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방응모

다른 표기 언어 方應謨 동의어 춘해, 春海, 계초, 啓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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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3. 1. 3, 평북 정주
사망 1950. 9. 28, 개성
국적 한국

요약 1923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장을 맡으면서 언론과 처음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924년 거의 폐광상태로 있던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의 다릿골[橋洞] 광업소를 인수해 덕대생활을 시작, 그 광산에서 금을 채굴해 부를 축적했다. 그뒤 8년간 금광을 운영하다가 1932년 광산을 정리하고 언론사업을 비롯,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1933년 당시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조선일보사의 경영권을 인수해 처음에는 조만식 사장 체제하의 영업국장으로 출발했으나, 같은 해 7월 자본금 30만 원의 주식회사로 등기를 마치면서 제9대 사장에 정식 취임했다.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발간했다.

방응모
방응모

아호는 계초(啓礎). 1923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장을 맡으면서 언론과 처음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924년 거의 폐광상태로 있던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의 다릿골[橋洞] 광업소를 인수해 덕대 생활을 시작, 그 광산에서 금을 채굴해 부를 축적했다. 그뒤 8년간 금광을 운영하다가 1932년 광산을 정리하고 언론사업을 비롯,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1933년 당시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조선일보사의 경영권을 인수해 처음에는 조만식(曺晩植) 사장 체제하의 영업국장으로 출발했으나, 같은 해 7월 자본금 30만 원의 주식회사로 등기를 마치면서 제9대 사장에 정식 취임했다.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 1939년 9월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940년에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조선일보〉를 8·15해방 후 복간해 계속 사장직을 맡아왔으나, 6·25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6일 인민군에게 붙들려간 후 9월 28일 개성 북쪽 서흥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던 도중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