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5세

비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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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04. 1. 17, 밀라노 보스코
사망 1572. 5. 1,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1712년 5월 22일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5월 5일. 교황(1566~72 재위).
본명은 Antonio Ghislieri.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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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교황청 개혁
  4. 영향

개요

금욕주의자·개혁자로서 이단자들을 가차없이 박해했다.

그가 교황으로 재위한 기간은 로마 가톨릭 교회사에서 냉혹했던 시기로 손꼽힌다. 그는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뿌리뽑는 데 성공했고,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법령들을 실행에 옮겼다.

초기생애와 경력

안토니오 기슬리에리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목동생활을 하다가 14세에 도미니코 수도회 탁발수사가 되었다.

맨 먼저 받은 중요한 직위는 종교재판소의 고위직인 종교재판관이었는데, 당시 종교재판소는 이단들을 색출·심문·처벌하기 위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법기관이었다. 지나치게 엄격하여 그가 소속되어 있던 참사회뿐만 아니라 주교출신 종교재판관들도 그의 방법을 반대해 1550년 로마로 소환당했다. 로마의 대심문관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는 그의 진가를 인정하고 임무를 맡겨 롬바르디아로 파견했고, 1551년에는 로마 종교재판소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카라파가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뒤 기슬리에리는 1556년 네피와 수트리 주교, 1557년 추기경, 마지막으로 1558년 로마 가톨릭 교회 대심문관에 임명되었다. 교황 비오 4세 때에도 이 직무를 계속 맡았으나, 비판적이고 완고한 태도로 비오 4세와 대립했다.

교황청 개혁

비오 4세가 죽은 뒤 그의 조카인 추기경 가롤로 보로메오(나중에 성인이 됨)가 이끌던 엄격한 종교규율 주장자들에 의해 어려움 없이 교황이 되었다(1566. 1. 7). 비오는 금욕적인 생활태도를 계속 유지하면서 즉시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교령과 규율을 신속히 공포하고, 교황청을 근실한 생활의 표본으로 만들었으며, 도시에서 매춘부들을 쫓아내거나 특정 지역에 제한시키고, 주일(主日)을 범하거나 신을 모독하거나 동물을 학대하는 행위를 처벌했다. 또한 성직록을 보유하고 있는 성직자들에게 일정 기간 관할구역에서 지낼 것을 요구하고, 수녀들에게 서약 내용에 따라 엄격한 은둔생활을 할 것을 명령하고, 교리문답(가톨릭 신앙 원칙들을 개략해놓은 간략한 안내서) 교육을 명령했다. 1566년 새로운 교리문답서를 펴냈고, 그뒤에 성무일도서(성직자들과 수녀들을 위한 매일 기도서) 개정판(1568)과 미사경본(미사를 위한 기도문) 및 응창을 실은 책의 개정판(1570)을 펴냈다.

대사 남용을 금지했고, 고행 체제 전체를 개혁했다.

그는 친족 등용 관행을 철저히 배격했다. 조카 1명을 추기경에 임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권은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가족은 멀리 거주하게 했다. 〈Admonet Nos〉라는 회헌을 공포함으로써(1567. 3. 29) 봉건 영주가 보유하되 죽을 때 교황청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토지재산 봉토를 재수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추기경들에게 이 규정에 서약하도록 했다.

1569년 3월 유대인들을 교황령에서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고, 다만 경제적인 이유를 고려하여 굴욕적인 조건으로 로마와 안코나에 남아 있도록 허용했다. 1571년 2월 대주교인 추기경 보로메오를 암살하려 했던 밀라노의 부패한 수도회 억겸파(抑謙派, '굴욕을 받은 자'라는 뜻)를 해산시켰다.

종교재판소 규율을 강화했고, 오랫동안 연기된 해묵은 사건들을 끄집어내어 재판을 열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신분을 참작해주기보다는 더욱 가혹한 벌을 내렸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리들을 받아들인 사실이 드러난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더욱 가차없이 대했다. 세속 군주들은 더이상 이단을 보호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해 교황청의 호의를 얻으려고 했다. 1566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신학자이자 예전에 잉글랜드 여왕 메리의 고해신부였던 바르톨로메 데 카란사를 종교재판소에 넘겨주었다.

1567년 코시모 데 메디치는 교황 바오로 4세의 재위기간에도 이단 혐의를 받은 바 있는 피렌체의 이단자 피에트로 카르네세키를 종교재판소에 넘겨준 대가로 2년 뒤 토스카나의 대공(大公) 칭호를 얻었다. 1571년 3월 신앙과 도덕에 해로운 책들을 판정하기 위한 특별 '금서목록제정회의'를 종교재판소와 구분해서 세웠고, 그결과 수많은 인쇄업자들이 스위스와 독일로 도피했다. 비오는 자신이 때로 지나치게 관대하게 행동했다고 자책했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무지비한 폭정을 해서라도 네덜란드에 있는 가톨릭 속민들을 보호하라고 독려했고,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하여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위그노교도들을 진압하는 일을 돕도록 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종교관용 정책에 항의했다.

영향

위와 같은 활동들을 통해서 비오는 보로메오의 신념, 즉 프로테스탄트 교리들을 논박하고 가톨릭 신앙을 개혁하기 위해 마련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령들이 실효를 거두려면 영적인 일에 뜻을 둔 교황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신념을 정당화했다.

교황청의 도덕 수준을 높혔고, 이단들을 이탈리아에서 제거하여 교황청의 효율성을 증대했으며, 공의회가 결정한 법령에 따라 교회 교리를 일관성있게 해석함으로써 교회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종교재판소를 끊임없이 운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개선이 있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부분적으로는 여러 지방의 젊은 성직자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임자들과는 아주 다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트리엔트 공의회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아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서 개혁을 마무리했지만, 중세 교회법은 손대지 않고 남겨 두었는데, 이 법은 1970년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비오의 정책은 실제적으로 불리했다. 이단에 맞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세속 군주들에게 지원을 받는 것이 필요했는데도 이들의 의사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아무런 집행능력도 없이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그녀를 왕권 탈취자로 선포했으며(1570. 2. 25),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페인,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서도 등을 돌렸다.

투르크족에 대하여 십자군을 일으켜 레판토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1571. 10. 7) 그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0월을 로사리오 성월(聖月)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