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보베르데

카보베르데

다른 표기 언어 Cabo Verde , (영)Cape Verde 동의어 카보베르데 공화국, Republica de Cabo Verde, Republic of Cape Verde
요약 테이블
위치 아프리카 대서양섬
인구 604,461명 (2024년 추계)
수도 프라이아
면적 4,033.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카보 베르데 공화국 (Republic of Cape Verde)
기후 고온건조성기후
민족 구성 물라토(71%), 아프리카인(28%), 유럽인
언어 포르투갈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종교 개신교, 로마가톨릭
화폐 에스쿠도 (CVE)
대륙 아프리카
국가번호 238
GDP USD 1,978,000,000
인구밀도 149명/㎢
전압 220~230V / 50Hz
도메인 .cv

요약 세네갈의 서해안에서 약 620km 떨어진 중부 대서양에 있는 섬나라. 수도는 프라이아이며 화폐는 에스쿠도이다. 공용어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혼합경제의 개발도상국으로 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14세까지의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목차

접기
  1. 자연환경
  2. 국민
  3. 경제
  4. 정치와 사회
  5. 문화예술
  6. 역사
  7. 카보베르데와 한국과의 관계
    1. 외교
    2. 경제·통상·주요 협정
    3. 문화교류·교민 현황
카보베르데 국기
카보베르데 국기

북위 14° 48′∼17° 12′, 서경 22° 40′∼25° 22′에 위치한 카보베르데는 10개의 섬과 5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윈드워드 제도와 리워드 제도로 대별된다. 수도는 상티아구 섬의 프라이아이다.

지도
카보 베르데

자연환경

산악성의 윈드워드 제도는 험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 침식으로 깊게 골이 팬 반면, 평지성의 리워드 제도는 대부분 평야와 저지로 이루어져 있다.

리워드 제도(Leeward Islands)
리워드 제도(Leeward Islands)

섬들은 화산활동으로 생겨났는데, 포고 섬에는 1951년에 분화한 활화산이 있으며, 이 나라 최고봉(2,829m)도 이 섬 안에 있다. 기복이 심한 데다가 강수량도 부족하여 지표면의 대부분이 고결암설토(lithosol)와 미성숙 토양으로 덮여 있다. 섬의 절벽은 대부분 바다로부터 수직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다. 산악성의 섬들에는 영구천이 전연 없으며, 유수는 우기에만 볼 수 있다.

포구산(Pico do Fogo)
포구산(Pico do Fogo)

연중 온화하고 매우 건조하다. 최한월인 2월의 평균기온은 22℃이며, 최난월인 9월의 평균기온은 27℃이다. 강우는 불규칙적이며, 주기적인 가뭄이 기근을 일으킨다. 프라이아에서는 평균강수량이 241㎜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때때로 태양을 가리는 짙은 모래안개를 형성한다.

우기에 산중에서 흐르는 샘물이 아래 골짜기들에서 관개용수로 이용된다. 마이우와 살에서는 내건성 식물이 자란다. 바람이 불어오는 지역에서 자라는 관목은 대부분 가시가 많고 맛이 쓰며 독이 있다. 또한 도마뱀붙이류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도마뱀이 서식한다. 전체 육지면적의 1/10 정도가 가경지이며, 그밖에 7%에 해당하는 목축지에서는 소와 양을 방목한다.

국민

2024년 추계인구는 60만 4,461명이며, 전체 인구의 65%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전체 인구 중 30%가 15세 이하의 유소년 인구이다. 20세가 넘는 주민은 해외 취업을 위해 주로 베네수엘라와 브라질로 떠난다. 인구가 가장 조밀한 지역은 상티아구·산타안탕·상비센테 섬들의 해안지역이다.

도시 인구의 절반이 프라이아에 거주한다. 시골 주민은 몇 안 되는 비옥한 골짜기나 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산다. 20세기중에 여러 차례의 한재로 말미암아 20만 명 이상이 죽고, 아프리카 제국들과 브라질, 미국으로 섬주민들이 대거 이주했다. 1940년대부터 계속되는 이민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카보베르데의 인구
카보베르데의 인구

1970∼80년에 연평균인구증가율은 1% 미만이었지만, 자연증가율은 1.8%가 넘었다. 출산율은 거의 2.8%나 되었고 사망률은 약 0.9%였다. 주민의 2/3 이상이 크리올인(흑백 혼혈인)이며, 나머지가 유럽인과 아프리카 흑인이다. 카보베르데의 식자층이 쓰는 포르투갈어 이외에 주민들은 포르투갈어의 방언인 크리울로어를 사용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공식적으로 로마 가톨릭교도이지만, 상티아구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개신교의 선교단이 대부분의 섬에 교회와 학교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정령을 숭배하는 풍습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경제

카보베르데는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혼합경제의 개발도상국이다. 경제 여건은 1968년에 극심한 한발의 주기가 시작된 이래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대규모의 국제식량원조로 국민이 아사를 모면하고 있다. 농업이 국민총생산(GNP)의 약 1/3을 차지하며 전체인구의 1/3 이상을 고용하고 있지만, 국민의 식량 수요 가운데 4/5 이상은 수입으로 충당해야 한다.

비가 정상적으로 내리는 기간에도 10개의 섬 가운데 산투안탕·브라바·포고·상티아구 등 4개의 섬에서만 본업인 가축사육과 더불어 농업활동이 이루어진다. 주식작물은 옥수수·콩·카사바·고구마 등이며, 바나나·사탕수수·커피·땅콩 같은 환금작물의 재배가 권장되지만 농업 발전은 매우 느리다. 정부는 한발 방지책으로 우물을 파고 수천 개의 댐과 제방을 건설하고 있다. 1980년대초에는 가뭄에 잘 견디는 나무를 200만 그루 이상 심었다. 살·마리우·보아비스타 등의 섬에서 소금이 약간 생산되며, 시멘트 제조에 쓰이는 화산암의 일종인 포졸라나가 소량 수출된다. 어업은 유망산업이며, 현대식 어선과 장비들이 서서히 취득되고 있다. 민델루에 냉장공장이 하나 있고, 프라이아와 살 섬에 몇 개의 참치 통조림 공장이 있다.

카보베르데의 수출
카보베르데의 수출

제조업과 건설업이 GNP의 1/4가량을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 건설업의 비중이 더 크다. 제조업은 주로 식품가공업과 섬유업이다. 정유 공장, 해군 조선소, 시멘트 공장의 건설 계획이 있다. 1980년대초에 섬들의 극심한 물 부족을 완화 또는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하는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서비스업과 운송업이 GNP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중부 대서양의 항공로와 해로의 결절점에 입지한 카보베르데의 전략적 가치는 항만과 공항의 시설 개선으로 더욱 증대되었으며, 섬들의 입지와 기후가 관광산업 발전에 천혜의 조건임이 밝혀져 1980년대초에 프라이아에 호텔 단지가 조성되었다. 카보베르데의 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것마저 더욱 악화될 조짐을 보인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이다. 상당액의 국제원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부족으로 정부의 개발정책을 수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며, 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의 송금이 사정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주지만 경제발전은 여전히 해외원조에 크게 의존한다.

정치와 사회

카보베르데는 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이 다스리는 1당체제의 공화국이다. 1980년에 채택된 헌법은 1980년대초까지 반포되지 않았지만, 현 공화정은 대체로 그 헌법에 준하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헌법은 입법권을 단원제 국회에 부여했으며, 국회에서 대통령과 총리를 뽑는다. 사법제도는 국가사법위원회를 정점으로 한다. 제한적인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국민의료 서비스가 실시되고 있다. 국민의 건강 상태는 열악하나 서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보건·위생 서비스의 불량과 만연된 영양실조가 전염병과 기생충병의 높은 발병률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특히 결핵·폐렴·기관지염·위장병과 소아병 환자가 많다. 평균수명은 약 50세이며, 유아사망은 출생아 1,000명당 약 100명의 비율로 나타난다.

호세 마리아 네베스(José Maria Neves)
호세 마리아 네베스(José Maria Neves)

교육은 7∼14세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무상·의무로 실시되며, 학령아동의 약 90%가 초등학교에 다닌다. 고등교육을 받으려는 학생들은 해외로 나가는데 특히 포르투갈로 많이 나간다.

문화예술

카보베르데의 풍부한 크리올 문화는 문학과 음악에의 뚜렷한 기여로 주목된다. 모르나(morna)로 알려진 우울한 음조의 작곡과 크리올 특유의 시가 특징적이다.

모르나(morna)
모르나(morna)

역사

1456∼60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이곳에 들렀을 때 카보베르데의 섬들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1460년에 포르투갈의 항해가 디에구 고메스와 안토니우 다 놀라가 마이우 섬과 상티아구 섬을 발견하여 이름을 붙였으며, 1462년에 최초의 포르투갈인 이민들이 상티아구에 상륙하여 리베이라그란데 시를 건설했다. 리베이라그란데는 노예무역의 발달과 함께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1541년에는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고 1585, 1592년에는 영국인의 공격을 받았다. 1712년 프랑스의 공격을 받은 후 이 도시는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버려졌다. 번영하던 섬들은 1876년 이후 노예무역의 쇠퇴로 침체되었으며, 재발하는 가뭄과 기근은 부패와 실정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19세기말에는 상황이 다소 호전되었고, 유럽·남아메리카·남아프리카의 대(大)무역로상에 위치한 입지조건으로 인해 민델루에 석탄보급 및 해저 케이블 기지가 개설되었다.

카보베르데 (Cabo Verde)
카보베르데 (Cabo Verde)

제1차 세계대전 후 해운업의 침체로 인해 경기가 나빠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무역이 신장되지 않았고, 경제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51년에 이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해외 영토로 바뀌었고, 1961년에는 섬 주민 전원이 포르투갈의 완전한 공민권을 취득했다.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기니-카보베르데 독립당(PAIGC)이 이끄는 강력한 독립운동이 여전히 활발히 전개되었다(아프리카 본토에 있는 기니비사우 역시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주의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완전 독립을 바라고 있었음). 카보베르데 제도는 1975년에 아리스티데 페레이라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1981년에 카보베르데는 PAIGC를 탈퇴하고 독자적인 아프리카 카보베르데 독립당(PAICV)을 결성했으며, 1981년에 국회에서 승인된 헌법은 기니비사우와의 결별을 공식화했다.

카보베르데와 한국과의 관계

카보베르데와 한국의 국기
카보베르데와 한국의 국기
외교

카보베르데는 한국과 1988년 10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한국은 주 세네갈 주재 대사가 카보베르데 대사를 겸임하고 있으며, 카보베르데는 주 중국 카보베르데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카보베르데는 1997년 4월에 레이테 국회부의장, 2012년 10월에 브리토 관광산업에너지장관이 방한했으며, 한국은 2012년 9월에  김봉현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이 방문했다. 한편 카보베르데는 북한과 1975년 8월에 수교했으며 북한은 주 기니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카보베르데의 대한국 수출액은 2023년 기준 1만 달러, 수입액은 146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메모리, 원자로 및 보일러, 플라스틱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원자로 및 보일러 등이다. 한국은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총 35만 3,600달러 상당의 자동차와 부품을 무상으로 원조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경제·기술협정(1992년 1월), 외교관·관용여권 사증(비자)면제협정(2015년 10월)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2023년 기준 카보베르데에는 7명의 재외동포가 있다.

참고자료

  • ・ 외교부
  • ・ 주 세네갈 대한민국 대사관
  • ・ 한국무역협회 통계
  • ・ 외교부 재외동포 현황(2023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