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치

문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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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 지배정책. 문화통치라고도 칭한다. 3.1운동 이후 조선을 더이상 무력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은 노선을 바꾸어 통치를 시작했다.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명목 하에 조선인 관리 고용, 언론과 출판의 자유 보장, 사회 전반의 행정 개선 등이 일본이 내건 방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회유 정책의 한 부분으로 신문은 모든 검열을 거쳐야지만 발행될 수 있었으며, 치안에 관한 법이 가장 우선으로 제정되어 있어 감시는 오히려 더 심해졌다. 이후 일본은 1930년대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면서 통치 방식을 조선의 얼과 문화를 모두 없애는 쪽으로 다시 한 번 전환하게 된다.

일본은 3·1운동에서 조선인의 항일의지를 직접 목격하고 이전과 같은 무단통치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3·1운동 이후 새로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새로운 조선지배정책으로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나섰다.

사이토 총독은 ① 관제의 개정으로 총독무관제 철폐(문관 출신 총독의 임명 가능) 및 보도경찰제도 실시, ② 조선인 관리 임용과 대우 개선 도모, ③ 언론·집회·출판 등을 고려하여 민의의 창달 도모, ④ 교육·산업·교통·경찰·위생·사회 등의 행정을 배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과 복리 도모, ⑤ 지방자치 시행 목적으로 조사연구 착수, ⑥ 조선의 문화와 관습 존중 등을 내세워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시키려 했다.

이러한 문화정치의 표방에 따라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신문의 발행이 허용되고, 단체설립도 허가되었다. 그러나 문화정치는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한 것으로 일본은 이후 1945년까지 단 1차례도 문관을 조선총독에 임명하지 않았으며, 시정상의 첫째 강령은 치안유지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위해 1920년 경찰관서의 수를 1919년의 736개소에서 2,746개소로 3.6배 증가시켰고, 경찰관은 6,387명에서 2만 134명으로 3.2배나 증가시켜 탄압과 감시를 강화했다. 이와 함께 조선에 치안유지법을 실시하여 혹독한 감시와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문화정치의 본질은 사이토 총독이 민족운동에 대한 대응책으로 새로 채택한 '정치선전의 강화', '친일세력의 육성·보호·이용', '참정권 문제와 지방제도의 개편', '계층분단에 따른 분할통치' 등 4대정책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특히 친일파의 양성은 사이토 총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① 조선인 관리를 재조사해서 일본에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로 만듦으로써 관리를 강화한다. ② 신명을 바칠 핵심적 친일인물을 골라 귀족·양반·부호·실업가·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친일단체를 만들게 한다. ③ 각종 종교단체도 중앙집권화해서 그 최고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두어 어용화시킨다. ④ 조선문제 해결의 사활은 친일인물을 많이 얻는 데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인물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⑤ 양반·유생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주는 대가로 이들을 선전과 민정염탐에 이용한다. ⑥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소작쟁의를 통해서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일본자본을 도입해 연계를 맺게 하며 매판화시켜 일본측으로 끌어들인다. ⑦ 농민을 통제·조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를 만들고, 그들에게 국유림을 불하해주는 한편 입회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이처럼 문화정치는 반일민족운동의 앙양에 대비해 종래의 노골적인 무력지배를 철회하고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조선인 상층계급의 일부를 매수하고 동화정책을 한층 강력히 추진하며 조선 지배에 지장이 없는 약간의 출판물·결사를 허용한 것으로, 보다 교묘하고 교활한 민족분열정책의 위장에 불과했다. 이러한 기만적인 문화정치 아래 민족지도자들이 친일파로 변신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