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야니

보트야니

다른 표기 언어 Lajos, Gróf Batthyá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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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06. 2. 14, 오스트리아령 포조니(지금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사망 1849. 10. 6, 헝가리 페슈트(지금의 부다페스트)
국적 헝가리

요약 헝가리의 정치가.

1848년 혁명 때 헝가리 대의제 정부 초대(初代) 총리를 지냈고 헝가리 독립의 순교자였다. 1398년부터 내려온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부유하고 자유주의적인 지주의 아들로 군대에 들어갔으나 1827년 가족 사유지를 관리하고 자그레브대학교에서 법률학위를 받기 위해 제대했다.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진보적인 자유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경영을 접했으며 이 경험을 자신의 사업에 적용해 성과를 거두었다.

1830년 헝가리의 상원의원이 되었고 1845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한편 사업도 계속해 1843년에는 제당업 트러스트를 주도했다. 1848년 3월에는 헝가리인들의 의회개혁 요구를 오스트리아 황실에 제출한 위원회의 성원으로서 빈에 갔으며, 다음달에 오스트리아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헝가리의 페르디난드 5세)에게서 헝가리의 새로운 대의정부 총리로 임명받아 4월 7일 내각을 구성했다. 뛰어난 지도력을 갖추었고 중요한 사회 입법을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각은 오스트리아의 왕정 세력과 헝가리의 극단적 분리주의 세력 사이에 얽매어 있었다.

연이은 내란 속에서 보티야니는 두 세력을 중재하고자 애썼으나 결국 혁명가들의 편에 섰다. 10월 11일 전투중에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으며, 오스트리아 세력과 협상하려다가 1849년 1월 3일 오스트리아군에 사로잡혀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처형 전날 밤에 칼로 자살하려다 실패했다. 다음날 아침 심하게 다친 채 선동죄로 총살당했다. 헝가리 국민은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시했고 그의 죽음으로 유럽의 여론은 오스트리아에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