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2세

찰스 2세

다른 표기 언어 Charles II
요약 테이블
출생 1630. 5. 29, 런던
사망 1685. 2. 6,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찰스 2세는 크롬웰 공화정 이후 영국의 왕정복고시대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시절 왕권을 강화하는 전제정치를 펼쳐 의회와 대립했다. 1630년 찰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왕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선포했으나 크롬웰의 군대에 패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 크롬웰이 세상을 떠나고 영국 의회의 왕정복고 결정에 따라 1660년 왕위에 올랐다. 재위시절 끊이지 않았던 성공회와 가톨릭 사이의 투쟁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비영국국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하원에 의해 좌절되었다. 1670년에 맺은 프랑스와의 도버비밀조약에 따라 신교도 국가인 네덜란드와 2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의회와의 갈등 속에서 왕권을 확대하는 정책을 강화하여 후일 명예혁명 발생의 계기를 제공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출생과 초기생애
  3. 왕정복고
  4. 대외정책
  5. 찰스 2세에 대한 평가
찰스 2세(Charles II)
찰스 2세(Charles II)

개요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에 몇 년 간 망명생활을 한 후 영국 왕으로 복위함으로써 영국 역사에서 그의 재위기는 왕정복고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뛰어난 정치적 적응력과 인물에 대한 판단력은 재위시절 끊이지 않았던 성공회와 가톨릭 사이에 벌어진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이 되었다.

출생과 초기생애

찰스 2세는 찰스 1세와 프랑스 출신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 사이의 생존 자녀 중 맏아들로,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으나 20세가 되기 전에 겪은 영국내란(청교도혁명)에서의 패배와 이어서 닥친 고립과 가난을 통해 배운 쓰라린 교훈은 그가 받은 관례적인 교육을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로 인해 조숙하고 냉소적이었으며 때로는 방종했고, 역경 속에서도 삶을 안락하게 해주는 일종의 정신적인 도피처를 찾는 데 능숙했다. 1648년에는 부왕 찰스 1세를 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영국 공화정부에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찰스 2세로 선포되자, 동맹의 대가로 엄격하게 반(反)가톨릭적이며 반성공회적인 장로교 서약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갈 채비를 했다(엄숙동맹). 그러나 친구들의 희생과 자신의 지조까지 팔아 공을 들였음에도 성과가 없자 크게 상심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1650년 9월 던바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의해 격파당했고 1651년 그가 주도한 잉글랜드 침공도 우스터에서 패배로 끝났다. 그는 망명객 신세가 되어 40여 일 간 숨을 곳을 찾아 잉글랜드를 헤매며 몇 안 되는 충성스런 신하들의 보호를 받다가 1651년 10월 프랑스로 탈출했다.

찰스의 신변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궁핍했고 친구도 없었으며 점점 강력해지는 영국에 압력을 가할 수도 없었다. 크롬웰의 외교술로 인해 프랑스·네덜란드와도 단절되자 스페인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그는 1656년 4월 스페인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대체로 유럽의 군주들은 그와 그가 주장하는 대의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가 내놓았던 결혼 제안들도 정중히 거절당했다. 심지어는 크롬웰의 죽음조차도 그에게 더 나은 전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크롬웰 휘하의 장군이었던 조지 멍크는 크롬웰의 후계자 아래서 나라가 사분오열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강력한 군대를 동원해 1660년 왕정복고 상황을 조성했다.

대부분의 영국민들은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왕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1660년 4월 찰스는 브레다 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일반사면과 종교의 자유 및 토지분쟁의 공정한 해결, 그리고 군대 체불 임금의 완전지급이 자신이 원하는 바임을 표명했다.

구체적인 조항들은 의회에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맡기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1660년 5월 왕으로 선포되었다. 5월 29일 찰스는 도버에 상륙하여 환호를 받으며 런던으로 입성했다. 이날은 그의 30회 생일날이었다.

왕정복고

1660~62년 왕정복고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은 찰스의 개입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분명히 그의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1640, 1641년에 찰스 1세가 양보했던 사항을 준수해야 했으나 1661년에 구성된 의회는 강경한 성공회와 왕당파의 입장에서 왕정복고안을 결정했다. 1661년의 민병대 법은 찰스에게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는 전례 없이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고, 역시 1661년의 자치법은 반대파 관리들을 자치시에서 제거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상층부의 협소한 충성 구조 내에는 찰스의 독립을 제한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들어 있었다.

비국교도와 로마 가톨릭 신앙을 가진 국민들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확대하려는 그의 노력은 1663년 좌절되었고, 통치기 전반에 걸쳐 하원은 그가 좀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더욱 광범위하고 해로운 제한은 그의 재정적 독립에 가해진 제약이었다. 찰스는 연간 120만 파운드의 수입을 책정받았지만 아직 그 액수를 채워서 받기에는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고, 이무렵 채무 액수와 신용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검약할 줄 몰랐으며 많은 청원서들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1665~67년의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입은 막대한 손해로 복위왕 찰스의 평판은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대외정책

찰스는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오래된 고문인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를 해임하고 한층 모험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려고 했다.

이때까지 그의 통치가 영국의 상업 발달에 기여한 점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네덜란드 수송무역의 호조가 영국 선박에 위협을 가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추진한 1660, 1663년의 항해조례는 크롬웰의 정책을 더욱 확대한 값진 성과였으며, 1664년 뉴욕 점령은 네덜란드로부터 획득한 몇 안 되는 성과물 중의 하나였다.

1670년 5월에 체결된 이른바 도버 비밀조약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에 대항해 동맹을 결성할 뿐만 아니라 찰스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3국동맹). 만약 이 일로 영국민들 사이에서 말썽이 생겨날 경우에는 프랑스의 군사력과 재정지원으로 해결한다는 보증을 받았다. 찰스는 조약의 항목 중 개종에 관한 것이 공개되지 않도록 조처했다.

찰스 2세의 통치행위 중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조항은 루이 14세의 신임을 얻기 위해 취한 근시안적인 시도로 설명될 수 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감스럽게 바라보며 찰스의 정책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감 상실이었다. 그밖의 여러 정황은 영국민들이 가지는 국왕에 대한 불만의 골을 깊게 했다. 1670년대에 왕비가 유산을 함으로써 적자 계승자를 확보할 수 있는 희망이 줄어들었고, 1673년 그의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가 모데나의 메리와 2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가톨릭교도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더 짙어졌다.

제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찰스와 달리 제임스가 우려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종교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결국 찰스가 자신의 통치기에 겪어야 했던 혹심한 정치적 시련은 제임스를 대신해서 받은 고통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678년에 일어난 가톨릭 음모사건은 낯선 사람의 진술 내용을 골자로 면밀하게 짜여진 거짓 이야기였다.

전직 성공회 목사로, 예수회 신학교에서 쫓겨난 타이터스 오츠의 진술, 즉 가톨릭교도들이 제임스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찰스 살해계획을 세웠다는 진술이 여러 증거문서들로 확인된 듯하다. 찰스는 당연히 이 증거들을 믿지 않았으나 자신의 동생을 왕위계승 서열에서 배제하려는 전국적인 흥분의 열기 앞에 굽힐 수밖에 없었다.

찰스가 프로테스탄트인 첫아들 몬머스 공작이 적자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가톨릭교도인 동생 제임스를 영국에서 내보내야 했고, 만약 제임스가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그의 권위를 구속할 제한안들을 제출해야만 했다. 이 안은 휘그당과 제임스 양쪽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679년 여름 찰스가 중병으로 눕게 되자 충돌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찰스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왕비에 대한 중상 모략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왕비를 변호했으며 비협조적인 의원들을 해임하고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마지막 의회를 해산했을 때인 1681년 3월부터, 흡사 1660년에 그랬던 것처럼 찰스에 대한 충성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와 체결한 또하나의 비밀조약은 아직 유효한 상태였고 게다가 프랑스의 보조금으로 견고한 국가수입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1667년에 시작한 재무부 개혁 작업은 찰스 2세가 영국 정부에 물려준 값진 유산 가운데 하나인 행정 통제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조치들의 결과 찰스는 자신이 늘 갈망하던 일종의 평온한 번영을 누리는 가운데 1685년 2월 런던의 화이트 홀에서 세상을 떠났다.

찰스 2세에 대한 평가

"쾌락을 조금 추구했다고 해서 신이 그 사람을 결코 파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믿었던 찰스는 왕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아주 확실하게 즐겼다.

훤칠한 키에 활동적이었던 찰스는 승마와 항해를 매우 좋아했으며, 회의석상에서 고문관들보다 오래 앉아 있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건강했지만 지루하고 오래 끄는 회의는 질색이었다. 이런 단점은 그의 정부의 효율성을 떨어뜨렸고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완화된 종교적 관용정책의 실시는 궁극적으로 재위시절의 안정유지에 기여했고 이는 그의 정직하지 못함과 불성실함으로 인해 훼손된 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찰스는 영국 왕립학회 설립 특허장을 내주었고 회의론과 유물론이 풍미했던 그의 시대가 제공하는 이점을 맘껏 누렸으며 항해술과 선박 설계술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찰스는 영국 해군 발전을 위해 성실한 노력을 보였고, 역사가들은 이를 찰스의 결점들을 보완해주는 중요한 장점으로 평가하지만 그다지 주목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찰스의 재치와 수준 높은 지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찰스에 대한 평가는 논쟁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현대의 어떤 사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찰스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볼 때 찰스는 국왕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볼 때 훨씬 매력적임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