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크

멍크

다른 표기 언어 George Monck 1st Duke of Albemar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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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08. 12. 6, 잉글랜드 데번 그레이트포서리지
사망 1670. 1. 3,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 내란(청교도 혁명) 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활약한 잉글랜드의 장군.
Earl of Torrington, Baron Monck of Potheridge, Beauchamp and Teyes라고도 함. Monck는 Monk라고도 씀.

11년간의 공화정이 끝난 뒤 1660년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도운 인물이다.

유복한 데번가의 자손으로 1629~38년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군과 함께 스페인 군대에 대항했으며, 1642~43년에는 아일랜드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고, 1643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국왕 찰스 1세 편에 서서 의회파에 맞서 싸웠다. 1644년 1월 체셔의 낸트위치에서 의회파에게 붙잡힌 뒤 2년 동안 런던 탑에 포로로 갇혔다. 1646년 국왕이 의회파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뒤 의회파는 멍크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파견했다. 그러나 크게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1649년 반란군과 타협하게 된 결과 사령관직을 물러나야 했다.

1650년 의회파의 지도자인 올리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 왕당파들을 진압하기 위한 보병대를 그에게 맡겼다. 그해 9월 3일 던바의 전투에서 그는 크롬웰과 함께 싸워 왕당파들을 크게 물리쳤다. 그뒤 스코틀랜드에서 왕당파의 진압을 마무리짓는 임무를 맡아 총사령관으로 있었다.

1652년 11월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는 다른 2명과 함께 해군 장군에 임명되었고 잉글랜드 함대가 3차례나 승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654년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에서 왕당파의 반란을 다시 성공적으로 진압한 그는 당시 공화국 호국경이던 크롬웰의 명령에 따라 그곳 총독으로 있었다. 멍크는 처음에는 크롬웰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리처드를 지지했으나 호국경 정치를 폐지하고 장기의회의 일부 급진파 의원만이 남은 '잔부의회'(殘部議會 Rump Parliament)를 부활시키는 데 반대하지는 않았다.

멍크는 1659년 10월 육군소장 램버트가 무력으로 잔부의회를 해산하고 수립한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12월 잔부의회 재소집을 요구한 뒤 1660년 1월 스코틀랜드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와 램버트에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소집된 잔부의회는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잔부의회는 3월에 해산되었고, 새로 선출된 컨벤션 의회는 찰스 2세를 다시 국왕으로 추대했다. 멍크의 권유에 따라 찰스 2세는 대사면(大赦免)과 종교의 자유 등을 내용으로 하는 브레다 선언을 발표했다.

스튜어트 왕가가 평화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운 공로로 멍크는 앨버말 공작과 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매년 거액의 연금을 받았으며, 또한 거마관리관·아일랜드 총독·총사령관을 지냈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67) 동안에는 영국 함대를 지휘했다. 그의 전기로는 모리스 애쉴리의 〈멍크 장군 General Monck〉(1977)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