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스캥 데 프레

조스캥 데 프레

다른 표기 언어 Josquin des Prez
요약 테이블
출생 1445경, 부르고뉴 에노 콩데쉬르레스코
사망 1521. 8. 27, 콩데쉬르레스코
국적 플랑드르

요약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
des Prez는 des Pr대체이미지s, Despr대체이미지s라고도 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스캥은 생캉탱 대성당의 성가대원으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459~72년 밀라노 성당의 가수로 있었다.

1474~79년경 밀라노의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공작에게 봉사했으며, 1486~94년경 교황령 부속 예배당에서 봉사했다. 그무렵부터 1499년 사이의 어느 때인가 페라라의 에르콜레 공 1세의 성가대 지휘자로 있으면서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왕실 예배당과 캉브레 성당과도 관계를 가졌다. 페라라에 있을 때 그는 에르콜레 공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미사곡 〈페라라의 에르콜레 공 Hercules Dux Ferrariae〉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그의 요청으로 모테트 〈미제레레 Miserere〉를 작곡했다. 1505년 에르콜레 공이 죽자 페라라를 떠난 듯하며 후에 콩데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제장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크게 모테트·미사곡·샹송의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20곡의 미사곡 가운데 17곡은 오타비아노 데이 페트루치에 의해 3권으로 나뉘어(1502, 1505, 1514)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다. 그의 모테트와 샹송은 〈오데카톤 Odhecaton〉(1501, 대중적인 샹송들을 모아놓은 선곡집) 이후 계속해서 페트루치의 여러 출판물과 다른 출판업자들의 선집에 포함되어 있다. 니콜라스 홈베르트, 베네딕투스 아펜젤러, 히에로니무스 빈더스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만든 애가는 지금도 남아 있다.

루터는 조스캥의 음악을 격찬하면서 그를 가리켜 다른 작곡가들은 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던 반면 그는 음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던 '음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가서는 표준적인 실제가 된 전통적인 형식과 혁신적인 것을 적절히 혼합한 이러한 기법을 통해 그는 르네상스 음악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음악이 갖는 표현성은 보다 추상적인 중세음악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그는 특히 모테트에서 재능을 마음껏 펼쳐 애절한 화성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강조를 위해 긴장감을 주는가 하면 가사가 죽음을 이야기할 때면 목소리를 가장 낮은 음역으로까지 점차 끌어내렸다.

그는 전통적인 정선율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후 16세기를 특징짓게 되는 모테트 양식을 발전시켰다. 미사곡뿐만 아니라 그의 모테트도 근대적 의미의 조성에 접근하고 있다. 후기 작품에서 그는 점차 정선율 기법 대신에 패러디와 패러프레이즈 기법을 취했으며, 아울러 카논과 선율 모방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조스캥은 샹송에 있어서도 15세기 중엽의 새로운 양식을 개척했는데, 이러한 세속노래에도 숙련된 카논 기법과 대위법 기법을 적용시켰다.

롱도발라드 등의 고정된 형식을 버리고 그 자신이 고안한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사용했다. 몇몇 샹송은 다성음악적이라기보다는 화음적으로 작곡되기도 했지만 그밖의 다른 많은 작품들은 5성부 또는 6성부의 숙련된 대위법으로 작곡되었으며 명확한 리듬과 간결성, 명료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