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조선일보

다른 표기 언어 朝鮮日報

요약 1920년 창간된 일간신문. 대정실업친목회의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창간되었다. 1932년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하여 '정의옹호·문화건설·산업발전·불편부당'이라는 사시를 제정하고 조·석간제를 실시하면서 경영면에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일제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고 조선민중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이 더욱 강화되면서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와 함께 제6913호로 폐간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속간된 후 1980년대에 국내 굴지의 언론기관으로 성장했다. 계열사로 디지털조선일보·조선방송·스포즈조선·조선뉴스프레스·조선에듀케이션·조선경제아이·헬스조선·조선일보뮤지엄 등이 있고, 계열사에서 발행하는 자매지로 <스포츠조선>·<월간조선>·<주간조선>·<여성조선>·<산>·<웰빙라이프>·<소년조선일보> 등이 있다.

목차

접기
  1. 개관
  2. 일제강점기
  3. 8·15해방 이후
조선일보(朝鮮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개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월 16일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시사신문〉 등과 함께 민간지로서 발행을 허가한 〈조선일보〉는 같은 해 3월 5일 친일상공인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의 예종석(芮宗錫)을 발행인으로, 조진태(趙鎭泰)를 초대 사장으로 하여 제일 먼저 창간했다.

일제강점기

발행 초기인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은 경영난과 판권소동 등으로 발행인이나 경영진이 자주 바뀌었고 반일 논조의 기사로 인해 정간과 압수처분, 발매금지 및 기사삭제 등의 곤욕을 치렀다.

1920년 8월 27일 미국 국회의원들의 방문을 환영하던 민중들에게 일본 경찰이 탄압을 가하자 이를 비판한 '자연의 화(化)'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었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항거한 강우규(姜宇奎)에 대한 사형선고 기사를 게재하자 총독부로부터 처음으로 정간 7일 처분을 받았다. 그뒤 중국 산둥[山東] 지방으로 일본군이 출병한 사실을 비난한 1928년 5월 9일자 사설 '제남사변(濟南事變)의 벽상관(壁上觀)'이 문제가 되어 정간 133일 처분을 받기까지 1920년대에 4차례에 걸쳐 총 240일간 정간되었다.

조진태에 이어 유문환·남궁훈·이상재·신석우·안재홍·유진태·조만식 등이 사장직을 잇는 동안 경영은 계속 불안했다. 그런 가운데 유진태가 사장으로 있던 1932년 6월 판권을 담보로 잡고 〈조선일보〉에 돈을 빌려준 임경래가 판권 기재사항 변경신청을 하여 편집 겸 발행인 및 부사장에 취임해 한때 임경래의 〈조선일보〉와 함께 2개의 신문이 발행되기도 했다.

경영난에 계속 허덕이던 상황에서 제8대 사장 조만식의 권유로 1932년 6월 영업국장으로 입사한 방응모(方應謨)가 경영권을 인수하여 '정의옹호·문화건설·산업발전·불편부당'이라는 사시(社是)를 제정하고 혁신호 100만 부를 전국에 무료로 배포하고, 조·석간제를 실시했다.

곧이어 자본금 30만 원(곧 500만 원으로 증자)의 주식회사로 발족한 후 태평로에 신사옥을 건설했다. 이후 사세를 확장해 가면서 경영면에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등 일제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고 한반도의 병참기지화 및 조선민중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이 더욱 강화되면서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와 함께 제6913호로 폐간되었다.

1924년 7월 22일 최초의 지방판(경북판)을 발행했고, 같은 해 11월 23일 조간 2면, 석간 4면의 조·석간제를 처음으로 실시하는 등 제작·보급면에서 혁신을 보이기도 했다.

신문 발간 이외의 사업으로 1922년 12월 8일 미국 직업야구단을 초청하여 전조선청년단과 친선경기를 하도록 후원했고, 1925년 5월 2일 제1회 전조선 중등급 및 전문대학 대항 경성­인천 간 릴레이 경주를 주최하는 등 1989년까지 모두 530여 회의 후원사업을 벌이고 모두 920여 회에 달하는 사업을 주최해왔다. 특히 1929년 3월부터 색의단발운동(色衣斷髮運動)·상식보급운동·건강정진운동·소비절약운동·허례폐지운동 등을 골자로 하는 '생활개신운동'(生活改新運動)을 벌였고 같은 해 7월 14일부터 방학 중 귀향하는 남녀 학생들을 동원하여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는 등 문화계몽운동을 펴왔다.

또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 아래 해마다 실시한 한글보급운동은 〈동아일보〉의 브 나로드 운동과 함께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을 선도한 대표적인 사회운동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1928년부터는 최초로 신춘문예제도를 실시했다.

1927년 2월 최초의 자매지인 월간 〈신조선 新朝鮮〉을 창간했으나 경영난으로 제대로 속간하지 못하고 폐간했다.

그러나 방응모가 경영을 맡고 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출판부를 창설하여 〈조선명인전 朝鮮名人傳〉 등의 일반서적 간행은 물론, 월간으로 〈조광〉(1935. 10 창간)·〈여성〉(1936. 3 창간)·〈소년〉(1937. 4 창간) 등의 자매지를 본격적으로 창간·발행했다. 그러나 〈조광〉을 제외한 나머지 자매지들은 1940년 〈조선일보〉와 함께 모두 폐간되었다.

8·15해방 이후

폐간된 지 5년 3개월 만인 1945년 11월 23일 타블로이드판 조간 2면으로 속간되었으며, 이후 주로 친미반공노선을 견지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6월 29일부터 10월 22일까지 전시 휴간했으며, 10월 23일 서울 수복 이후 속간호를 발행하다가 1·4후퇴 후 1951년 2월 1일부터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판을 발행했다. 전시 휴간 중이던 1950년 7월 7일 방응모가 북으로 끌려가던 중 폭격을 받아 사망하자, 장기영(張基榮)이 제10대 사장으로 경영을 맡았다. 그후로 방일영·방우영·방상만이 사장직을 잇고 있다.

〈조선일보〉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 굴지의 언론기관으로 성장했다.

200만 부 정도를 발행하는 본지 외에도 〈소년조선일보〉(1965. 2. 21 복간)·〈주간조선〉(1968. 10. 20 창간)·〈월간조선〉(1980. 4. 1 창간)·〈월간 산〉(1980. 6. 1 창간)·〈월간 낚시〉(1984. 5. 1 창간)·〈스포츠조선〉(1990. 3. 21 창간) 등의 자매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언론사업 외에 호텔 및 인쇄사업과 미술관 운영, 그리고 각종 행사유치 등을 통해 꾸준히 사세를 확장해왔다. 또한 기존의 본사 사옥 외에 1988년 3월 5일 정동 별관, 1989년 10월 부산사옥, 1994년 12월 평촌사옥, 1996년 11월 성남사옥을 준공했다.

1991년 9월 14일 대구·서울 간 동시인쇄를 시작으로 1992년 1월 15일부터 제주·서울 간 동시인쇄를 실시했고, 1992년 3월 광주공장을 준공했다. 이에 앞서 1983년 6월 8일 미주(美洲) 지사와 1984년 8월 4일 샌프란시스코 지사를 개설한 데 이어 8월 15일 샌프란시스코판(1986. 2. 28 폐간)을, 그리고 1990년 8월 6일에는 시카고판을 창간했다. 1995년 10월 디지털 조선일보를 설립해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제공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사세확장 과정에서 대내외적인 마찰도 없지 않았다.

1964년 8월 공화당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동아일보〉·〈경향신문〉·〈대구매일신문〉 등과 함께 반대해 구독금지, 신문용지가격의 차별대우, 광고압력, 은행융자 및 취재원 제한 등 보복조치를 당했지만 발행인을 포함한 간부진과 편집국원들이 모두 이 법을 반대해 철회시켰다. 1971년 4월 '신문의 날'을 기점으로 한국신문협회·한국신문편집인협회(지금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한국통신협회·한국기자협회 등 언론단체들과 언론사들이 당시 정부기관의 공공연한 언론탄압에 대한 언론자유수호의 결의를 다질 때 조선일보사에서도 편집국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자유언론선언문'을 채택했다.

한편 1975년 3월 해임기자 복직문제를 둘러싼 내부 마찰로 편집국 기자들이 제작거부 농성에 돌입함에 따라 부·차장급만으로 신문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이른바 '3·6사태'로 기자 67명이 대거 신문사를 떠나기도 했다.

또한 1980년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이후 발족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8월 언론인을 대량 해직시킬 때 조선일보사도 기자 14명을 전격 해임했다. 1987년 '6·29선언'에 따른 언론자율화 조치 이후 조선일보사에도 다른 중앙일간지보다 다소 늦은 1988년 10월 25일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989년 1월 14일 경영진과 단체협약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