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

다른 표기 언어 카뮈 , Albert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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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3. 11. 7, 알제리 몽도비
사망 1960. 1. 4, 프랑스 상스 근처
국적 프랑스

요약 〈이방인〉, 〈페스트〉, 〈전락〉 등의 소설과 좌파적 현실 참여 활동으로 유명한 작가다. 1942년에 첫 번째 단편소설 <이방인>을 발표하고 1947년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페스트>를 썼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지 3년이 채 안 되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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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 생애
  2. 문학 활동
  3. 카뮈에 대한 평가

초기 생애

알자스 태생의 궁핍한 노동자인 아버지와 스페인계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카뮈가 태어나서 돌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벌어진 마른 전투(1914. 9)에서 전사했다. 과부가 된 어머니는 두 아들(카뮈와 형 뤼시앵)을 데리고 알제리의 노동 계급이 모여사는 빈민굴로 이사하여 외할머니와 불구자인 외삼촌과 함께 방이 2개뿐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정부로 일했다. 카뮈가 처음으로 발표한 수필집 〈표리 L'Envers et l'endroit〉(1937)는 어린시절의 어둡고 가난한 생활과 어머니와 외할머니 및 외삼촌을 묘사하고 있다.

2번째 수필집 〈결혼 Noces〉(1938)에는 알제리의 시골에 대한 서정적인 명상이 담겨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부(富)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2권의 수필집은 모두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약함과 물질 세계의 영속성을 대비하고 있다.

1918년에 카뮈는 공립국민학교에 들어가, 뛰어난 교사 루이 제르맹의 가르침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카뮈가 1923년에 알제 리세(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제르맹이었다. 34년 뒤에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을 제르맹에게 바쳤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스승에 대한 카뮈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어서 카뮈의 지성이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카뮈는 스포츠, 특히 축구와 수영 및 권투에도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에 결핵 증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카뮈는 운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공부도 중단했다.

그후 결핵은 여러 차례 재발하여 카뮈를 괴롭혔다. 아파트 생활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여 카뮈는 15년 동안 살았던 그곳을 떠나야 했다. 카뮈는 잠시 푸줏간 주인이며 열렬한 볼테르주의자인 친가 쪽 아저씨 집에 얹혀 살다가 자립하여 살기로 결심하고, 알제대학 철학과에 등록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알제대학 재학중에 카뮈는 평생 동안 스승으로 여기게 된 철학 교수 장 그르니에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르니에는 카뮈가 문학과 철학 사상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축구에 대한 열정을 나누었다. 카뮈는 플로티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 나타나 있는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관계를 다룬 논문으로 1936년에 고등교육수료증을 받았다. 그는 교수자격심사(이 심사를 통과했다면 그는 대학교수로서의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름)에 응하려했지만, 결핵이 재발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 알프스 지방에 있는 휴양지로 떠났고(첫번째 유럽 방문), 이탈리아 피렌체와 피사 및 제노바를 거쳐 결국 알제리로 돌아왔다.

문학 활동

1930년대에 카뮈는 관심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당시의 작가들, 특히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등의 작품을 비롯하여 프랑스 고전문학을 두루 섭렵했으며, 서서히 알제리의 젊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1934~35년에 그는 잠깐 알제리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그는 노동 계급의 관객들에게 훌륭한 연극을 보여줄 목적으로 '노동 극단'(Théâtre du Travail:나중에는 작업반 극단[Théâtre de l' Équipe]으로 이름을 바꿈)을 조직하여 손수 각본을 쓰고, 연출과 각색 및 연기까지 맡았다.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그의 문학작품 가운데 희곡은 다른 작품만큼 높은 평가를 얻지 못했지만 〈오해 Le Malentendu〉(1944 초연)와 〈칼리귈라 Caligula〉(1945 초연)는 부조리 연극의 이정표로 남아 있다. 그밖에 포크너의 〈한 수녀를 위한 진혼곡 Requiem for a Nun〉(1956)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Besy〉(1959)을 희곡으로 각색한 것도 연극 부문에서 기념비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2년 동안, 카뮈는 진보적 신문 〈알제 레퓌블리캥 Alger-Républicain〉에 참여하여 언론인 수업을 쌓았다.

그는 수석(논설) 위원, 편집부원, 정치부 기자 및 서평 담당자 등 다양한 일을 도맡아 해냈다. 그는 사르트르의 초기 작품 가운데 몇 편의 서평을 썼고, 카빌리아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을 분석한 일련의 중요한 논설을 썼다. 〈시론집 3 Actuelles Ⅲ〉(1958)에 요약된 형태로 전재된 이 논설들은 1954년의 알제리 전쟁으로 이어진 수많은 불공평에 대해 15년이나 앞서서 사람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카뮈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입장보다 인도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고, 프랑스 정부의 불공평한 식민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앞으로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맡게 될 역할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해 있던 마지막 몇 년과 해방 직후에 언론인으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누렸다.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나중에는 파리에서 일간지로 발간된 〈콩바 Combat〉의 편집장으로서, 카뮈는 정의와 진리 및 모든 정치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후 카뮈는 좌파와 우파의 구태의연한 편의주의에 차츰 환멸을 느끼고, 1947년에 〈콩바〉와 관계를 끊었다. 이무렵 카뮈는 이미 프랑스 문단을 이끄는 주요인물이 되어 있었다. 카뮈가 전쟁 전에 쓰기 시작하여 1942년에 발표한 첫번째 단편소설 〈이방인〉은 아랍인을 쏘아 죽였다는 범행 사실보다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려 들지 않고 사회의 요구에 따르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은 한 '아웃사이더'의 초상을 통하여 20세기의 인간 소외를 탐구한 뛰어난 작품이다.

같은 해에 영향력 있는 철학 평론인 〈시지프의 신화 Le Mythe de Sisyphe〉도 발표했는데, 여기서 카뮈는 당시의 허무주의와 '부조리' 의식을 상당한 공감을 가지고 분석했다. 그는 이미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그의 첫번째 장편소설 〈페스트〉(1947)는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투쟁을 매우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불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우애를 역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카뮈는 이제 초기의 주요개념인 부조리에서 또다른 주요개념인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반항'으로 옮아갔다. 그는 2번째로 발표한 장편 평론 〈반항적 인간 L'Homme révolté〉(1951)에서 이 반항이라는 개념과 정치적·역사적 혁명을 대비했다.

이 평론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물론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친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밖에 카뮈의 중요한 문학작품으로는 기법이 뛰어난 장편소설 〈전락〉(1956)과 단편집 〈유배와 왕국 L'Exil et le royaume〉(1957) 등이 있다. 〈전락〉은 그리스도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열중을 보여주며, 세속의 인도주의적 도덕성이 가질 수 있는 좀더 기분 좋은 형태들을 풍자적으로 재치있게 드러내준다. 1957년에 카뮈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겸손한 카뮈는 자신이 심사위원이었다면 분명 앙드레 말로에게 표를 던졌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후 3년이 채 안 되어서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카뮈에 대한 평가

알베르 카뮈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모랄리스트이자 정치이론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서는 전세계에서 그의 세대의 대변가이자 다음 세대의 스승으로 추앙되었다. 그의 글들은 주로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 악의 문제, 그리고 죽음이라는 임박한 파국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 의식과 환멸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카뮈는 많은 동시대인의 허무주의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진실과 중용 및 정의 같은 가치에 대해서도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후기 작품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독단적 측면을 모두 거부하는 자유주의적·인도주의의 모습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