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Theodosius I
요약 테이블
출생 347. 1. 11, 갈라이키아 카우카(코카)
사망 395. 1. 17, 메디올라눔(밀라노)
국적 로마

요약 로마의 황제(379~395 재위).
별칭은 테오도시우스 대왕. 정식 이름은 Flavius Theodosius.

목차

접기
  1. 개요
  2. 출신배경과 청소년기
  3. 황제 초기
  4. 중기
  5. 이교도 찬탈자들에 대한 승리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개요

이교와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맹렬하게 탄압하고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결정한 신조를 정통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규범으로 삼았으며, 그 신조를 분명하게 규정하기 위한 제2차 공의회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했다.

출신배경과 청소년기

스페인 서북부의 갈라이키아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중에 장군이 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부모들은 물론 조부모 때부터 그리스도교 집안이었던 것 같다. 스페인에서 성장했으며, 폭넓은 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지적으로 개방되어 있었고 역사 연구에 특별한 흥미를 느꼈다.

아버지의 참모로 복무하면서 368~369년 브리타니아(브리튼)에서 픽트족과 스코틀랜드인을 상대로 벌인 전투와 370년 갈리아에서 알레만니족과 벌인 전투, 372~373년 발칸 지방에서 사르마티아족을 상대로 벌인 전투 등에 참가했다.

도나우 강 하류에 면한 로마의 속주 모이시아에서 군 지휘관을 맡아 374년 사르마티아족을 무찔렀다. 아버지가 궁정 내의 정적들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하자 스페인의 영지로 퇴각했다. 376년말 스페인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와 결혼했다. 장차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되는 맏아들이 377년에, 딸인 풀케리아가 378년에 태어났다.

발렌스 황제가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플 부근에서 동고트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에게 대참패를 당하고 죽은 직후 뜻하지 않게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테오도시우스를 궁정에 불러들였다.

테오도시우스가 사르마티아족에게서 승리를 거두어 또다시 군사적 능력을 입증해보이자, 그라티아누스는 379년 1월 19일 그를 공동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와 마케도니아 등의 속주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지역을 통치했다. 이 지역들은 앞서 몇 년 간 이민족의 침입을 특히 많이 받은 곳이었다.

황제 초기

379, 380년에 테오도시우스는 주로 테살로니카에 거주했다.

그는 먼저 규율이 상당히 해이해진 군대를 재편성하고 발칸 반도에서 로마의 지위를 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군사적 준비가 부족한 문제는 특정 계급에 한정된 신병 징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는 군복무에서 제외된 많은 튜튼족을 군대에 영입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이미 사병과 지휘관을 막론하고 군대 내부에 산재해 있던 379년경에 이런 과정을 장려하는 데는 테오도시우스로서도 대다수 선임자들이 한 것 이상으로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서부지역과 대조적으로 테오도시우스가 다스리는 동부 속주들에서는 로마인과 튜튼족이 모두 다 최고지휘관들 가운데 포함되었다. 379년경 그의 통치권 내에서 니케아 신조(삼위일체설)의 신봉자들과 다른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 사이에 첨예한 적대관계가 발생해 테오도시우스는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병을 앓고 난 뒤인 380년 가을에야 세례를 받았지만 대신관(pontifex maximus)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은 최초의 황제로 니케아 신조를 신봉했다.

종교적·정치적 동기가 함께 작용하여 그는 제국 내에서 신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다. 379년 동안 니케아 신조의 신봉자들이 세력을 넓힘에 따라 그의 입지도 유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380년 2월 28일 테오도시우스는 교회 당국자들에게 아무런 자문도 구하지 않고 모든 신민들이 하나의 신조를 갖도록 규정한 칙령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성부·성자·성신의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들만 가톨릭 그리스도교도로 간주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로마 가톨릭교). 이 칙령은 종교적 불관용의 원리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별개의 고립된 조치라고 볼 수 없는 이 칙령을 평가할 때는 테오도시우스가 신의 은총으로 황제가 되었다고 보는 그리스교도들의 관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신앙을 옹호할 사명이 있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선언을 강압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380년에 결정된 신조는 381년초에 다시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교회의 승인을 받았다. 381년 여름에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한 교회회의가 그 일을 담당했다. 사람들은 이 회의를 제2차 공의회로 꼽는다(교회와 국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가 지금까지 사용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로마 주교 바로 다음 서열로 승격된 일과 아울러 테오도시우스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앙 문제에 관해 황제는 동방의 주교들에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중기

383년 브리타니아 주둔군이 황제로 추대한 스페인의 막시무스가 서부 속주들(프라이펙투라 갈리아룸)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테오도시우스가 찬탈자와 공모해 383년 8월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에 연루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테오도시우스는 그라티아누스의 이복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주권을 인정해야 했지만 충분한 군사력과 튼튼한 변방이 없었기 때문에 막시무스를 가로막고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387년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발렌티니아누스가 테살로니카로 피신하자, 테오도시우스는 곧 대응조치를 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가 결정을 서둔 것은 발렌티니아누스의 어머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386년 이래 홀아비로 지내다가 387년말 그 어머니의 딸인 갈라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무렵 테오도시우스의 입지는 한층 강화되었다. 아르메니아 지역의 권력분할 문제를 놓고 페르시아인들과 벌인 오랜 협상의 결과 동부 변방의 장기적인 평화를 보장해주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테오도시우스는 이집트에 있던 일개 군단을 아프리카로 진격시키고 발렌티니아누스에게 함대를 대동해 이탈리아로 가도록 시킨 후 388년 봄에 주력부대를 이끌고 발칸 지방의 판노니아를 침략한 막시무스의 군대를 치러 떠났다. 7월에 적군은 패배했다. 막시무스는 8월말 항복해 찬탈자의 낙인이 찍혔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대체로 관대한 처벌을 받았다.

390년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그해 테오도시우스는 테살로니카에서 자신의 휘하 장군 한 사람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잔혹한 보복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이 너무 늦게 철회되는 바람에 그곳 주민들 사이에 끔찍한 대량학살극이 벌어졌다.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평의회에서 황제의 행동을 탄핵하고 그에게 공식적인 참회를 요구했다. 오래 망설인 끝에 테오도시우스는 그 명령에 따랐고 390년 크리스마스 때 다시 영성체를 받았다. 교회에 대해 전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한 반면에 테오도시우스는 국가의 물질적 이익이 교회나 성직자 때문에 크게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법령에 신경을 썼다.

아울러 379년부터 자신이 추구해온 종교정책을 이교도들에게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391년 2월 그는 희생제사와 신전참배를 금지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본적으로 이교도들을 관대하게 대했으며 옛 종교의 신봉자들에게 최고위 직책을 맡겼다(이교). 이전부터 동부의 수도를 제국의 중심으로 생각해왔던 테오도시우스는 2번째 부인 갈라와 아들 아르카디우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서둘러 자신의 거주지를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그는 391년 11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이교도 찬탈자들에 대한 승리

392년 11월 8일 그는 391년의 칙령을 더욱 엄격하게 시행하여 이교 신들의 숭배의식을 전면 금지했다.

393년 1월 그는 아들 호노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더이상 자신과 아들들 이외의 다른 어떤 황제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가 여전히 군사행동을 삼가고 있는 틈을 타서 393년 봄 그의 적들이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를 대장으로 이교의식을 지키려는 세력이 유게니우스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제 권력투쟁이 불가피해졌다. 이 싸움은 제국 내에서 이교가 다시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관용되느냐 않느냐를 결정짓는 한판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394년 5월에야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병을 개시했다. 388년에 그랬듯이 그는 막강한 대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향해 진격하다가 사바 강 방면으로 나아갔다. 그의 군대는 주로 이민족과 그 동맹세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지휘관 중 한 사람은 스틸리코로 384년 황제의 조카딸 세레나와 결혼한 반달족이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배후를 지켰다. 아르카디우스는 독자적으로 법률을 선포할 권리를 갖고 동부지역의 통치 책임을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이탈리아의 동쪽 변경에 있는 프리기두스 강에서 최초로 적군과 마주쳤다(프리기두스 강 전투). 거의 전부가 동고트족으로 이루어진 테오도시우스의 선두부대는 394년 9월 5일 돌파를 시도하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황제는 다음날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원정에서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된 듯 테오도시우스는 병에 걸렸다. 그는 밀라노로 가서 정식 서부지역 황제로 공표할 목적으로 호노리우스를 불렀다. 테오도시우스의 건강이 회복되어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가 395년 1월에 죽은 것은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는 프리기두스 강의 승전 이후 대원수로 승진한 스틸리코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겼다. 병약한 아르카디우스를 좌지우지하던 신하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스틸리코와 협력하기를 꺼려했다.

테오도시우스의 사후 그의 유해는 정중하게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콘스탄티우스 2세가 건축한 능묘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