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애덤

다른 표기 언어 Robert 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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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28. 7. 3, 스코틀랜드 파이프 커콜디
사망 1792. 3. 3, 런던
국적 스코틀랜드, 영국

요약 스코틀랜드의 건축가·디자이너.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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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유럽의 영향
  4. 애덤 양식
  5. 신고딕 양식 작품
  6. 가구 디자인

개요

동생 제임스와 함께 잉글랜드의 팔라디오식 신고전주의를 경쾌하고 가벼우며 우아한 양식으로 변형시켰다.

이 양식은 그들의 성을 따서 애덤 양식이라고 불린다. 그의 주요건축작품 가운데는 런던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공공 건물들이 있으며, 그의 디자인은 미들섹스의 시온 저택(1762~69)과 같은 대저택의 실내장식에 사용되었다.

초기생애

그는 당시 스코틀랜드 최고의 건축가였던 윌리엄 애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윌리엄은 영국 북부에 있는 군수품부의 석공장(石工長)으로서 군사시설 설계를 감독했으며 또한 수많은 정원주택을 보수적인 팔라디오 양식(고대 로마 양식의 변형으로 16세기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처음 발전시킨 양식)으로 설계하기도 했다. 애덤 집안의 아이들은 유복하고 사교적이며, 교양 있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로버트가 태어난 뒤 곧 그의 가족은 에든버러로 이사했으며, 로버트는 6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하이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1743년에 에든버러 칼리지(지금의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745년에 공부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가 견습생 겸 조수로 일했다. 1748년에 아버지가 죽자 군수품부 석공장의 지위는 큰형인 존이 물려받았고 존은 로버트를 동업자로 선택했다. 그뒤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이 지위를 이용해 많은 계약을 유리하게 체결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이들 형제는 인버네스 근처 머리 만에 조지 요새를 짓는 한편 호프타운 백작 저택 내부 마무리 작업에도 종사했다. 애덤 형제는 이 두 건물의 내부를 장식하면서 새롭고 더욱 경쾌하며 로코코 양식과 비슷한 장식양식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했다.

로버트가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의뢰받은 주요건물로는 덤프리스 경을 위해 지은 에어셔의 덤프리스 저택이 있다.

유럽의 영향

1754년 당시 자기 재산이 5,000 파운드라고 생각하던 로버트는 호프타운 백작의 동생인 찰스 호프에게서 이탈리아 여행을 함께 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사후에 계속 간직하고 있었던 꿈을 이룰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백작의 동생과 함께 여행한다는 사회적인 이점을 누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대 로마 유적의 기념물에서 더욱 많은 건축 지식을 얻는 것 못지않게 외국에서 젊은 귀족들을 만나는 데 관심을 썼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동안 가족에게 쓴 편지에는 매우 야심 만만한 젊은이, 오만한 출세주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헌신적인 예술가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브뤼셀에서 찰스 호프를 만나 함께 파리로 갔으며, 파리 최신 유행에 맞게 치장하고 '장차 나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르는 훌륭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3주를 못 다 채우고 그들은 남부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를 향해 떠났고 도중에 님·아를·퐁뒤가르·몽펠리에 등지에 있는 로마 유적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1755년 1월초에 제노바에 도착했으며 리보르노를 거쳐 피렌체로 향했다. 1월말경에 피렌체에 도착한 그들은 즉시 로버트가 바라던 사교계로 진출했다.

로버트는 피렌체에 있는 동안 직업상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될 한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은 재능 있는 젊은 프랑스의 건축가이며 제도사인 샤를 루이 클레리소로, 로버트의 교사 겸 제도사로서 함께 여행하는 데 동의했다. 클레리소는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생이었지만 교장과 언쟁을 벌인 뒤, 1754년에 아카데미를 그만둔 상태였다. 클레리소와 사귀게 됨으로써 로버트는 로마의 전위적인 건축 이론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순수한 고대 유적의 견고한 기초 위에서 나의 사고를 크게 넓히고 나의 취향을 형성하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한편 클레리소는 "고미술품 연구가로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투시도와 드로잉을 가르치고……(그리고) 고대의 얇은 부조와 여러 장식들을 그린 (자신의) 모든 연구 사본들을 (그에게)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애덤은 1755년 2월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사교계에 전념할 것인지, 아니면 건축에 전념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만약 로마에서 내가 건축가인 것이 알려진다면, 만약 내가 도면을 그리거나 손에 연필을 쥐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예술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상류 사교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며, 설사 그들이 예술가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카드 놀이나 구기(球技), 연주회에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술가에게 모욕을 주려할 것이 틀림없다."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상류사회로의 입문과 찰스 호프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건축에 대한 관심과 클레리소를 버릴 것인가?"

그는 호프와 다투었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자신과 클레리소가 묵을 집을 정한 다음 로버트는 고대 유적을 방문하고 스케치를 하고 측량하는 등, 진지한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가 로마에서 만난 주요인물 중에는 예술품 수집가인 알바니 추기경과 그에게 책과 조각품을 준 조각가 잠바티스타 피라네시가 있었다.

1757년 5월에 애덤과 클레리소는 스팔라토(스플리트)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유적을 보기 위해 로마를 떠나 베네치아를 거쳐 달마치야로 갔다.

애덤은 '고대 공공건물에 대한 나의 연구에 고대 개인적인 대건축물의 관찰 결과를 덧붙일 수가 없다면 내 건축 지식이 불완전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팔라토에 5주 동안 머무르면서 여러 장의 도판을 그렸으며 이를 정리해 1764년 〈달마치야 스팔라토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유적 Ruins of the Palace of the Emperor Diocletian at Spalato in Dalmatia〉으로 출판했다.

애덤 양식

돈도 거의 다 떨어지고 영국으로 몹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로버트는 그리스와 이집트를 여행하려는 또다른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1758년 1월 그는 고대 로마 유적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쌓은 뒤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무렵 유행이던 팔라디오 양식은 그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건축양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애덤은 곧바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1763년에 런던으로 건너와 그와 합류한 동생 제임스의 도움을 받아가며 1760년대 중반 무렵 애덤 양식을 창조하여 완벽하게 발전시켰다.

그와 제임스가 나중에 선언했던 것처럼 이 양식은 "이 나라에서 쓸모 있고 우아한 이러한 예술의 전체 체계에 일종의 혁명을 초래"했으며, 고전건축 요소를 사용하면서 구사한 새로운 경쾌함과 자유스러움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예를 들면 왕립 미술협회 건물(1772~74)에서는 소용돌이 장식이 있는 이오니아식의 네모난 벽기둥과 가장 오래되고 단순한 그리스 양식인 도리아식 엔타블레이처(벽의 상부)를 팔라디오주의자들이 감히 시도할 수 없었던 자유로움으로 결합했다.

이 새로운 양식은 기본적으로 많은 건축 요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건축가인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의 팔라디오주의를 비롯해 존 밴브루 경의 역동성과 활력 있는 건축, 그리고 특히 상세부와 평면계획, 가구 디자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당시 프랑스의 영향, 로마의 고고학적 영향, 16세기의 환상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장식의 영향이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애덤의 천재성은 따로따로 분절된 영향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 경향의 발전이 종합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애덤 양식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장식 양식이었기 때문에 그는 주로 실내장식가로서 알려져 있다.

그는 카펫을 비롯해 눈에 띄지 않는 장식에 이르기까지 각 방의 모든 부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런던에서 만든 첫번째 주요작품은 해군본부 차폐물(1758)이었다. 왕의 친구인 뷰트 경의 영향력 덕분에 그는 1761년 11월 그의 주요건축 경쟁자인 윌리엄 체임버스 경과 함께 왕실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1760년대초에는 주택과 관련된 많은 일을 위촉받았다. 이 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마무리 작업이거나 전에 지어진 집들을 새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의 명성과 재능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로운 주택설계를 의뢰받지 못하고, 또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공건물에 대한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애덤이 서리 주 해칠랜즈(1758~61)와 버킹엄셔의 샤덜로스(1759~61)에서 처음으로 작업했던 실내장식은 여전히 팔라디오 양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1761년에는 이미 자신의 성숙한 양식을 발전시켰었으며 요크셔 주의 하우드, 우스터셔 주의 크룸 코트, 더비셔 주의 케들스턴 홀, 월트셔 주의 보우드, 미들섹스 주의 오스털리 파크 등을 맡게 되었다.

1762년에는 미들섹스 주 시온 저택의 내부설계 갱신 작업을 했다. 그는 오래된 중앙 건물에다 거대한 돔을 씌운 판테온 모양의 홀을 세울 것을 제안한 중요한 설계안을 작성했으나 시공하지 못했다. 시온 저택의 현관 홀은 바실리카 양식을 기준으로 삼아 2줄의 기둥으로 공간이 3분할된 건물 양끝에 반쪽짜리 돔을 씌운 것으로서 영국 건축에서 매우 중요한 신고전주의 내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에 지은 그밖의 주택으로는 처음으로 지은 완전한 새 주택인 켄트 주 머섐 르 해치(1762~72), 런던 버클리스퀘어의 랜즈다운 저택(1762~68), 베드퍼드셔 주 류턴 후(1766~75), 요크셔 주 뉴비 홀(1767경~85), 런던의 켄우드(1767~68) 등이 있다. 케들스턴 홀의 남쪽면은 그가 작업한 외부 처리의 한 본보기로, 그는 거대한 돔을 씌운 내부 홀의 외적 표현에서 개선문을 주제로 삼았는데 이는 주거건축에서 특수한 로마건축 형태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다.

오스털리 파크의 이중 포티코(지붕과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트인 공간)는 로마에 있는 옥타비아누스 포티코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고전주의 양식 모티프와 비슷하다.

1768년에 로버트와 제임스는 투기성 개발을 목적으로 템스 강변에 있는 부지를 임차했다(애덜피 개발로 알려진 이 사업 때 지은 주택은 1936년에 거의 모두 파괴되었음). 그들은 부지 주변에 둑을 쌓고 몇 채의 테라스 하우스(1768~72)를 짓는 데 많은 돈을 투자했으며, 여기서 가느다란 벽기둥이 얕은 프리즈와 코니스(엔타블레이처의 중간부분과 맨 윗부분)를 지지하는 애덤의 실내양식이 실외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재정면에서 대실패였다. 1773년에는 런던의 포틀랜드플레이스에 치장벽토를 바른 테라스 하우스 단지 건립에 손을 댔으나 역시 실패했다. 1770년대초에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성숙한 양식을 보여주는 호화로운 주택 3채를 런던에 지었는데, 그것은 세인트제임스스퀘어 20번지의 웟킨 윌리엄스 윈 경 저택(1772~74), 포트먼스퀘어 20번지의 홈 여백작 저택(1775~77, 지금의 코톨드미술대학 건물), 그로브너 스퀘어에 있는 더비 백작의 더비 저택(1773~74, 1862 헐림) 등이 있다.

1773년에 이들은 〈로버트 애덤과 제임스 애덤의 건축 작품집 The Works in Architecture of Robert and James Adam〉 제1권을 출판했다.

제2권은 1779년에, 제3권은 그들이 죽은 뒤 1822년에 출판되었다. 제1권의 서문에서 그들은 애덤 양식의 본질적 측면인 '율동'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율동이란 구성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해 상승과 하강, 전진과 후퇴를 한 건물 내의 서로 다른 부분들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1780년이 되자 로버트 애덤의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레이스 월폴은 건축가 헨리 홀랜드가 새로 지은 칼턴 저택을 방문한 뒤에 "이 간소한 궁전이 지어진 뒤로 사람들은 애덤의 야단스러운 장식 조각들을 얼마나 지겨워하게 될 것인가"라고 썼다.

신고딕 양식 작품

로버트 애덤은 주로 1780년대부터 스코틀랜드에 낭만적 신고딕 양식으로 많은 성을 설계하고 지었다.

캐실리스 백작을 위해 지은 에어셔 주 컬진의 성(1777~90)은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신고딕 양식의 또다른 주요작품은 노섬벌랜드 주 애닉 성(1770경~80, 19세기 헐림)의 내부구성이다. 로버트는 만년에 에든버러의 레지스터 저택(1772~92)을 지었다. 여기서 그는 마침내 몇 년 전 시온 저택에서 구상했던 정4각형 안에다 대단히 큰 돔을 배치한 홀의 개념을 실현했다.

1789년에는 에든버러대학교를 설계했는데, 이 건물의 입구 정면은 아마도 그가 가장 성공적으로 실행해낸 외부구성일 것이다.

런던의 피츠로이스퀘어(1790)와 에든버러의 샬럿스퀘어(1791)에서 마지막으로 그는 중심가의 건물에 율동을 도입하는 실험을 했다. 로버트 애덤은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안장되었다. 9,000여 장에 이르는 그가 남긴 도판들은 1833년 건축가 존 손 경이 사들였고 지금은 런던의 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구 디자인

애덤은 가구 디자이너로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개발하고 가구제작자인 조지 헤플화이트가 보급한 가구양식은 언제나 실내의 다른 장식들과 어울리도록 한 것이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도 역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오르간 케이스와 의자가마에서부터 소금그릇과 문 부속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손을 댔다. 이는 바로 아무리 작은 디테일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것은 모두 건축가가 창조한 통일된 계획안의 한 부분이라는 애덤 실내장식의 뚜렷한 한 가지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