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호가스

윌리엄 호가스

다른 표기 언어 호가스 , William Hogarth
요약 테이블
출생 1697년 11월 10일, 런던
사망 1764년 10월 26일, 런던
국적 영국

요약 17~18세기 로코코 시대 영국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거지 오페라>와 <새우 파는 소녀>와 <최신식 결혼>. 어린시절부터 인물의 모사와 데셍을 즐겼으며 15세쯤 은세공인의 도제가 되었는데 호가스는 금·은 세공품에 문장 디자인을 새기는 법을 지긋지긋해 하며 배웠다. 더 나아가 자신의 수련에 불만감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독학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호가스는 <거지 오페라>를 시작으로 <탕아의 편력>, <최신식 결혼> 등의 연작을 그렸고 판화로 제작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19세기 존 컨스터블은 호가스를 어떤 유파도 형성하지 못했으며 모방작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화가로 정의하기도 했으나 그의 풍자적인 판화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목차

접기
  1. 어린시절과 초기활동
  2. 명성과 성공
  3. 역사화와 초상화
  4. 판화로의 복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어린시절과 초기활동

그의 아버지 리처드 호가스 재능 있는 고전학자였다.

비록 유복하지는 않았어도 교양 있고 부지런한 분위기의 가정을 꾸렸다. 어린시절 그는 학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주위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타고난 한 화가의 작업실을 드나들면서 그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인물의 모사와 데생을 즐겼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을 꺾지 않았다. 그는 엄격한 장인 밑에서 안정된 수련을 받고 싶어했고 결국 15세쯤에는 은세공인의 도제가 되었다. 호가스는 아마 스승의 집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서 그는 금·은 세공품에 문장(紋章) 디자인을 새기는 법을 지긋지긋해 하면서 배웠다.

판화가인 조지 버튜가 '키 작은 관목의 교훈'이라고 적절하게 언급했듯이 그당시 그가 허비한 소중한 몇 해의 기간은 그뒤 호가스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호가스는 그 기간에 받은 자신의 수련에 불안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그동안 허비한 시간을 보상하기 위하여 독학이라는 비정통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미술가로서 그의 독창성과 유연성은 상당부분이 미술에 대한 이러한 실제적이고 틀에 박히지 않은 접근방식에서 나왔다.

그러나 호가스는 도제 기간에 결코 힘들게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교적이고 농담을 좋아했으며 인간의 행동을 예리하고 익살맞게 관찰하고, 특히 연극과 모든 종류의 전람회를 좋아한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주 좋아했다. 고상한 체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그는 런던의 거리와 유곽, 시장, 극장의 활기찬 생활을 직접 체험했으며 그로부터 일반대중의 관습들에 들어 있는 활력을 풍부하게 음미했다. 한편 작가·음악가·배우·자유직업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찻집과 선술집들에 끌려 그러한 활기찬 지식인 서클들에서도 사람들과 지속적인 친분을 맺었다.

그의 정서는 중류층 사람들에 가까웠으며, 특히 하노버 왕가 시기의 영국의 문화생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비판적·계몽적인 요소인 합리적이고 관대하며 인도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른 지 6년이 되었을 때 호가스는 23세의 나이에 독자적으로 자신의 공방을 차려 화가라는 직종의 엄격한 한계를 벗어나려 했다. 그는 세인트마틴스가(街)에 있는 사설 데생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석고상이나 실물을 기초로 데생을 익혔다.

그러나 그는 모사를 선천적으로 싫어하여 물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는 것에 다를 바 없다고 비유했을 정도이며, 더욱이 변덕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형식적인 수련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데생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생활에 직접 관심을 기울이는 데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림의 형식보다는 주로 표현에 관심을 기울인 직관적인 사실주의자였던 그는 일종의 시각 기억술, 즉 '모방하려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 자리에서 직접 그리지 않고 마음의 눈에 담아두는 방법'을 개발했다. 호가스는 일상적인 장면을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뛰어난 시각 기억술을 훈련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예비 스케치 없이도 자신의 착상을 종이나 캔버스에 직접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폭넓은 판화 작품들을 통해 유럽 전통미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즉흥적인 착상을 보완했다.

한편 그는 동판화가로서 명함이나 표, 책의 삽화 등을 만들어 생활비를 벌었다. 호가스는 삽화가로서 점점 성공했지만 거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도 역시 그의 아버지를 착취한 서적판매업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에 그는 "판화를 통해 그저 보통 수준의 생활을 유지했을 뿐이며, 판화는 기껏해야 보수를 정확하게 지불하는 경리원이나 마찬가지였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후기 바로크 양식을 능숙하게 적용한 제임스 손힐 경을 오랫동안 동경해오다가 드디어 1724년 손힐의 집에 새로 설립된 데생 학교에 들어갔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비평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왕의 수석화가라는 관직에 오르고 영국 태생의 미술가로서는 처음으로 경의 호칭을 받은 손힐은 그의 미술에서 영국의 고유한 미술의 활기와 미술가의 사회적 책임을 확고히 유지했다. 호가스는 이 2가지 모두에 강한 관심을 보였는데, 대부분이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미술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창조적인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옛 대가들만을 칭찬하는 미술감정가들의 배타적인 태도와 외국의 미술가들을 선호하는 그들의 편견을 경멸했다. 1724년 서적판매업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출판한 최초의 주요작품인 〈가장무도회와 오페라 Masquerades and Operas〉에서 호가스는 당대의 취향을 비판하고 그의 확고한 태도를 표명했다.

중요한 미술 후원자인 벌링턴 백작이 지원하는 강력한 파벌의 평가 기준에 대담하게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감정가들에게 타격을 입힌 호가스의 첫번째 비판은 그의 영웅인 손힐의 관심을 끌려는 생각이었는데, 당시 손힐은 벌링턴의 신고전주의 부흥운동에 피해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호가스는 활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강력한 적들을 갖게 되었고 1730년경 그들이 그의 작품에 대한 왕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그에게 앙갚음을 하자 그는 심한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호가스는 타협할 줄 모르고 완강하게 솔직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반대자들이 되받아칠 때마다 언제나 좌절감과 모욕감을 느껴야 했다.

1728년 그가 태피스트리 제작자인 조수아 모리스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그의 민감한 반응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소송의 세부적인 내용으로 보아 호가스는 30세가 될 무렵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에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리스는 호가스의 이같은 신념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주문을 철회했다. 호가스는 이에 분개하여 손힐 등의 전문가들을 증인으로 내세워 그들의 도움으로 이 문제를 공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그들의 증언은 그의 그림들 중 연대가 기록된 최초의 그림이자 하류층을 주제로 한 존 게이의 소극(笑劇)에서 따온 장면을 그린 〈거지 오페라 The Beggar's Opera〉(1728)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이 그림은 호가스가 주로 연극과 현실적·희극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는 현실의 세부를 면밀하게 관찰하여 마치 실제처럼 정확하게 그 장면을 기록했으며 주요한 배우들과 관객들의 초상화도 거기에 집어넣었다.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

그리하여 그는 뒤에 그린 서사화와 거실에서 담소하는 장면을 그린 소규모의 비공식적인 집단 초상화를 이 시기에 이미 보여주었는데, 그는 이 유망한 데뷔 작품을 그린 데 이어 그뒤 몇 년 동안 이러한 그림에 전념했다.

명성과 성공

호가스는 1729년 3월에 손힐의 딸인 제인과 함께 달아났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자식은 없었지만 안정되고 만족스러웠다. 수개월 뒤 버튜의 말에 따르면, 그는 비공식적인 집단 초상화로 공식적으로 성공했으며 그후 몇 년 뒤에 18세기초의 화가인 앙투안 바토와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우아한 양식에 큰 영향을 받은 이 작은 그림들로 부유한 고객들에게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당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비교적 보잘것없는 보수를 받고 많은 초상화를 비롯해 이 작은 그림들을 그려야 하는 것에 곧 싫증이 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일상적인 생활을 기초로 익살맞은 장면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캔버스를 많은 사람들로 가득 채운 〈서서크 시장 Southwark Fair〉(1733)은 민간 축제의 떠들썩하고 풍성한 활기를 담아내고 있으며 호가스가 당대의 생활에 대한 생생한 평가에 기초를 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서사화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연극계에서 사귄 친구들 가운데 배우 겸 매니저인 데이비드 개릭과 작가인 헨리 필딩은 그와 함께 미술에서의 진정한 자연주의에 열광했다. 그의 대선배이며 16세기의 플랑드르 화가인 대(大)페테르 브뢰헬과 마찬가지로 호가스는 실제의 생활에서 재미있고 교훈적인 사건들을 끌어내고자 했다. 한 젊은 시골 처녀가 런던에서 타락하고 그결과 비참한 처지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사회의 악덕과 추잡함을 풍자하고 명백한 교훈을 보여주었다.

이 판화들은 폭넓은 대중을 목표로 했으며, 그것들이 크게 성공을 거두자 호가스는 곧 재정상으로나 작품상으로나 독립할 수 있었다. 그뒤 호가스는 그의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리 마음놓고 자신의 관심분야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는 비양심적인 해적판들을 막고 자신의 생계 수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술가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법률을 제정하려고 싸웠으며, 1735년 호가스 법령으로 알려진 그러한 성격의 법률이 통과될 때까지 8부작인 〈탕아의 편력〉의 발표를 연기했다.

그 다음해에 호가스는 레스터필스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역사화와 초상화

손힐이 죽은 뒤 1734년에 호가스는 협동을 원칙으로 하는 그의 데생 학교를 다시 설립했는데, 그뒤 이곳은 미술토론과 실험을 위한 중심지가 되었다.

1735년 당대의 계몽적인 견해를 지배하고 있던 인도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는 세인트바솔로뮤 병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 병원의 주계단을 대형 종교화인 〈베데스다의 못 Pool of Bethesda〉·〈착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역사화를 위하여 익살맞은 서사화와 풍속화를 포기한 것은 무리였다는 평을 들었으며 현대의 비평가들은 대체로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1740년경 그는 다시 초상화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주로 중류층을 모델로 삼았다. 그는 특히 박애주의자인 친구 토머스 코럼의 전신상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기를 즐겼는데, 이 그림은 사라진 귀족적 전통에 솔직한 사실주의 기법을 주입하여 유럽의 초상화 기법을 폭넓게 함축하고 있는 매력적이고도 매우 감동적인 초상화이다. 이 그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호가스는 깊은 생각 끝에 1739년 코럼이 설립한 고아들을 위한 자선단체인 '고아원'에 이 그림을 걸었다.

처음부터 호가스는 이 모험적인 자선 사업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745년 건물들이 완공되자 동료 미술가들에게 그와 함께 교훈적인 그림들을 장식을 위해 기부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의 공동 노력으로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당대의 미술을 전시한 공공 전람회가 열렸으며, 이것은 1768년 왕립 아카데미가 설립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여러 면에서 호가스의 절정기를 이룬 해인 1745년에 그린 유명한 자화상은 회화를 통한 그의 선언서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는 짓궂게도 그 자신의 무뚝뚝하고 지적인 모습과 그가 기르는 트럼프라는 이름의 애완견 퍼그의 튼튼한 모습을 나란히 그렸으며 그 옆에 위대한 영국의 작가들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존 밀턴, 조너선 스위프트의 책들과 함께 자연의 다양함·복잡함·풍부함을 간결하게 상징한 물결 모양의 '아름다운 선'을 새긴 팔레트를 그렸다. 그와 같은 해에 그는 이미 1743년 5월에 완성해놓은 〈최신식 결혼 Marriage à la Mode〉이라는 오래 전부터 예고된 판화집을 출간하여 상류 계층의 결혼 풍습을 비판했다.

최신식 결혼(Marriage à la Mode)
최신식 결혼(Marriage à la Mode)

판화로의 복귀

호가스는 링컨 법학원(런던에 있는 4개의 법률 단체 겸 학교 중 하나)의 법률가들에게서 대형 역사화를 그려달라는 흡족한 일거리를 주문받았으며 그뒤 몇 년 동안 소박한 대중을 대상으로 유화가 아니라 데생을 기초로 한 단순하고 교훈적인 판화들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

그는 〈맥주 거리 Beer Street〉·〈진 거리 Gin Lane〉·〈잔혹의 4단계 Four Stages of Cruelty〉(1751)를 저렴한 가격으로 널리 배포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목판화로 일부러 투박하게 새겼다. 적대적인 세계에서 성공한 덕망 있는 견습생을 묘사한 〈부지런함과 게으름 Industry and Idleness〉(1747)에는 뚜렷한 교훈적 의미 외에도 자신을 극화시켜 묘사한 것이 상당히 엿보인다.

맥주 거리(Beer Street)
맥주 거리(Beer Street)

이무렵 많은 미완성 그림에는 호가스의 불안정한 심리와 좌절감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여러 점의 습작에서 그는 과거에 대작에서 실패했던 것들을 잘 성공시켜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동적인 요소들에 철저한 사실주의와 풍부한 채색기법을 결합했다. 이 스케치들은 그의 생전에는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19세기에 인상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커다란 관심을 끌게 되었다.

1745, 1751년에 호가스는 그의 작품을 경매에 부쳤다.

2번 다 그의 작품은 아주 낮은 가격에 팔렸고 호가스는 분개와 굴욕감 속에서 괴롭고 고독한 심정에 빠졌다. 그뒤로도 계속 자선사업을 벌이기는 했지만 공공연하게 도전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점점 미술 문제들에 관한 악의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미의 분석 The Analysis of Beauty〉(1753)에서 전개하면서 회화에 대한 실제적인 충고와 함께 기성 미술계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복잡한 형태의 구도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결과 더욱 풍부한 표현을 위하여 다양하고, 변칙적이고, 동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적극 옹호했다.

그의 견해는 특히 유럽 대륙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지만, 그 책은 그의 반대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정교하게 그린 그의 대규모 연작인 〈선거 Election〉(1754~58)는 '희극적인 역사화'의 진가를 보여준 마지막 그림이었으며, 그뒤로 그는 거의 중요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1757년 조지 3세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어 다시금 초상화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기울였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건강이 상당히 악화된데다가 한 고객이 그의 그림인 〈지기스문트 Sigismunda〉(1759)를 퇴짜놓고 그의 정치풍자 판화인 〈시대 I The Times, I〉(1762)이 대중으로부터 모욕적인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해 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까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죽기 몇 개월 전에 〈꼬리부분 Tail-Piece〉 또는 〈용두사미 The Bathos〉라는 냉소적인 제목의 판화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미술 세계가 끝났음을 침울하게 묘사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예언적이었는데, 왜냐하면 19세기의 영국 화가인 존 컨스터블이 적절하게 언급했듯이, "호가스는 어떤 유파도 형성하지 못했으며 또한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모방한 작품들도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직접적인 영향은 회화보다는 문학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는데, 그가 죽은 뒤 그의 위대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들은 호가스가 이미 그들의 사상을 상당 부분 예견한 바 있는 낭만주의 작가들이었다. 호가스는 결코 무시되지는 않았지만 주로 그의 풍자적인 판화들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으며, 또다른 외로운 선구자였던 19세기의 화가 J. M. W. 터너와 마찬가지로 영국보다는 유럽 대륙에서 그의 작품이 지니는 함축적인 의미가 더 잘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