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사

한국과학사

다른 표기 언어 韓國科學史

요약 한국 과학에 관한 발달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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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국시대의 한국과학사
  2. 고려시대의 한국과학사
  3. 조선시대의 한국과학사
    1. 전기
    2. 후기
  4. 개화기 이후 한국과학사
  5. 한국과학사학사

삼국시대의 한국과학사

한국에서 과학의 역사적 전개는 이 땅에 한국인의 조상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록과 유물로 분명하게 남아 있는 근거에 의한 한국과학사의 서술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특히 초기로 갈수록 과학사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은 극히 부족하다. 예를 들면 김부식이 12세기에 완성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13세기 일연의〈삼국유사 三國遺事〉의 경우 과학기술의 내용을 전해주는 기록은 극히 적다.

그렇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과학사 자료가 된다. 일식·월식·혜성 등의 천문기록이 있는가 하면, 가뭄과 홍수 등 땅 위에서 일어난 자연의 부조화도 기록해 놓았으며, 흰 노루나 유난히 큰 벼 이삭, 그리고 3쌍둥이의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자연현상의 기록만 1,000개가 실려 있다.

이들은 자연현상을 그저 과학적으로 관찰해 보고했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이상한 현상에 대한 외경심, 즉 재이(災異)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동양적 기본사상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땅·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시대부터 한국인들은 이 삼재(三才) 중 하늘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시대부터 가장 일찍 발달한 과학분야는 천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경주에 남아 있는 첨성대이다. 그 모양, 돌을 쌓은 단(段)의 수, 쓰여진 돌의 수에 이르기까지 첨성대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신라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신라의 수도 경주에 첨성대가 세워진 647년 전후에는 신라 천문학 발달의 모습이 단편적이지만 기록에 남아 있다.

첨성대(국보 제31호)
첨성대(국보 제31호)

대나마 덕복은 당(唐)에서 천문역산학을 배우고 돌아왔고(674), 승려 도증은 천문도를 얻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692), 물시계를 만든 기록도 있다(718). 또 이를 관장하는 관서로 누각전을 두고 이곳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배치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749). 누각전의 명칭은 물시계 담당 관서로 되어 있지만 당시의 천문역산학을 담당한 본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백제에 어떤 천문학이 발달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자(日者) 일관(日官)이 있었고,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그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에 백제의 왕인과 아직기가 일본에 학문을 전한 이래 여러 차례 백제와 고구려에서 천문학·역산학·역학·의학·약학 및 그밖의 여러 가지 기술이 전해진 것이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남아 있다. 특히 602년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은 일본에 역(曆)을 전하고 역법을 가르쳤는데, 이는 백제가 6세기까지는 천문역법에 대한 수준이 상당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한국과학사

고려시대의 과학을 대표하는 분야로는 단연 지리학을 들 수 있다. 고려의 지리사상은 신라말의 승려 도선(道詵 : 827~898)에서 비롯하는데, 그것은 도참사상과 연결되어 상당부분 지금의 미신에 속하는 전개를 보였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이 만드는 무늬를 읽어 그 뜻을 파악하려던 당시의 천문학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지리학은 사람이 살고 또는 묻혀 있는 땅의 모양을 읽어 그 인간에 대한 뜻을 읽으려던 점에서 당대의 대표적인 과학이었다.

천문역산학은 고려초부터 상당히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11세기초부터 천문관측 기록이 갑자기 많아지고, 일식을 예보했으나 적중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대체로 11세기초에 고려는 독자적으로 역(曆) 계산을 하고 있었고, 천문학자 등의 과학자·기술자가 과거제도의 한 부분으로 제도화하고 이와 함께 정부의 전문 관서가 정비되어 그들 고유의 활동영역도 확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문학자나 지리학자의 경우 그 관서는 관상감 또는 서운관(書雲觀)으로 정착하고, 의사의 경우는 태의감(太醫監)·대비원(大悲院)·혜민국(惠民局) 등으로 정착했다. 역산학은 고려 후기 원(元)으로부터 수시력(授時曆)을 배워오는 과정을 통해 한 단계 높은 발전을 이룩한 것으로 보이고, 같은 시기에 고려 의약학은 수많은 '향약'에 관한 책들을 출간해내면서 새로운 민족의학의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향약 연구의 활성화는 이 땅의 식물학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열매가 뚜렷하게 남게 된 것은 조선초 세종 때의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자기로 대표되는 도자기 기술과 금속활자의 발명을 바탕으로 한 인쇄기술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술의 바탕에는 그에 상당하는 과학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도자기 기술의 근거가 되는 열(熱)의 문제나 풀무 등에 대한 과학지식의 정도에 대해서는 확실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금속활자나 이미 삼국시대부터 크게 발달했던 범종의 기술 뒤에 감추어진 금속에 대한 과학내용 역시 그 상세한 것을 알 방법이 없다. 겉으로 들어나지는 않지만, 이들 전통기술의 밑바닥에는 상당한 수준의 '잠재성' 과학이 깔려 있었음을 지적해둔다.

조선시대의 한국과학사

전기

세종 때 천문역산학의 발달은 조선 전기의 과학 발달상을 대변한다. 앞에서의 설명처럼 삼국시대의 과학을 대표하는 분야가 첨성대로 상징되는 천문학이었다면, 조선 초기의 천문학은 천문학 자체보다 역산학의 발달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특히 15세기 전반 동안 궁정에서는 세종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많은 천문역산 연구와 함께 수많은 기구들이 제작되고 밤마다 하늘을 관측했다.

이 시기의 천문기상학 연구는 간의를 비롯한 천문기구의 제작과 사용, 측우기와 수표 등, 그리고 1442년에 완성된 칠정산(七政算) 등으로 대표된다. 세종 때의 과학기술 발달상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농사직설 農事直說〉·〈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팔도지리지 八道地理志〉·〈총통등록 銃筒謄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기술에 관한 책이지만, 농업기술과 의약 지식, 박물학, 생물학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화기제조에 관한 기술은 여러 화학 분야의 지식을 전제한 것이며, 세종 때 발달한 인쇄기술 또한 화학 지식과 함께 물리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발달된 과학 분야 가운데 의학의 경우는 뒷날 허준에 의해 〈동의보감 東醫寶鑑〉으로 정리되었다.

후기

1601년 중국 베이징에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정착해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의 새로운 과학 지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그 영향은 바로 조선에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해마다 1번 이상 베이징에 파견된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 지식이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양 과학의 영향은 실학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이익은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서양 천문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서양 과학의 새로운 지식을 인정했으며, 홍대용이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것도 사실은 서양 과학지식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스스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서학). 18세기말부터는 박제가와 정약용 등이 중국에 와 있는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양반 지배층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에 불과했다.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일본과 중국에 비해 조선은 이미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국제 경쟁에서 뒤진 채 최한기 같은 극소수의 학자들은 중국에서 나온 과학기술서를 국내에 번안해 들여오고 있을 따름이었다. 중국에서의 아편전쟁과 그후의 참담한 실상, 그리고 미국에 의해 개국당한 일본의 경우는 조선의 지배층에게도 상당한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1860년대의 실권자 흥선대원군은 서양기술을 배워 서양을 물리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제대로 근대 과학기술의 습득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개화기 이후 한국과학사

결국 1876년 개국과 함께 겨우 서양 과학을 배우려는 의식이 싹텄지만 국내적 혼란과 조선을 에워싼 국제 갈등의 틈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제대로 과학을 배울 기회를 만들지 못했고, 지배층은 과학을 뿌리내리게 할 제도를 만들 여유를 얻지 못했다. 1883년 창간된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주로 서양 과학지식을 보도했고, 1890년대의 독립협회와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이 모두 과학의 중요성을 구두선으로 외우고 있었지만, 막상 과학을 제대로 교육하고 보급할 기회는 전혀 얻지 못한 채 조선 왕조는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되었다.

개화기 이후 일부 지식층의 과제는 조선에도 과학을 심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일제강점기에서도 계속되어 1930년대에는 김용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으로 과학대중화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의 문필가·언론인·법조인·교사 등이 참가해 벌인 이 운동은 4월 19일을 '과학 데이'로 정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고 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을 내는 등, 그것은 과학기술 진흥을 통한 민족역량 향상운동이었다. 1933년 이래 이 민족운동은 일제에 의해 곧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청년 과학자 석주명(石宙明 : 1908~50)은 조선의 나비를 채집하고 분류하여 세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근대적 생물학의 시작을 보였고, 일본에서 태어난 우장춘(禹長春 : 1898~1958)은 농학을 연구해 해방 뒤에 농학개척에 한몫을 담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근대과학사는 실제로 8·15해방 이후에 시작된다. 1945년까지 한국인으로서 과학자로 지칭할 만한 사람은 10명 미만이었다. 게다가 1950년 6·25전쟁의 시작은 한국 근대과학의 시작을 1953년의 휴전 이후로 지연시켰다고 할 만하다. 결국 한국 근대과학의 시작은 1959년 원자력원이 실제적인 과학기술 행정 관서로 출발하고, 그에 전후해서 약 200명이나 되는 전례 없이 많은 국비 과학분야 유학생이 파견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66년 문을 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그후의 여러 과학기술 연구교육기관들은 당시 유학생들이 귀국, 활약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한국과학사학사

한국인이 한국의 과학전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과학이라는 인간활동이 어느 정도 독자적 분야로 인정되고 또 그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한 개화기 이후에서야 부분적이나마 한국과학사에 대해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880년대에 집필되어 1895년에 출판된 유길준의 〈서유견문 西遊見聞〉에는 조선의 과학기술이 낳은 성과로 고려자기·거북선·금속활자를 들고 있다. 그는 만약 후손들이 이런 전통을 연구·발전시켰더라면 지금 세계의 영광이 조선에 돌려졌을 것이지만, 후손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후 애국계몽의 시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한국과학사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2~3갈래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서양 선교사 등 서양 아마추어들에 의해 여러 부분의 한국 과학유물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경우였다. 부츠의 화포, 언더우드의 선박, 루퍼스의 천문학연구 등은 서울의 왕립학회 한국지부를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둘째,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호기심이나 한국의 행정 관여 속에 취미삼아 한국과학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였다. 인천측후소에 근무하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한국 역사에 많이 남아 있는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을 주목하고, 첨성대와 측우기에 대해 간단한 논문을 쓴 경우가 이에 속한다.

셋째, 이 시대 한국인들의 활동을 들 수 있다. 학문적 접근에 미숙했던 한국인 관심자들이 제대로 구성된 논문으로 한국과학사를 다루는 일은 적었지만, 때로는 아주 강력하게 한국의 과학전통에 애착심을 보였고, 또 이를 드러냈다. 최남선이나 그밖의 조선 문화를 자랑하려던 당시의 한국인들은 대개 비슷한 경우였다. 단편적이던 한국과학사에 대한 이런 관심의 표현은 1944년 홍이섭의 〈조선과학사 朝鮮科學史〉로 정리되기에 이른다.

원래 일본어로 씌어졌던 이 책은 해방과 함께 1946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정음사에서 간행되었다. 홍이섭은 백남운(白南雲)의 〈조선사회경제사 朝鮮社會經濟史〉를 인용하면서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라 설명하고 고려 이후를 봉건사회라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사회경제적 입장이 그의 과학기술사 서술에 그리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공헌은 주로 사료의 시대별 발굴과 정리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 나온 대표적 한국과학사의 저작으로는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韓國科學技術史〉(1966)와 이를 보충해서 출판한 같은 이름의 책(1975)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그후 일본어 번역판이 나왔고, 1974년에는 미국에서 영어판이 나오기도 해 한국과학사의 국제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데 홍이섭과는 대조적으로 전상운은 시대구분 없이 한국의 과학기술 전통을 몇 가지 영역으로 구분해 기술하고 있다. 역사적 개관보다는 과학기술의 유물 등을 소개하는 데 강점이 있다. 그 대신 전상운은 문고판으로 〈한국의 과학사〉(1977)를 출판해 그의 저술을 시대별로 요약, 재구성해냈다. 1982년 출간된 박성래의 〈한국과학사 韓國科學史〉는 첨성대, 세종대의 과학, 실학 속의 과학 등 한국과학사의 중요한 주제 10여 가지를 다루고 있다.

1982년 출간된 전병기 편저의 〈한국과학사〉도 홍이섭·전상운의 저서와 〈한국문화사대계 Ⅲ : 과학기술사편〉(1968)을 엮어낸 것이다. 이 책에는 농업기술·어업기술·생물학·체신·천문기상·지리·의학·조선·인쇄·수학 등이 들어 있어 한국과학사의 분야별 서술을 함께 모은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1977년 출판된 〈한국현대문화사대계 Ⅲ : 과학기술사편〉에는 과학교육·수학·물리학 등 모두 21개 분야에 결친 현대 과학기술사가 기술되어 있는데 주로 최근의 각 분야 전개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그밖의 분야별 업적으로는 의학의 김두종과 삼목영, 조선의 김재근, 수학의 김용운, 천문학의 이은성과 유경로, 도량형의 박흥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과학사 연구는 아직도 아마추어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의 경우 과학기술을 대단히 중시해서 역사연구소의 〈조선문화사〉(1977)는 모든 장을 과학기술에 대한 서술로 시작해 미술·문학·음악·무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처럼 과학기술을 중시하면서도 실제로 과학기술사 연구에서 뚜렷한 학문적 성과를 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