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슈트

코슈트

다른 표기 언어 Lajos Kossuth
요약 테이블
출생 1802. 9. 19, 헝가리 모노크
사망 1894. 3. 20, 이탈리아 토리노
국적 헝가리

요약 헝가리의 정치개혁가.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3. 정치 저널리즘
  4. 1848년 혁명
  5. 망명

개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헝가리인들의 투쟁을 고무하고 이끌었다.

1848~49년의 혁명중에 짧은 기간 권력을 잡았으나 러시아 군대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

초기

아버지는 슬로바키아인이며 어머니는 독일계 헝가리인이었다.

가문은 유서 깊은 귀족혈통을 지니고 있었으나 부유하지 못해 아버지는 지방 지주들의 변호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가족이 루터교도였으므로 젊은시절 그는 샤로슈포토크의 프로테스탄트교도 학교를 다녔다. 관리가 되려다가 실패하자 고향인 젬플렌에서 아버지의 한 고객인 에텔카 온드라시 백작부인의 대리인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이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1831년 콜레라가 널리 퍼졌을 때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일했으나 자신의 삶이 협소하고 가망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또한 평생 금전문제로 시달릴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1832년 고용주인 백작부인은 친척인 한 의회의원의 대리인으로서 그를 포조니(지금의 브라티슬라바) 대표로 의회에 진출하도록 주선해주었다.

정치 저널리즘

이 '장기의회'에서 헝가리의 새 세대 개혁가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 헝가리 체제에서 처음으로 절대주의와 반계몽주의 체제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이 들뜬 분위기 속에서 그는 진보적 급진주의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무조건 유럽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헝가리에 이를 실현하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에 따르면 헝가리에서 치료할 수 없는 악습이나 부정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자유란 무엇보다도 민족적 자유를 의미했고 헝가리가 자체의 법이 부여한 사실상의 국내적 자유를 누리기 전에는 어떤 사회적·경제적 진보도 불가능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권한으로는 의회 내의 논쟁에 참여할 수 없었으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전달할 방법을 찾아냈다. 당시 의회 의사록은 발표되지 않고 있었는데, 이를 기술한 문서들을 출판한다는 생각을 해냈던 것이다. 이 보고서들은 말 그대로 옮긴 기록은 아니었지만 정치 소책자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강렬한 것이었으며 열성적인 젊은이들의 도움으로 손으로 베껴져 헝가리 전역에 유포되었다.

훌륭하게 씌어진 이 보고서들은 널리, 그리고 열심히 읽혔고 1836년 의회 회기가 끝났을 때 페슈트 군의회는 이와 비슷한 의사록을 써달라고 그를 초청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의원의 면책특권으로 보호받는 상태가 아니었으며 1837년 5월 4일 체포당해, 18개월간 구류생활을 한 끝에 정부 전복 혐의로 3년간의 구금을 선고받았다. 1840년 사면을 받고 석방된 그는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

격주간 잡지 〈페슈티 히를로프 Pesti Hirlap〉의 경영자는 그를 편집자로 초빙했다.

그의 기사는 유창하고 재미있는 문체로 씌어져 수많은 애독자가 생겨났고 동시에 오스트리아 당국과 헝가리의 보수주의자들, 심지어는 헝가리의 온건 개혁주의자들에게까지 경종을 울렸다. 그는 다음 사업으로,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산업진흥가인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저작에 영감을 얻어 헝가리 산업을 장려하고 더 큰 경제적 독립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단체를 창립하기로 했다. 이 계획은 대실패였으나 계속해서 대중을 고무할 연단을 제공했다.

1848년 혁명

1847년 페슈트 군에서 차기 의회의원으로 선출된 코슈트는 그 의회에서 '민족적 야당'을 지도했다.

이 정파는 이미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계획에 의견을 같이했다. 개혁가들이 부차적인 영역에서는 적으나마 성과를 얻었지만 정치 통치권에 관한 중심 문제를 두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을 때 파리에서 새로운 혁명(1848. 2)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코슈트에게 기회를 주었다. 3월 3일 그는 필력만큼이나 마술적인 달변으로 매우 강렬한 연설을 하면서 헝가리와 합스부르크 제국 내 모든 민중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빈의 절대주의라는 과거의 유산을 일소할 것을 요구했다(헝가리 혁명). 그는 실제로 의회에 지시해 개혁가들의 계획을 구체화하고 왕에게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빈에서의 혁명 소식이 도착한 3월 14일에는 이 문서의 내용을 확대했고 이튿날 이 문서를 전달한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빈의 궁정이 겁에 질려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새 헝가리의 총리가 된 로요슈 보트야니 백작은 코슈트를 재무부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종국적인 재정통제는 방위문제와 아울러 바로 헝가리와 빈 간의 싸움을 불러일으킬 핵심문제였기 때문이다.

코슈트는 곧 빈의 재무부장관과 언쟁을 벌였고 한편으로는 더욱 철저한 헝가리 민족운동에 삶과 영혼을 다 바쳐, 빈과의 불화를 막으려 애쓰는 동료 장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각에서는 감히 그를 해임하지도 못했고 더욱이 그의 업무를 분담할 수도 없었다. 전국적인 그의 인기는 그들 최대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9월에 오스트리아의 후원을 받은 크로아티아군이 헝가리에 침입했고 보트야니가 사임하자 코슈트는 임시 권한을 가진 의회에 의해 국민방위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제 그는 헝가리의 실질적인 독재자였다.

1849년 4월 14일 의회가 '위증을 범한 합스부르크-로렌 왕가'를 폐위시킨다고 선언했던 일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퇴위 승인을 거부한 일도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의회는 그 다음에 코슈트를 헝가리의 '통치자'로 선출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도착한 뒤 전혀 가망 없는 상황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때 이 직위를 사임하고 괴르게이에게 넘겨준(8. 11) 뒤 자신은 투르크로 피신했다.

망명

서유럽 열강들은 투르크의 술탄에 대해 그를 송환하라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코슈트는 아나톨리아의 퀴타히아에 억류되어 2년을 보냈다.

미국 정부가 그를 초빙해 프리깃 함을 보냈다. 미국으로 가는 길에 영국에 들른 그는 수차례의 대중집회를 가져 유폐당한 기간에 성서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배운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는 전례 없이 열렬한 갈채를 받았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뜨거운 환대를 받았으나 어느 쪽에서도 헝가리의 명분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뒤 런던에 정착한 그는 조국에 남아 있는 추종자들과 편지를 나누면서 그들이 불타는 저항정신을 간직하게 하려고 애썼다.

가까운 사이가 된 이탈리아의 애국자 마치니의 설득으로 마치니의 혁명위원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1859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위기가 닥치자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그를 초빙,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 전쟁 발발에 때맞추어 헝가리에서 봉기를 조직하도록 요청했다. 코슈트는 일정한 보장과 조건을 내걸고 이에 동의했다.

군사적 준비는 프랑스와 피에몬테에서 진행되었고 코슈트는 자신의 웅변술로 영국이 프랑스에 적대적인 방향으로 개입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7월에 나폴레옹 3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써 무산되었으며, 헝가리인들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손에 맡겨졌다.

약속된 국제연대는 형성되지 않았고 이듬해 코슈트는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남아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다.

헝가리는 페렌츠 데아크의 지도로 오스트리아 황실과 화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코슈트는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타협, 즉 1867년 타협이 결정되기 전 날 밤에 이 조처와 그 문안을 작성한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카샨드라 서한'은 대타협을 반대하는 이들을 선동했으나 그것이 가결되고 유지되는 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말년에 그는 쓸쓸하고 빈곤한 삶을 살았으며 점점 쇠약해지는 가운데 슬프게도, 헝가리의 새로운 지도자가 자신이 한결같이 고집하던 신념을 거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1894년에 죽었다.

그의 유해는 헝가리로 돌아와 전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1841년 코슈트는 테레지아 메슬레니와 결혼했는데 아내는 1863년에 죽었다. 아들 페렌츠 코슈트는 잠시 헝가리 독립당 총재를 지냈다. 코슈트는 죽은 후 헝가리의 대중적 우상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독립을 향한 열망의 상징이었다.

그에 관한 신화는 해가 갈수록 자라났고 그가 싸워서 얻고자 했던 독립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1945년 이후에는 더욱 무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