도루 OPS 0.977

 

8위 심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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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75년 5월 5일

투타: 우투우타

주요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압도적인 힘을 보유해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선수로, 전성기는 짧았지만 그 전성기 동안은 이승엽에게도 절대 밀리지 않았던 선수이다. 장타력뿐만 아니라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내는 능력도 뛰어났고, 수비에서는 최고 수준의 송구 능력을 뽐냈다.

 

OB에서 데뷔한 심정수는 프로 2년차이던 1995년 만 20세의 나이에 잠실을 홈으로 쓰며 21홈런을 기록하고 장타력을 뽐냈다. 1999년과 2000년에는 2년 동안 60홈런을 기록하며 KBO 역사상 최고의 클린업 트리오 중 하나인 ‘우동수’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2001년 시즌을 앞두고 현대로 트레이드 됐고, 2002년부터 그의 압도적인 전성기가 시작됐다. 2년 동안 무려 99홈런을 기록했고, 특히 2003년에는 출루율 및 장타율 1위에도 오르며 KBO 역사에 길이 남을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후 심정수의 커리어는 빠르게 내리막을 걸었다. 시력 문제로 정교함이 심각하게 떨어졌고, 2007년 커리어 첫 홈런왕에 올랐지만 전성기 성적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2008년 22경기 출전에 그친 심정수는 결국 그 해를 끝으로 삼성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전성기는 다소 짧았지만, 그 전성기는 KBO 역대 최고 수준이었고,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KBO 통산 홈런 3위에 해당하는 328홈런을 남기기도 하는 등 누적 성적도 결코 부족하지 않기에 심정수를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 8위로 선정했다.

 

주요 시즌: 2003년(KBO) 133경기 타율 0.335 154안타 53홈런 OPS 1.198

 

7위 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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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84년 1월 18일

투타: 우투좌타

주요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역대 유일한 KBO 통산 1500타점을 달성한 선수이며, 2023년 종료 시점에서 안타 3위, 홈런 5위 등 다양한 부분에서 최상위권에 올라있는 ‘꾸준함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이다. 또한 KBO 역대 4명에 불과한 통산 타율 3할-출루율 4할-장타율 5할을 기록 중이기도 하다.

 

2002년 포수로 삼성에 입단했으나 2005년 방출됐고, 군복무를 마치고 2008년 삼성에 외야수로 재입단했다. 그리고 해당 시즌 좋은 활약을 보이며 2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신인왕을 수상하게 됐다. 출발은 늦었지만 출발 이후의 최형우는 누구보다 빨랐다.

 

이후 2010년대 삼성이 통합 4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최형우는 4번 타자 자리를 꾸준하게 지켰다. 2016년까지 삼성 시절의 활약으로 최형우는 타격왕, 홈런왕, 안타 1위 및 출루율 1위를 각 1번씩 기록했고, 외야수 골든글러브만 4번을 따냈다.

 

이후 최형우는 고향팀 KIA로 FA 이적을 선택했다. KIA에서도 최형우의 활약은 계속됐고, 2017년에는 출루율 1위와 외야수 골든글러브, 2020년에는 타격왕과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따냈으며 40대에 접어든 현재에도 KIA의 중심타자 자리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주요 시즌: 2016년(KBO) 138경기 타율 0.376 195안타 31홈런 OPS 1.115

 

6위 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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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42년 9월 27일

투타: 우투우타

주요 소속팀: 토에이 플라이어즈

 

KBO 역사상 유일한 4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이며,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NPB에서 통산 1839안타, 209홈런-212도루를 기록하고 타격왕까지 하는 굵직한 커리어를 남겼다. 커리어 초반에는 포수였으나 외야수로 전향하고 전성기를 맞았다.

 

고교 시절이던 1959년 역대 2번째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에는 농협 야구단 소속으로 실업야구 무대에 데뷔했다. 1962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대표팀의 준우승에 공헌했고, 토에이(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계약하며 NPB에 진출했다.

 

1965년 116경기에 나서 14홈런을 기록하며 주전급 선수로 도약했고, 이후 거의 매년 두 자릿수 홈런과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할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났다. 1967년과 70년에는 퍼시픽리그 올스타 외야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1972년에는 타율 0.315와 OPS 0.874, 그리고 20-20에 홈런 하나가 부족한 훌륭한 성적으로 통산 3번째 올스타에 선정됐으며, 1975년에는 0.319의 타율과 OPS 0.853을 기록하며 타격왕에 오르고 베스트 나인에까지 선정됐다.

 

1979년 타율 0.340와 18홈런, OPS 0.927을 기록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만든 백인천은 이후 하락세를 겪었다. 그러던 중 고국인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창설됐다는 소식이 들렸고, 백인천은 NPB 통산 2000경기라는 대업 달성에 31경기만을 남겨두고 한국행을 선택한다.

 

KBO 원년, 백인천은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어쩌면 영원히 깨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4할 타율을 기록했고, 타율 및 안타 1위, 홈런 2위에 더해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됐다. 이후 백인천은 1984년 마흔을 넘긴 나이로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주요 시즌: 1982년(KBO) 71경기 타율 0.412 103안타 19홈런 OPS 1.242

 

5위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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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88년 1월 12일

투타: 우투좌타

주요 소속팀: 두산 베어스

 

한 때 ‘4할을 못 치는 것이 약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완성형 타자이다. KBO 통산 안타 5위에 올라있으며, 국가대표팀에만 무려 10차례나 선발되는 동안 꾸준하게 좋은 활약을 펼쳐 한국 야구의 최전성기에 크게 공헌했다.

 

2006년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했고, 3년차이던 2008년 안타, 타율, 출루율 1위를 차지하며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2009년 또다시 안타 1위에 이번에는 20홈런을 넘기며 장타력까지 과시했고, 2010년에도 역시 20홈런을 넘기며 외야수 골든글러브 3연패를 달성했다.

 

이후로도 김현수는 계속 3할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나 너무 높아진 기대치에 비해서는 아쉽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28홈런을 기록하며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고, 2016년 MLB 진출을 시도했으나 그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2018년, 2년 동안의 MLB 도전을 마치고 돌아온 김현수의 행선지는 LG 트윈스였다. 김현수는 복귀 첫 해부터 타격왕에 올랐고, 2020년에는 통산 5번째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LG에서의 김현수의 활약은 현재 진행 중이다.

 

김현수는 베이징 올림픽 일본전 이와세를 상대로 대타 적시타를 기록하며 대표팀에 눈도장을 찍었고, 2009년 WBC에서는 대회 올스타팀의 지명타자로 선정됐다. 또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는 대회 MVP에 등극했고, 그 외의 대회에서도 정상급 활약을 선보인 바 있다.

 

주요 시즌: 2009년(KBO) 133경기 타율 0.357 172안타 23홈런 OPS 1.037

 

4위 장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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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56년 7월 6일

투타: 좌투좌타

주요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타격의 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타격 메커니즘을 가졌던 선수이며, 심판들 사이에서는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라는 얘기가 돌 정도로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했다. 통산 타율은 0.331로 KBO 역대 2위, 통산 출루율 0.427로 KBO 역대 1위에 올라있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제철 야구단에서 실업야구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육군 경리단 소속으로 군복무를 하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했고 4번 타자로 활약하며 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1983년 만 26세의 늦은 나이에 KBO 무대에 데뷔했고, 데뷔 첫 해부터 타율, 출루율, 장타율, 안타 4관왕을 기록했다. 이런 활약을 보이고도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신인왕을 놓쳤으니 이미 프로 데뷔 이전부터 장효조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84년 타율 4위로 잠시 숨을 고른 장효조는 이후 1985년부터 타격왕 3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1987년에는 역대 3위에 해당하는 0.387의 타율로 MVP까지 수상했으며, 출루율 및 외야수 골든글러브 5연패를 달성했다.

 

1988년에도 3할 타율과 4할 출루율을 기록했으나, 그동안 장효조를 곤란하게 여겼던 삼성은 선수협 파동을 구실로 그를 롯데로 트레이드해버렸다. 롯데에서 장효조는 1991년 타격 2위, 출루율 1위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1992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늦은 나이에 데뷔하고도 이렇게 많은 업적들을 남긴 것은 장효조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를 증명한다. KBO 리그가 빨리 생겼다면 그가 더 많은 업적을 세웠을 것이 확실하며, 필자의 부족한 필력이 혹여 그의 업적을 누락하지나 않았을까가 걱정이다.

 

주요 시즌: 1983년(KBO) 93경기 타율 0.369 117안타 18홈런 22도루 1.093

 

3위 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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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69년 7월 10일

투타: 좌투좌타

주요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KBO 역사상 최고의 야수 중 하나로 무려 18시즌 동안 꾸준하게 활약하며 수많은 기록을 세워 ‘梁神(양신)’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은 선수이다. 통산 타율 3할-출루율 4할-장타율 5할을 기록했음은 물론이고, 0.950의 경이로운 OPS는 역대 2위에 해당한다.

 

1993년 타율, 출루율, 장타율 타이틀을 모두 따내며 화려하게 프로무대에 등장했고, 당연히 그 해 신인왕에 올랐다. 1996년에는 타율, 장타율, 안타, 1998년에는 타율, 출루율, 안타 등 삼성 1기 시절 양준혁은 그야말로 타이틀을 휩쓸고 다녔다.

 

이후 트레이드로 해태와 LG로 옮겨 다니는 와중에도 양준혁의 활약은 계속됐다. 특히 2001년에는 개인 통산 4번째 타격왕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9년 연속 3할 타율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2002년 삼성으로 돌아온 양준혁은 2007년에는 KBO 역대 최초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대업을 남겼다. KBO 통산 2318안타와 351홈런, 타격왕 4회, 출루율 1위 3회, 안타 및 장타율 1위 2회, 골든글러브 8회, 20-20 4회를 남긴 양준혁은 2010년 은퇴를 선언했다.

 

이외에도 그가 남긴 기록과 업적이 너무 많기에 필자가 이를 다 적지 못한 것에 대한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1루로 전력질주라는 본인의 신념을 프로통산 마지막 타석까지 지킨 양준혁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다.

 

주요 시즌: 1997년(KBO) 126경기 타율 0.328 145안타 30홈런 25도루 OPS 1.082

 

2위 장훈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 TOP 30-2(15~1위) -cboard

생년월일: 1940년 6월 19일

투타: 좌투좌타

주요 소속팀: 토에이 플라이어즈

 

수많은 차별에도 한국 국적을 지키며 NPB에서 무려 23시즌을 활약해 유일한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NPB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다. 베스트 나인 16회와 올스타 19회, 타격왕 7회, 안타 1위 3회, 출루율 1위 9회 등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많은 타이틀을 따냈다.

 

1959년 데뷔 첫 해 신인왕을 수상한 장훈은 이듬해 커리어 첫 3할 타율을 기록하며 19년 연속 올스타와 11년 연속 베스트나인 선정의 시작을 알렸다. 3년 차엔 커리어 첫 타격왕에 올랐고 4년 차엔 31홈런-23도루, OPS 1.032에 출루율 1위로 MVP까지 수상했다.

 

5년 차인 1963년에는 33홈런과 41도루를 기록하며 30-30을 달성했고, 1965년까지 4년 연속 20-20을 달성했다. 커리어 전체가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훈이지만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특히 더 맹활약했던 기간으로 무려 타격 및 출루율 1위 4연패를 달성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는 다시 출루율 1위 4연패를 달성했고, 1974년에는 커리어 마지막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장훈은 요미우리에서도 3년 연속 3할-20홈런을 기록하며 활약을 이어갔다.

 

1980년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한 장훈은 5월 28일 NPB 역대 최초의 3000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고, 9월 28일에는 역대 3번째 500홈런을 기록했다. 이후 1981년을 끝으로 23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했고 1990년 일본야구전당에 헌액 됐다.

 

장훈은 NPB 통산 타율 0.319, OPS 0.933, 3085안타, 504홈런, 319도루를 기록했다. 3085안타와 타격왕 7회, 9년 연속 3할 타율, 3할 타율 16회 등은 NPB 역대 최고 기록이며, 이외에도 OPS 1.0 이상을 6번 기록했고 20-20을 5회나 달성했다.

 

한국인 차별이 만연했을 시기에 이렇게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점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며, 더 많은 야구팬들이 장훈의 이러한 업적에 대해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장훈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요 시즌: 1970년(NPB) 125경기 타율 0.383 176안타 34홈런 OPS 1.112

 

1위 추신수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 TOP 30-2(15~1위) -cboard

생년월일: 1982년 7월 13일

투타: 좌투좌타

주요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준수한 장타력과 정상급의 출루 능력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무려 16시즌을 소화한 선수로 한국인 선수 중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남겼으며, 명실상부한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부산고 시절 추신수는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고 얼마 뒤 타자로 전향했다. 4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추신수는 2005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이듬해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다.

 

2008년 추신수는 94경기에서 0.309의 타율과 14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 잡았고, 2009년과 2010년 2년 연속으로 3할 20-20을 달성하며 리그 정상급 외야수 중 하나로 등극했다.

 

2011년 다소 주춤했던 추신수는 2012년 다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 됐다. 그리고 역사적인 2013년, 추신수는 또다시 20-20 클럽에 가입했고 0.423의 출루율로 리그 2위에 오르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만들어냈다.

 

이런 추신수의 활약에 반한 텍사스 레인저스는 추신수에게 당시 기준 메이저리그 역대 27위에 해당하는 7년 1억30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안겼다. 추신수는 7년 동안 MLB 경력의 마지막까지 텍사스의 중심타자로 활약했고, 특히 2018년에는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서의 1652경기 동안 0.275의 타율과 0.824의 OPS, 218홈런과 157도루를 기록했다. 7차례나 20홈런 이상을 때려냈으며 4차례 20도루 이상을 기록했고, 20-20클럽에 3번 가입, 3할 타율과 4할 출루율을 2번씩 기록한 바 있다.

 

텍사스에서 MLB 경력을 마무리한 추신수는 국내로 돌아와 SSG 랜더스에 입단했고, 입단 첫 해 추신수는 건재함을 과시하며 4할대의 출루율과 20-20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4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을 것을 선수 본인이 스스로 예고한 상태이다.

 

국가대표팀에서 추신수는 2009년 WBC 준우승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기록한 바 있다. 이전까지는 보수적인 국내 감독들의 성향으로 인해 선발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세계 최고들이 모이는 MLB에서 수차례 정상급의 성적을 냈기에 추신수를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로 선정했으며, 다른 포지션에도 그에 준하는 성적을 낸 한국인 선수가 없으므로 필자는 그가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주요 시즌: 2013년(MLB) 155경기 타율 0.285 162안타 21홈런 20도루 OPS 0.885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야수 TOP 30-2(15~1위) -c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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