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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효에 대한 기록은 <시경>·<서경> 등에 많이 있으며 유교의 효사상은 공자에서 비롯되었다. 공자와 맹자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정이 효의 기본이지만 효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효의 유교적 개념은 한대에 <효경>으로 집약되었다.
신라의 세속5계 중 '사친이효'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덕적 의무를 '효'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가족제도는 전통적인 조상숭배신앙으로부터 발전했으므로 유교적 효사상이 곧 유교적 효윤리의 실천은 아니었다. 고려시대까지 가족윤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고려 말 가족생활에서 효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효행담을 편찬하고 〈주자가례〉를 보급했다. 이를 통해 불교적 상제례가 유교적 상제례로 바뀌었다.
효는 유교만의 것은 아니며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문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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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은대(殷代)의 복사(卜辭)나 금문(金文) 등에 보이며, 〈시경〉·〈서경〉 등의 기록에도 효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주대(周代)의 기록에 나타난 효의 내용은 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봉양·존경·복종과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에 대한 추모로 나누어지며, 특히 상제례를 통해 조상숭배의 새로운 형식으로 정립되었다. 또 당시의 가족제도인 종법(宗法)을 유지하는 도덕규범이었다. 효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공자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을 '인'(仁)이라고 하면서 그것의 근본 내용으로 제(悌)와 효를 들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효의 실천방법을 제시했다. 이후 맹자는 요순(堯舜)의 도를 효제로 이해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제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주요내용이라고 했다. 공자맹자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자연스러운 애정이 효의 기초이지만 애정과 도덕적 의무를 명확히 구별하여 효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물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일방적인 도덕적 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에 보이는 오륜(五倫)에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고 했고, 이는 〈논어〉의 '부부자자'(父父子子), 〈예기〉의 '부자자효'(父慈子孝)와 함께 부모와 자식 상호간에 도덕적 의무가 성립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자·맹자의 시대부터 이미 유교의 부자윤리에서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거의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 자식의 효도는 부모의 자애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식의 효도와 부모의 자애가 동일한 가치 또는 중요성을 갖는 도덕적 의무는 결코 아니었다.

유교사상에서 강조하는 효는 부모를 섬기는 것과 부모를 부양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부모에 대한 물질적 봉양보다는 공순한 정신적 자세를 중시했다. 부모를 섬긴다는 것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부모를 위해 힘쓴다는 것을, 또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공경과 예의를 다해 모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부모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효의 표현으로 간주하여 특수한 유교적 상례로서 부모의 3년상을 제시했다.

효에 관한 이러한 유교적 설명은 한대(漢代)에 이르러 〈효경 孝經〉으로 집약되었다. 〈효경〉은 효에 관한 공자·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적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효경〉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다른 모든 덕행을 효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공자와 맹자는 인의 근본으로 또는 요순의 도로 효와 함께 제를 들었으나, 〈효경〉에서는 효만을 덕의 근본으로 강조했으며 모든 덕행은 궁극적으로 효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변화는 종족제도가 붕괴되고 가부장가족이 사회구성의 기본단위로 확립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효경〉에 보이는 효의 또다른 특징은 정치적 지위에 따른 신분적 차이에 의해 실천하는 효의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효의 가치도 다르다고 본 점이다.

천자(天子)·제후(諸侯)·경대부(卿大夫)·사(士)·서(庶)와 같은 신분적 차이에 따라 효를 차별화하고 있다. 따라서 천자가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효를 행할 수 있으며, 천자의 효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즉 천자는 자신이 효를 실천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으며, 동시에 천하가 효를 행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또 〈효경〉은 사람의 도리인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천지의 이법(理法)에 따른 것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와 같이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도리로 파악하는 것은 효를 존중하여 효를 움직일 수 없고 어길 수 없는 도덕법으로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효사상을 담고 있는 〈효경〉은 한대 이후에 중국 역대 왕조의 교육제도에서 가장 기초적인 교과목으로 정해짐으로써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효경〉 성립 이후 효사상의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효의 규범을 광범한 계층에까지 가르치기 위한 방법인 효행담(孝行譚)의 유행과 불교적 효사상을 보여주는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의 성립을 들 수 있다.

〈효경〉이 효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위주로 한 것이라면 효행담은 뛰어난 효행을 보여준 인물들의 행실을 모범삼아 이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효윤리를 보급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서 晉書〉의 효우편(孝友篇) 이래 사서(史書)에 실린 효자들의 전기도 효행담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독립된 효행담으로 편찬된 가장 대표적인 책은 남송대 조맹견(趙孟堅)의 〈조자고이십사효서화합벽 趙子固二十四孝書畵合壁〉이다. 이 책은 대표적인 24명의 효행을 조맹견이 그림과 설명을 덧붙여 편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효경〉이나 효행담에 의해 효윤리가 보급되고, 또 국가는 제도나 형률을 통해 효윤리의 실천을 권장하거나 강제함으로써 효는 중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도덕규범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중국사회에서 효윤리가 갖는 영향력은 불교적 효사상을 성립시킨 사실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원래 불교는 세간과 초세간(超世間)을 구별하여 초세간을 진실한 세계로 간주하며, 그러한 초세간의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출세간(出世間)의 종교적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효를 비롯한 세간의 윤리도덕은 불교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효윤리가 지배하는 중국사회에 불교를 전파하고, 나아가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효윤리를 불교의 입장에서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부모은중경〉이라는 위경(僞經)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이 경전은 유교의 세속적인 효행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효행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더욱 가치 있는 효행은 불교적 신앙생활을 통해 부모의 사후추복(死後追福)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유교의 효윤리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불교적인 신앙생활 속에 포섭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불교적 효윤리의 실천은 주로 불교식 상제례를 통해 부모의 사후추복을 기원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송대 성리학은 이전의 유교와는 달리 불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명확히 했다.

성리학이 불교적 효행을 부정하고 유교적 효행을 강조하기 위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유교적 가례의 정비와 실천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성과가 〈주자가례 朱子家禮〉로 불리는 예서의 편찬이다. 〈주자가례〉에서 관혼상제 때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의도는 바로 불교적 효행을 유교적 효행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한국은 삼국시대에 국학이 세워지고 유학교육이 이루어질 무렵 이미 유교적 효사상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

6세기경 신라의 승려 원광(圓光)이 제시한 세속5계(世俗五戒) 가운데 둘째 항목이 '사친이효'(事親以孝)이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덕적 의무를 '효'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국학에서는 〈논어〉와 함께 〈효경〉을 기초적인 교과목으로 설정함으로써 유교적 효사상은 지식인들의 기본교양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가족제도는 중국의 가족제도와 다르고, 전통적인 조상숭배신앙으로부터 발전한 가족윤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교적 효사상에 대한 지식이 곧 유교적 효윤리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시대까지 가족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비록 고려는 유교교육을 강화하고, 정표정책(旌表政策)을 통해 효행자들을 표창함으로써 유교적 효윤리의 실천을 권장했으나, 서민들은 물론이고 지배층에서도 일반적으로 불교식 상제례를 행했다. 그러나 고려 성종 무렵에 유교정치사상이 지배적 정치이념으로 확립되고 그 정치이념에 〈효경〉의 사상이 그대로 채택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유교적 효사상은 정치이념의 성격을 갖는 것이고, 불교적 효사상은 가족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기부터 성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식인들은 유교적 효사상을 정치이념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족생활에서도 실천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유교적 효사상을 담은 효행담을 편찬하고 〈주자가례〉를 보급했다. 즉 고려 말기에 권부(權溥)에 의해 〈효행록 孝行錄〉이 편찬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효행록〉이 몇 차례 간행되고, 개찬되기도 했다.

이러한 효행담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이 세종대의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 가운데 〈효자도 孝子圖〉이다. 그리고 효행담의 편찬과 〈주자가례〉의 보급을 통해 불교적 상제례가 유교적 상제례로 바뀌었는데, 이는 유교적 효사상이 가족생활 내에까지 정착되는 기반이 되었다. 〈효자도〉에는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을 합해 모두 110명에 달하는 효자들의 행실 사례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과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 각각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의 효행으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사례, 부모가 병이 났을 때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한 사례, 부모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부모를 구한 사례들을 들고 있다.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는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거나 항거하는 사례, 부모의 유해를 마치 살아 계실 때처럼 정성스럽게 모신 사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애틋하게 사모하거나 행동을 근신하는 사례들이다. 〈효자도〉 가운데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태도로서 '원각경부'(元覺警父)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원각이 아버지의 잘못을 깨우쳐 올바른 행위로 이끈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효행 사례들을 통해 조선시대의 효사상을 살펴보면, 효윤리는 자식이 항상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부모를 섬겨야 하고, 부모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하며, 또 부모를 위해서라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효행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뿐만 아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며, 이 경우 효행은 상제례, 특히 〈주자가례〉에 따른 예제의 실천이 주된 내용이었다.→ 충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