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스

피프스

다른 표기 언어 Samuel Pepys
요약 테이블
출생 1633. 2. 23, 런던
사망 1703. 5. 26,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일기작가·해군행정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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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초기활동
  4. 해군 행정업무
  5. 일기

개요

1660년 1월 1일부터 1669년 5월 31일까지 왕정복고시대(찰스 2세 국왕)의 관료들과 상류사회의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한 〈일기 Diary〉(1825 초간)로 유명하다.

초기생애와 경력

피프스는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들의 신분은 런던으로 이주하기 전 헌팅던셔와 케임브리지셔에서 수세기 동안 수도원 관리인, 집세 수금원, 농부, 소지주 등이었으며 그의 모친 마거릿 카이트는 화이트채플의 푸줏간 주인의 동생이었다.

이렇듯 출신 배경은 보잘것없었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최초의 해군본부 위원장, 의회의원을 역임했고 영국왕립협회원장(영국의 위대한 과학서적인 아이작 뉴턴 경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의 표지에 그의 출판허가 도장이 찍혀 있음), 트리니티 하우스(수로안내협회)와 재단사협회의 대표직을 지냈으며 싱크 포츠 남작작위도 받았다.

그는 국왕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우스터 전투 직후 찰스 2세의 탈출과정을 속기로 기록했으며 1688년 제임스 2세가 망명하기 직전 그의 유언장 작성시 입회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크리스토퍼 렌 경, 아이작 뉴턴 경, 존 에블린, 고드프리 넬러 경, 존 드라이든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초기활동

새뮤얼 피프스는 유년시절 헌팅던에서 학교에 다닌 후 런던의 세인트폴 학교에 들어갔다.

1650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홀에 입학했으나 모들린 칼리지의 재단장학생 쪽을 택했고 거기서 석사학위(1653)와 박사학위(1660)를 받았다. 대학생활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라고는 "소문날 정도로 음주에 탐닉해"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것 정도이다. 훗날 그는 모교에 자신의 유명한 장서와 필사본들을 기증하는 등 대단한 후원자가 되었다. 한때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 칼리지의 학장자리를 제의받았으나 거부한 적도 있다. 1655년 12월 프랑스의 위그노 난민의 딸로 미인이었지만 무일푼인 15세의 엘리자베트 마르샹 드 생 미셸과 결혼했다.

이때 그는 호국경 크롬웰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사촌 에드워드 몬터규(후의 샌드위치 백작)의 하숙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피프스는 초라한 신혼생활을 담은 일기에서 그의 아내가 "샌드위치 경의 집 초라한 골방에서 석탄불을 지피고 직접 나의 더러운 옷을 빨았다"면서 "그래서 나는 아내를 영원히 사랑해야 하며 사랑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곳에 있을 때 그는 1658년 3월 26일 대수술을 받았는데, 그후로 매년 3월 26일에 만찬을 열고 "결석 제거를 기념하는 엄숙한 축제"라며 쾌유를 기념했다.

1659년 피프스는 사촌 몬터규를 따라 외레순 항해에 따라나섰다. 그무렵 그는 재무성의 출납원이었던 조지 다우닝의 사무실에 연봉 50파운드의 보수를 받고 사무직으로 취직했다(런던의 다우닝가는 조지 다우닝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임). 그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당시로 액스야드의 작은 집에서 살며 다우닝의 사무실에 다닐 때인 1660년 1월 1일부터이다. 몇 개월 후 그는 몬터규의 비서로, 망명중에 있는 찰스 2세의 호송선에 승선했다.

이어 사촌 몬터규의 왕궁 내 인맥을 통해 해군 법령을 관리하는 사무직에 취직하여 연봉 350파운드와 시딩 레인에 위치한 해군 관저를 제공받았다. 몇 년 안에 그는 치안판사, 선박 식량적재 감독관에 올랐다. 그가 이 직책들을 맡았을 때 직무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에 무지했다. 그는 업무상 새롭게 알게 되는 중요사항들을 익히고 윌리엄 배턴 경, 윌리엄 펜 경과 같은 동료들과 친밀한 우정도 나누면서 자신의 직책을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1662년 들어 상황이 변했다. 처음에는 요란한 음주 취미와 사회적 지위 때문에 끌렸던 동료들에 대해 지겨운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경험과 지위에서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피프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피프스는 동료들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에 그들이 맡겨진 업무에 그다지 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당시 일기에 "나는 업무에 관한 한 주어진 사명과 의무, 특권에 충실하기로 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적었다.

해군 행정업무

일을 적당히 처리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피프스는 일단 일에 충실하기로 작정한 이상 자신의 재교육에 착수했다.

1662년 여름 휴가기간에 곱셈구구표를 배우고 선박제조에 관한 강의를 들었으며, 선박 전문점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격조사를 실시했다. 일기에는 "템스가를 샅샅이 돌며 타르와 석유 가격을 조사했다. 거기에는 굉장한 내용이 있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왕실경비를 줄였으면 한다"고 적혀 있다. 이때부터 그는 커다란 모조지 묶음에 모든 계약과 비망록을 기록하고 공식서한의 사본을 보관하는 습관을 길렀다. 모조지 묶음은 아내 엘리자베트 피프스와 그녀의 하녀들이 정성들여 관리했다.

영국 해군을 위한 피프스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업무는 1665~67년 제2차 네덜란드 전쟁 때 진가를 발휘했다.

전쟁 동안 그는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도 묵묵히 사무실을 지켰으며 런던 대화재 때는 해군청사를 구해냈다. 이로써 그는 찰스 왕과 왕의 동생인 요크 공작 제임스의 신임을 받았다. 한편 시력에 이상이 생기고 부인과 사별한 1669년까지 그의 일기는 계속되었다. 1673년 제3차 네덜란드 전쟁 기간에 요크 공 제임스의 가톨릭 개종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혔고 제임스는 해군제독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피프스는 이때 다시 구성된 해군본부 위원장에 올라 해군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또한 캐슬라이징 하위치 대표 의원이 되어 해군본부 일을 보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수년 전 의회에서 해군업무를 변호한 적이 있었다. 해군본부 위원장이 된 피프스는 약 6년 동안 해군업무를 마비시키는 부패척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의 큰 공적은 30척의 새 전함 건조계획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엄청난 전함구축 계획으로 인한 해상전투력의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었다. 해군본부와 의회에서 피프스는 효율성과 정직성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때로는 어린애처럼 항상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까지 일을 밀어부쳤다. 이러한 그의 업무 처리방식은 많은 적을 만들어냈다. 그중 샤프츠버리 경은 가톨릭교도인 요크 공 제임스의 왕위계승 반대운동을 펴면서 런던 시장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의 의문에 싸인 살인사건에 피프스를 연루시켰다.

런던 시장 살해사건으로 사람들은 가톨릭 음모사건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고, 가톨릭교도 제임스의 측근인 피프스를 연류시키려고 했다. 피프스는 확실한 알리바이를 내밀었고, 그의 정적들은 이번에는 피프스가 신뢰하는 비서 새뮤얼 앳킨스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피프스를 괴롭혔다.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정적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과 비서의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6개월 후 정적들은 공갈의 명수 악당 존 스콧을 영국으로 데리고 왔다. 스콧은 지금의 미국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범죄생활을 시작했으며 런던에서 예수회파로 가장한 수상쩍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피프스는 고드프리 살해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구속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피프스는 오히려 스콧과 의회 내 제임스의 반대파가 덮어씌운 반역죄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찰스 2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새 의회의 개원을 1년 반 동안 유보하지 않았다면 피프스는 그의 충성, 능력, 반부패 정신 때문에 곤욕을 치를 뻔했다.

피프스는 다음 의회가 열릴 때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자신의 불명예를 유발한 방증자료를 모아 정적들의 주장을 무색하게 했다.

1683년 찰스 2세의 실권이 반대파들을 무시할 만큼 강력해지자 피프스는 공직에 복귀했다. 그보다 1년 전 그는 요크 공의 스코틀랜드 순방에 동행했으며 이제는 다트머스 백작의 자문관으로 탕헤르 주재 영국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한 항해에 참여했다. 1684년 탕헤르 항해에서 돌아온 그는 찰스 2세에 의해 다시 옛 지위에 올랐다.

영국 해군대신이란 직책에 연봉 500파운드를 받게 된 그는 해군제독과 대신의 사무실을 통합, 해군업무와 의회보고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그후 제임스 2세의 통치기 전기간을 포함한 4년 6개월 동안 지출예산이 가장 많은 해군성을 통제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타고난 용기와 근면으로 해군의 새로운 구조를 창출, 반대세력들의 비능률·부패를 청산했다. 또 1686년 '해군 부흥을 위한' 특별위원회도 만들어 해군을 강화했다. 1689년초 제임스 2세가 폐위되자 피프스 또한 퇴임했다.

그때까지 그는 영국 해군을 전세계 해상에서 최고의 우위를 지킬 만큼 강력하게 만들었다. 사실 영국 해군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과 로버트 블레이크와 같은 해군의 천재들에 의해 이웃나라 해군에 비해 일시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영국의 '해상패권'이 장기간 유지된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자랑에 지나지 않았었다. 1660년 피프스가 처음 해군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영국 해군은 30척의 전함에 약 2만 1,000t의 수송능력, 1,730문의 함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력은 그가 퇴임할 때 59척의 전함, 6만 6,000t의 수송능력, 4,492문의 함포로 증강되어 있었다.

그는 해군 전력을 2배로 증강했을 뿐만 아니라 미비했던 질서와 기강이 잡힌 해군행정력을 심어놓았다.

옥스퍼드대학교의 한 웅변가는 "전해상이 경계를 갖추고 영국이 목재 방어벽으로 둘러싸이게 된 것은 모두 당신의 덕택입니다"라고 피프스의 공덕을 찬양했다. 피프스는 은퇴한 후 나머지 14년 여생을 정적들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요크 빌딩가의 강변저택에서 명예롭게 보냈다.

학자·예술가들과 교분을 가졌고 이때 직접 서적을 모아 만든 장서를 훗날 옥스퍼드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에 기증했다. 해군 역사에 대한 자료도 모았으나 이 작업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그는 하인이자 평생 친구였던 윌리엄 휴어의 클래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료 일기작가 존 에블린은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많은 분야에서 배움을 익혔고 음악에 뛰어났으며 함께 대화를 나눈 지식인들에게 훌륭한 기억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일기

피프스를 유명하게 만든 그의 〈일기〉는 27~36세 때 쓴 것이다(일기). 토머스 셸턴이 개발한 속기법으로 쓴 일기는 125만 단어로 피프스 장서에 보관된 4절지 6권의 분량이었다.

그의 〈일기〉는 단순히 작자의 생각과 행동을 담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인생을 그리는 데 필수적인 일과 사소한 일을 구별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일기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일기〉는 성경과 제임스 보스웰의 〈새뮤얼 존슨의 일생 Life of Samuel Johnson〉 다음으로 영국인들의 침대머리 맡에 놓여지는 책일 것이다. 누구든지 〈일기〉의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국왕 찰스 2세의 삶과 정력적이고 호기심 많고 열심히 일하면서 삶을 즐겼던 작자의 인생에 몰두하게 된다. 피프스는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졌고 모든 일을 알려고 했다.

그에게는 지루한 순간이 없었고 지루함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일기〉의 코믹한 대목 중 하나는 스탠키스라는 그의 시골 사촌이 런던 그의 집에 머무르려 상경할 때 벌어진 촌극이다. 피프스는 사촌에게 런던 풍경을 보여주려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맙소사! 스탠키스가 벌인 소동이라니. 그는 런던의 군중에 휩싸여 거리를 걷는 것조차 겁을 냈고 아내와 애쉬웰이 제의한 연극구경, 화이트 홀(정부청사) 방문, 사자구경 등을 모두 거절하고 역마차만을 타고 다녔다. 이 세상에 그만큼 호기심이 없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피프스는 적절한 몇 마디 단어로 어떤 장면이나 사람을 간략히 묘사할 줄 아는 저널리스트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을 짤막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 그의 아주머니 제임스는 "가련하고 선한 영혼을 가졌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에 관한 얘기만을 했고 그녀의 순진성이 나를 즐겁게 했다"고 표현했다. 그의 여동생 팔은 "귀엽고 훌륭한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날씬했으나 얼굴은 주근깨가 많고 예쁘지 않다"고 묘사했다. 그는 왕정복고와 국왕 즉위식, 페스트의 공포, 런던 대화재 등 그 시대의 사건들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런던 대화재 때의 그의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다리 이쪽 저쪽에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는 것을 목격했다. 1마일가량 떨어진 언덕 저 너머에도 불길이 활활 타올랐으며 어느새 나는 눈물을 흘렸다. 교회·주택 등 모든 건물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고 공포어린 불길소리와 함께 건물들이 스러져갔다"

무엇보다도 피프스는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그가 살던 시대를 독자들까지 공유하도록 만든다.

"야경꾼이 내 방 창가에서 종을 흔들어 댈 때까지 나는 밤을 새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울고 있다. 하루가 가고 춥고 세찬 바람이 부는 아침이 찾아왔다"고 한 대목에서 그는 촛물이 흐르는 촛불을 "이렇듯 축축하게 글을 쓰게 만드는" 묘사하는가 하면 새로 산 시계에 대해서는 "나의 해묵은 어린아이 같은 어리석음이 내 몸에 매달려 있어 나는 여전히 시계 차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하루에도 밤낮으로 수백 번 몇 시인가 묻곤 한다"고 쓰고 있다.

밤중에 잠을 깬 일화에서는 "새벽 3시께 나는 빗소리에 깨었다. 내 인생에 저토록 거친 빗발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방에 갇혀 있었다. 고양이는 지독하게 울어대더니 마침내 내 침대로 뛰어올라 나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쓰고 있다.

피프스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을 빼놓지 않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도 스스럼없이 적었다. 모든 사람들이 죄악시하지만 스스로 인정은 하지 않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도 모두 기록했다. 자신의 허영과 위선에 대해서도 기록했는데, 한번은 새로 산 가발을 쓰고 교회에 처음 나갈 때의 일을 적은 일이 있다. "새 가발을 쓴 나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교회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집중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질투심, 불공정성, 돈에 대한 인색함에 대해서도 적었다.

"집에 돌아와보니 모든 것이 잘 있었다. 단지 마차 속에 스카프·코트·잠옷을 두고 내린 아내의 부주의가 약간 짜증이 났다. 그러나 사실 그 물건들은 아내가 나에게 맡겨둔 것들이었다" 피프스는 독특하고 완벽한 정직성을 가짐으로써 평범한 사람이자 기록의 천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일기는 자신의 약점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