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

온돌

다른 표기 언어 溫突 동의어 구들
요약 테이블
문화재 지정 2018.05.02
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제135호

요약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들고래를 만들고 고래 위에 구들장을 놓아 아궁이를 통하여 받아들인 열을 구들장에 저장했다가 서서히 복사열을 방출하여 방바닥이 따뜻해지도록 고안된 난방구조. 온돌문화는 한국의 독창적인 주거문화로, 2018년 5월 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목차

펼치기
  1. 역사
    1. 신석기시대
    2. 청동기시대
    3. 철기시대
    4. 원삼국시대
    5. 삼국시대
    6. 고구려
    7. 백제
    8. 신라
    9. 고려시대
    10. 조선시대
  2. 구조

열기로 방 바닥에 놓인 돌판을 덥혀 난방을 하는 방식. 이와 같은 방식을 한국에서는 온돌, 또는 구들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항이라고 한다. 온돌과 항은 그 외형과 재료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으나 그 구조와 방법이 동일하고 원류도 같다. 한국의 온돌문화는 그 고유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5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 최초의 온돌구조(몽촌토성 발굴)
한국 최초의 온돌구조(몽촌토성 발굴)

역사

신석기시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지만, 취사와 난방을 위한 시설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인들은 움집[豎穴住居]에서 주거했는데, 그들은 중앙 또는 중앙 가까운 곳에 냇돌이나 판석으로 주위를 돌리거나 진흙으로 둑을 쌓은 화덕자리를 만들었다. 이 화덕은 취사용이면서 난방과 야간 조명도 겸했을 것이다. 두만강 유역의 서포항유적 제1기층의 집자리 9호에서는 여러 개의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취사용과 난방용을 분리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BC 1000~300)의 주거 형태도 일반적으로는 움집이었으며, 화덕의 위치는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움의 중앙에서 벽쪽으로 치우쳐졌다. 화덕이 2개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취사용과 난방용을 구분하여 사용했던 듯하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 회령 오동 제2기 집자리 8호에는 움 안에 2개의 화덕자리가 있는데, 동남쪽 화덕은 방바닥을 파고 그 둘레를 막돌 8개로 둘러쌓았으며 재가 차 있던 것으로 보아 항상 불을 피우던 취사용이고, 서북쪽 화덕은 방바닥 위에 진흙으로 둘러싼 것으로 불피운 흔적만 있어 추운 겨울에만 불을 피웠던 난방용으로 보인다.

철기시대

철기시대(BC 300~AD 1)에도 역사 일반적인 주거는 움집이었으나, 움 안에서 ㄱ자형 구들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난방시설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 서둔동 주거지의 난방시설은 움의 북벽에 한 변의 길이가 약 30cm인 얇은 흙벽돌을 30cm 간격으로 양 옆면에 세우고, 그 위에 똑같은 크기의 벽돌을 덮어서 방(方) 30cm 크기의 터널형 구들을 구축하고, 서단에서 다시 서벽을 따라 굽어져 아궁이를 만들고 동단에서 벽에 붙여 굴뚝을 높이 쌓아 지붕 위로 뽑아 올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ㄱ자형 구들의 아궁이가 취사와 난방을 겸한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온돌
온돌
원삼국시대

원삼국시대(AD 1~300)의 주거 유형은 움집·귀틀집·고상주거가 있으며, 이들 주거의 건축은 이전시대의 주거보다는 발달되었다. 추운 지방의 경우 철기시대에 나타난 ㄱ자형 구들이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따뜻한 한반도의 남부지방에서는 ㄱ자형 구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남부지방까지는 ㄱ자형 구들이 전파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ㄱ자형 구들이 한반도 남부지방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고구려

고구려는 삼국 중 한반도의 북쪽과 만주라는 추운 지역에 위치한 지리적 이유 때문에 일찍부터 취사와 난방시설이 발달했다. 안악3호분의 부엌칸 벽화를 보면 독립된 1채의 부엌에 부뚜막이 있고, 연기를 빼는 굴뚝이 측면 벽에 뻗어 나와 있어 부뚜막은 난방용 아궁이와 독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동이전(東夷傳) 고려조의 기록에 의하면 일반 서민주택에서는 장갱(長坑)이 건조되어 난방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갱은 조선시대의 온돌처럼 방 전체가 모두 구들로 된 것이 아니며 철기시대의 ㄱ자형 구들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예는 지안[輯安] 동대자 주거지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이 유적은 고구려 후기 귀족계급의 것으로, 장갱이 처음에는 서민의 난방수단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 귀족계급에까지 전파되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백제

백제의 난방시설에 대한 기록이나 유적·유물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철기시대의 서둔동 주거지가 백제지역에 해당되고, <삼국유사> 권2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의 기록에 돌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도 고구려의 장갱이 널리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문헌에서는 장갱으로 표현된 것이 <삼국유사>에서는 돌(이미지)로 표현되어 있어, 후일 온돌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소산성내 제3건물지에서 구들과 부뚜막의 시설이 발굴·조사되었는데 고구려의 ㄱ자형 구들이 일직선 구들로 변화된 데 비해, 이는 고구려에서처럼 아궁이가 실내에 있고 구들과 직각방향으로 되어 있다.

신라

신라와 통일신라의 난방시설에 대하여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신당서> 동이전 신라조의 기록에 겨울에는 옥내의 부뚜막에서 취사를 하고, 여름에는 밖에서 취사를 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부뚜막은 항상 있었으나 단지 계절에 따라 실내의 부뚜막과 옥외의 부뚜막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어 온돌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사용되었던 ㄱ자형 구들과 같은 난방시설이 전파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장갱과 같은 ㄱ자형 구들과 마루구조가 그대로 계승·발전되었으며 취사와 난방시설의 기틀이 잡힌 시기로 생각된다. <고려도경> 권28 공장1조와 탑조의 기록에 귀족계급은 와탑(臥榻)을, 서민계급은 대부분 흙침상으로 땅을 파 구들[火坑]을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장갱을 화갱 또는 토탑(土榻)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 갱은 고구려의 폭이 좁은 장갱과는 달리 폭이 상당히 넓어진 갱임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최자의 〈보한집〉에 의하면 13세기초에는 이미 구들이 방 전체에 만들어지고, 아궁이가 방 밖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인로의 〈동문선〉 공주동정기에 보면 겨울에는 욱실, 여름에는 양청(凉廳)이라는 기록이 있어 구들을 놓은 방이 널리 축조되었으며 이러한 방을 욱실이라 불렀고, 도배를 하여 마감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온돌과 부뚜막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거의 없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온돌의 발달은 부뚜막의 발달을 가져왔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부뚜막과 온돌방 아궁이가 겸용으로 된 것도 있었으나 필요에 따라 이를 구분하여 축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온돌을 계승하여 초기부터 온돌이 널리 축조되었다. 온돌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와 같이 욱실이란 용어를 계속 사용하면서, '구들항'(炕)이라는 한자표기로서 온돌이라는 용어가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구들을 놓은 방 전체를 온돌방이라 부르고, 이외에 장갱·난돌(煖突)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었음이 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며, 이러한 용어는 조선 중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 온돌의 발달은 온돌방의 마감, 특히 장판법의 발달을 초래하여 영조 때는 장판마감에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시대의 부엌에 만들어진 온돌 아궁이는 대부분 취사용 부뚜막을 겸했다. 그러나 대가(大家)에서 반빗간(음식을 만드는 곳)이 독립될 때는 안방의 아궁이에는 부뚜막을 만들지 않고, 그 자리 아래층은 안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둔 함실로 사용하고, 위층에는 누마루를 놓아 안방마님의 여름거처로 이용했다. 이러한 예는 창덕궁 금원의 연경당 안채에서도 볼 수 있다.

구조

온돌의 구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 방 밑에 화기가 통하게 해 난방하는 구들고래, 연기를 빠지게 하는 굴뚝으로 구성되며, 유형은 화기를 통하게 하는 구들고래의 형식에 따라 나뉘어진다. 대표적인 구들고래의 유형에는 허튼고래·줄고래·선자고래 등이 있다.

온돌
온돌

허튼고래는 구들골을 만들지 않고 구들장 네 귀에 동바리처럼 쌓거나 괴어 만든 구들이며, 줄고래는 구들을 놓을 때 온기와 연기가 흘러 나가는 고래를 평행하게 만든 것이고, 선자고래는 온돌방의 구들고래가 부채살 모양으로 아궁이에서 방사형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또한 방의 안쪽 구들 밑에서 불이 타게 만든 온돌을 함실구들이라 한다. 또한 고래구조의 홀구들과 이중구들이 있으며, 고래 끝부분과 굴뚝 아래에는 온기의 저장 및 완충역할을 하고 그을음 등 이물질이 모이는 개자리가 있다.

이밖에 구들고래에서 발생되는 연기를 뽑아내는 굴뚝은 속이 뚫린 통나무굴뚝·옹기굴뚝·오지굴뚝·기와굴뚝·흙벽굴뚝 등이 있고 그 높이와 크기는 다양하다. 또한 굴뚝을 내는 방향에도 차이가 있어 보통 아궁이는 남쪽에 놓고, 굴뚝은 북쪽·동쪽에 내는데 남쪽에 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구들구조의 차이에서 생기는 결과이며 지역에 따른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경상남도·전라남도 등 남해안 지방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구들을 아궁이 쪽으로 내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