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다른 표기 언어 Johann Heinrich Pestaloz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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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46. 1. 12, 취리히
사망 1827. 2. 17, 스위스 브루게
국적 스위스

요약 스위스의 교육학자. 빈민교육을 주창했고, 학생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교수법을 강조했다. 페스탈로치의 방법론은 널리 인정받았으며, 대부분의 교육원리는 현대 초등교육에 흡수되었다.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빈민교육을 주창했고, 학생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교수법을 강조했다.

페스탈로치의 방법론은 널리 인정받았으며, 대부분의 교육원리는 현대 초등교육에 흡수되었다(교육철학). 페스탈로치의 교육 신조는 수업이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구체적인 예술 행위와 실제적인 정서적 반응의 경험 등을 결합해야 하며,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아동의 발달단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사상은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마리아 몬테소리, 존 듀이, 그리고 최근의 장 피아제와 언어경험접근의 주창자인 R. V. 알렌과 같은 조류이다(교육학). 페스탈로치의 교육과정은 〈에밀 Émile〉에 나타난 장 자크 루소의 구상을 본뜬 것이지만, 개인적인 암송학습보다는 집단학습을 강조했고, 그림그리기·글쓰기·노래하기·체육·모형만들기·수집·지도만들기·현장학습 등의 참여활동에 초점을 두었다.

당시로서는 급진적·혁신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그의 사상은 개인차를 인정하고 연령보다는 능력에 따라 학생들을 분류하며 과학적인 접근으로서 공식적인 교사양성을 권장할 것 등을 고려했다.

페스탈로치는 스위스의 정치적 상황과 루소의 교육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젊은시절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학공부를 포기했다. 1769년 아아레 강 근처에 버려진 땅(노이호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1774년 이 사업이 실패하자 빈민 아동들을 집으로 데려와 방적과 베짜기 등의 노작과 함께 동시에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다.

이 사업도 실패로 끝났지만 페스탈로치는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위스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키는 것이 좌절되자 그는 저작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은자의 황혼 Die Abendstunde eines Linsiedlers〉(1780)에서 교육이 '자연에 따라야' 한다는 것, 가정의 안정은 인간 행복의 기초라는 그의 기본이론의 윤곽을 제시했다. 소설 〈라인하르트와 게르트루트 Lienhard und Gertrud〉(1781~87)는 '민중'을 위해 쓴 것으로서, 독일 전원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이 책은 한 이상적인 여성이 부패한 관행들을 폭로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그녀의 올바른 가정생활을 통해 마을의 학교와 지역사회에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교육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그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나타나 있다. 페스탈로치는 노이호프 지역에서 30년 동안 고립되어 살면서, 빈민들의 생활 개선책을 제시하고 교육·정치·경제에 관한 많은 저작들을 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마을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기 때문에 점차 낙심하게 되었다.

만약 제의만 있었다고 하면 그는 유럽 어느 곳에서든지 교육자문역할을 수락했을 것이다. 주요 철학논문인 〈인류발전에 있어서의 자연의 운행에 대한 탐구 Meine Nachforschungen über den Gang der Natur in der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1797)는 자신의 개인적 실망감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지적 상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교육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사고력을 개발시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페스탈로치는 프랑스 혁명 이후 50세의 나이에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가 스위스에 세운 헬베티아 공화국에서 그를 초청하여 고등교육을 조직하도록 제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등교육부터 시작했으며, 그 일은 버림받은 전쟁 고아들을 모아서 혼자 힘으로 돌보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그들의 도덕성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이 일로 슈탄스(1799)에서 몇 개월 간 힘든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는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회고했다. 페스탈로치는 1800~04년 부르크도르프에서 한 교육기관을 맡아보았고, 1805~25년에는 뇌샤텔 근처 이베르동에서 기숙학교를 감독했다. 두 학교 모두 몇몇 가난한 학생들도 다녔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기관을 통해서 3영역으로 나누어지는 자신의 교육방법(지적·도덕적·신체적 영역, 특히 후자에는 직업교육과 시민교육이 포함됨)을 실험할 수 있었다.

이들 학교는 그의 '꿈'이었던 산업학교(빈민학교)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베르동의 학교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어 여러 외국 방문객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왔다. 프리드리히 프뢰벨, J. F. 헤르바르트, 카를 리터 같은 교육자들은 많은 감명을 받아 계속 머무르면서 페스탈로치의 교육방법을 연구했고 나중에는 자신들의 교수법에 도입했다.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보조자들이 수업을 맡아주었고 페스탈로치는 학교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계속 자신의 교육방법을 실천해나갔다.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녀의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1801)는 아이들의 선천적인 능력은 개발된다는 것, 아이들은 관찰로부터 시작해서 명확한 사상을 형성하게 하는 이해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면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등 지적 교육의 주요원리들을 담고 있다. 페스탈로치는 지적 교수법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었지만, 도덕교육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베르동에 감돌던 가족정신도 교사들 사이에서 점차 격렬해지는 논쟁 때문에 몇 년 후에는 사라져버렸다. 이 논쟁은 페스탈로치측에서 먼저 제기한 것이었다. 페스탈로치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빈민학교는 자신의 저작을 발간한 수입으로 설립되었으나 결국 2년밖에 지탱할 수 없었고, 이베르동 학교가 그 명성과 학생들을 동시에 잃게 되자 페스탈로치는 몹시 실망했다.

이 학교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헛되이 끝났다. 1825년 슬픔에 잠긴 채 소수의 학생만을 데리고 노이호프로 돌아갔으나 결국에는 자신의 교육사상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1826)는 "인생은 스스로 가르친다"는 격언으로 끝을 맺는다. 페스탈로치는 깊은 감화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동료들은 그를 아주 존경했다. 그의 교육 사상은 정치·경제·철학을 포함하고 있으며 '교육방법론'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