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우장춘

다른 표기 언어 禹長春
요약 테이블
출생 1898, 일본 도쿄[東京]
사망 1959. 8. 10
국적 한국
본관 단양(丹陽)

요약 일본에서 육종학 연구를 시작하여 해방 후 채소와 볍씨의 품종개량에 힘썼던 식물학자 및 육종학자. 1916년 도쿄제국대 부설 농학실과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육종학 연구를 시작했다.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키이종묘회사 연구농장장으로 초빙되어 1945년 사임할 때까지 연구는 물론 <원예와 육종>을 발행하는 등 육종의 과학화를 위해 노력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으로 취임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씨없는 수박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졌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주요 활동과 업적
  4. 영향과 평가
우장춘(禹長春)
우장춘(禹長春)

개요

농생물학자.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로, 평생 아버지의 매국을 속죄하는 마음을 품고 조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일본 도쿄제국대 부설 농학실과를 나와, 종간의 인공적인 교잡으로 새로운 종의 발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내용의 <종의 합성> 이론을 제창,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식량 사정 개선을 위하여 배추와 감자의 종자를 개량하고, 기후에 맞는 작물을 도입하여 재배를 권장하는 등 농업 발전에 힘썼다.

초기 생애

별기군 훈련대 제2대 대장을 지내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한 우범선(禹範善)과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ナカ)의 맏아들로 1898년 태어났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의 가담자였던 아버지가 1903년 암살을 당하면서 어렸을 때에는 부모를 떠나 살기도 했다.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에서 학교를 다녔고, 박영효의 도움으로 1916년 도쿄제국대(東京帝國大) 부설 농학실과에 진학했다. 1919년 졸업과 함께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육종학(育種學)연구를 시작했다. 1922년부터 〈유전학 잡지〉에 〈종자에 의해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관하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였다. 1924년 가정교사를 하면서 알게 된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했으며, 1927년에는 그를 후원하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성은 우씨 성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쓴 논문에는 이름의 영어 표기가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되어 있다.

주요 활동과 업적

1930년 나팔꽃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제출용 논문이 시험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4년 여의 노력 끝에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다시 작성·제출하여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농학박사가 된 이 학위논문은 세포유전학연구에서 게놈을 분석하고 기존의 식물을 실제로 합성시킨 최초의 사례로서 〈일본 식물학 잡지〉에 발표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기사가 되지 못하고 계속 기수(技手)에 머무르게 되자 연구소를 퇴사했다. 1937년 다키이종묘회사(瀧井種苗會社)연구농장장으로 초빙되어 자리를 옮겨 1945년 사임할 때까지 의욕적인 연구는 물론 〈원예와 육종〉을 발행하는 등 육종의 과학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8·15해방 후 식민통치로 피폐해진 농촌을 구하고자 1947년부터 벌어진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운동에 답하여 귀국을 결심하게 되어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1953년에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칭)의 초대소장에 취임했다. 귀국 후 무·배추 등 채소와 볍씨 품종개량에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육종학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일본의 기하라(木原) 박사가 개발한 씨없는 수박을 재배하고 후진양성에도 힘써 김종·진정기·김영실, 그리고 원우회의 제자들을 길러내 한국 농업근대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 원장, 1954년 학술원 추천회원,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 책임자가 되었다. 이듬해 8월 10일 위·십이지장 궤양으로 죽었다.

영향과 평가

우장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그의 박사 논문의 주제였던 '종의 합성' 이론이다. 그는 배추속 식물인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하여 유채를 유전적으로 재배하고, 그 과정을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종의 합성을 통해 종간의 잡종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이론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현대 유전학 교재에도 인용되는 등 전 세계적인 명성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가 한국에 소개한 씨없는 수박은 그의 이론에 따라 일본의 학자가 개발한 것이었으며, 그는 그의 교잡 방법을 통해 이를 실현하여 유전학과 육종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한국의 열악했던 식량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한국 환경에 맞는 배추를 개발했고, 제주도의 기후와 환경에 맞는 감귤과 유채를 재배하도록 권장했다. 강원도의 감자 종자를 개량하여 바이러스 감염에 강하도록 했다.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우장춘 박사의 기념관이 있으며, 그 앞의 도로명은 우장춘로로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