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다른 표기 언어 스티븐슨 , Robert Louis (Balfour) Steve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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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0. 11. 13, 에든버러
사망 1894. 12. 3, 사모아 바일리마
국적 스코틀랜드, 영국

요약 스코틀랜드의 수필가·시인·소설가·여행기작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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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낭만적인 소설들
  4. 남태평양 시절
  5. 스티븐슨에 대한 평가
스티븐슨(Robert Louis Balfour Stevenson)
스티븐슨(Robert Louis Balfour Stevenson)

개요

그의 소설 〈보물섬 Treasure Island〉(1881)·〈납치 Kidnapped〉(1886)·〈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The Master of Ballantrae〉(1889) 등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스티븐슨은 토목기사로 성공한 아버지 토머스 스티븐슨과 마거릿 이사벨라 밸푸어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건강이 나빠서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기가 어려웠으나, 에든버러 아카데미와 그밖의 학교에 다녔다. 17세에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해 가업인 등대기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할 예정이었으나, 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그는 대신 스코틀랜드의 변호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스티븐슨은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했으며, 10대에는 작법을 배우려고 다양한 산문과 운문을 모방해본 적도 있었다.

젊은 혈기에 서약파(17세기의 장로교회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스코틀랜드인들의 집단)를 추종하여 첫 출판작 〈펜틀랜드의 봉기 The Pentland Rising〉를 쓰게 되었다. 대학시절 그는 부모의 종교에 반발했고, 체면을 내세우는 중산계급이 가지는 잔인성과 위선을 혐오하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을 자처했다. 1873년 아버지와 견해 차이로 힘들게 지내다 잉글랜드 서퍽에서 결혼해 사는 사촌을 방문했으며 이곳에서 영문학자 시드니 콜빈과 패니 시트웰(뒤에 콜빈과 결혼)을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스티븐슨보다 나이가 더 많은 시트웰은 매력과 재능을 갖춘 여자로서, 그의 관심을 끌었고 신뢰를 얻었다. 그는 곧 사랑에 깊이 빠져 에든버러로 돌아와서도 계속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를 보면 그는 그녀의 연인이면서 숭배자, 아들의 역할까지 했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몇 가지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는데, 그중 하나가 '클레어'이다. 이 사실 때문에 그가 죽은 지 몇 년 뒤에, 그가 이 이름을 가진 미천한 태생의 에든버러 소녀와 연애했다는 엉터리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결국 시트웰에 대한 열정은 변치 않는 우정으로 바뀌었다.

1873년말에 심한 호흡기 질환을 앓아 프랑스의 리비에라로 요양을 떠났는데, 뒤에 콜빈이 이곳에 왔다. 스티븐슨은 이듬해 봄에 집으로 돌아와 1875년 7월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개업은 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 자주 머물렀는데 주로 프랑스에서 지냈다. 이중 2차례의 여행을 〈내륙 여행 An Inland Voyage〉(1878)·〈당나귀를 탄 세벤 여행 Travels with a Donkey in the Cévennes〉(1879)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작가활동은 서서히 진전되어, 1873년에 수필 〈길 Roads〉이 〈포트폴리오 Portfolio〉지에 실렸고, 1874년에는 〈질서가 있는 남쪽 Ordered South〉이 〈맥밀런스 매거진 Macmillan's Magazine〉에, 리턴 경의 〈노래 우화집 Fables in Song〉에 대한 평론이 〈포트나이틀리 Fortnightly〉에 실렸다. 빅토르 위고를 다룬 그의 첫번째 기고문은 당시 비평가이자 전기작가인 레슬리 스티븐이 편집하던 〈콘힐 매거진 The Cornhill Magazine〉에 실렸다.

스티븐슨이 작가로서 처음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특이한 감수성을 매우 명상적인 어조로 정교하게 표현한 이런 초기 수필들이었다.

스티븐의 소개로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드먼드 고세를 만나 좋은 친구로 지냈고, 뒤에 에든버러에서는 역시 스티븐의 소개로 작가 W. E. 헨리를 만났다. 헨리와는 오랜 우정을 나누었으나, 1888년 헨리가 스티븐슨의 아내에 대해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되어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시기심과 분노에 사로잡힌 헨리는 스티븐슨이 죽은 뒤 그의 전기에 대해 악의적인 평론을 썼다.

1876년에 스티븐슨은 남편과 별거중이던 미국 여자 패니 밴드그리프트 오즈번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유부녀와의 교제에 대해 스티븐슨의 부모는 극구 반대했고, 1878년 그녀가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자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으나 1879년 아들이 그녀에게 가겠다고 하자 더욱 거세게 반대했다.

스티븐슨은 병든 무일푼의 몸으로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이 힘든 여행에 대한 기록은 후에 〈풋나기 이주자 The Amateur Emigrant〉(1895)·〈평원을 지나서 Across the Plains〉(1892)에 나온다. 몬터레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의 빈사상태였다가 겨우 살아난 스티븐슨은 1880년초에 첫 남편과 이혼한 패니 오즈번과 마침내 결혼했다. 이 무렵 화를 가라앉힌 아버지가 전보를 보내 재정지원을 하겠다고 제안했고, 스티븐슨은 버려진 은광에서 신혼여행을 보낸 뒤 스코틀랜드로 와서 아버지와 화해했다.

신혼여행 이야기는 〈실버라도 무단점유자 The Silverado Squatters〉에 기록되어 있다.

낭만적인 소설들

영국으로 돌아온 직후에 아내와 의붓아들 로이드 오즈번을 데리고 결핵 치료차 스위스의 다보스에 갔다.

1881년 4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피틀로크리와 스코틀랜드 브래머에서 여름을 보냈다. 병이 발작했지만 로이드를 즐겁게 해주려고 〈보물섬〉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1881년 10월부터 〈선박의 요리사 The Sea-Cook〉라는 제목으로 〈영 포크스 Young Folks〉에 연재되었다. 가을에 다보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보물섬〉을 완성하고, 더 복잡한 줄거리를 가진 〈오토 왕자 Prince Otto〉(1885)를 쓰기 시작했으나 인기는 얻지 못했다.

〈보물섬〉은 분위기와 인물과 사건이 서로 잘 맞물려 있으면서 완벽한 기량으로 씌어진 모험담이다. 이 책은 아이들의 흥미를 사로잡는 모험담이면서 동시에 인간행위의 모호한 동인(動因)에 대한 기묘한 해설서이기도 하다.

스티븐슨은 대부분 〈콘힐 The Cornhill〉지에 발표했던 수필들을 모아서 1881년 첫 수필집 〈Virginibus Puerisque〉를 출판했다. 1881년 겨울을 다보스의 한 농가에서 지낸 뒤 1882년 4월 그곳을 떠나 스코틀랜드 고지로 갔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걸작 단편 〈심술궂은 자넷 Thrawn Janet〉·〈명랑한 사람들 The Merry Men〉을 탄생시켰으나, 스티븐슨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폐에서 출혈을 했기 때문에 9월에 프랑스 남부로 갔다.

프랑스 남부 이에르에 마침내 정착한 그는 이따금 병이 재발하긴 했으나 행복하게 지내면서 글도 많이 썼다. 〈오토 왕자〉를 개작하고 〈어린이의 시동산 A Child's Garden of Verses〉(처음 제목은 〈장난감 피리 Penny Whistles〉)을 썼으며, 의도적으로 시대에 뒤진 언어로 쓴 역사 모험담 〈검은 화살 The Black Arrow:A Tale of the Two Roses〉(1888)을 쓰기 시작했다.

콜레라 전염병이 나돌아 이에르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스티븐슨은 가족들과 함께 1884년 9월부터 1887년 7월까지 본머스에서 살았으나, 영국 남부의 기후조차도 그의 병에 좋지 않아 자주 심하게 재발했다. 그러나 본머스에서 헨리 제임스를 만나 사귀었고, 작품도 많이 썼다. 〈어린이의 시동산〉(1885)을 개작하고, 〈마크하임 Markheim〉·〈납치〉·〈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썼다. 〈어린이의 시동산〉에 실린 시는 어린시절의 정서와 감각을 어른이 정확히 포착했다는 점에서 영문학사상 보기 드문 특이한 작품이다(아동문학). 〈납치〉에는 18세기 스코틀랜드 역사에 대한 그의 연구와 스코틀랜드의 풍경·역사·인물·지방색에 대한 그의 느낌이 서로 잘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일반독자에게 인기를 얻었던 작품은 도덕적 알레고리이자 추리소설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이다.

여전히 요양중이던 1887년 8월에 아내와 어머니, 의붓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도 이미 유명해진 그에게 편집자들과 출판업자들이 좋은 조건의 계약을 제안했다. 애디론댁 산맥에 머물며 〈스크리브너스 Scribner's〉지에 수필을 기고했고, 〈The Master of Ballantrae〉를 쓰기 시작했다.

도덕적으로 모호한 부분을 탐구한 이 소설은 결론을 억지로 조작한 점이 흠이기는 하지만 그의 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에 속한다.

남태평양 시절

1888년 6월 스티븐슨은 가족과 함께 요양과 유람용으로 전세낸 스쿠너 요트 '캐스코'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생을 남태평양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마르케사스 제도로 갔다가 파카라바아톨과 타히티로 옮겼으며, 호놀룰루에서 약 6개월간 머문 뒤 1889년 6월에 길버트 제도로 갔다가 사모아에서 6주를 보냈다.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몇 달 동안 다니면서, 스티븐슨은 그곳의 경치와 사람들에 대해 알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 결실인 남태평양에 대한 글 〈남태평양에서 In the South Seas〉(1896)·〈역사에 대한 각주 A Footnote to History〉(1892)는 재치와 통찰력이 돋보인다.

그는 이무렵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주변의 경관과 분위기를 파악한 까닭에 깊이가 있는 이 글 가운데서도 마르케사스 제도에 있는 누쿠히바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육지에 대한 묘사가 일품이다. 시드니를 여행하고 1890년 10월에 사모아로 돌아와 바일리마의 집에서 기반을 잡고 존경받으며 살았다. 그곳 기후가 잘 맞아 부지런하고 활동적으로 살았는데, 그가 갑자기 죽은 원인은 지병인 폐병 때문이 아니라 뇌출혈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작품은 성숙해졌다. 1893년에 발표한 〈카트리오나 Catriona〉(미국판 제목은 〈데이비드 밸푸어 David Balfour〉)는 전편 〈납치〉에 비해 기법이나 상상력이 앞서지 못했으나, 객관적인 문체로 쓴 섬뜩하고 강렬한 이야기 〈썰물 The Ebb-Tide〉(1894)은 스티븐슨의 문학활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다음 단계에 속하는 작품은 그가 죽는 날까지 쓰다가 미완성으로 남긴 걸작 〈허미스턴의 둑 Weir of Hermiston〉(1896)이다. 〈섬의 밤놀이 Island Night's Entertainments〉(1893)에 실린 정교한 비극적 구조의 단편 〈팔레사 해변 The Beach of Falesá〉(1892)·〈The Master of Ballantrae〉의 첫부분도 같은 부류에 속하나 〈허미스턴의 둑〉에는 미치지 못한다.

〈허미스턴의 둑〉은 군더더기를 모두 빼버린 문체로 비극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담았으며, 대화에는 현대 스코틀랜드 산문의 정수가 담겨 있다. 미완성작이기는 하지만 스티븐슨의 걸작으로 꼽힌다.

스티븐슨에 대한 평가

스티븐슨은 끊임없이 편지를 썼고, 1899년에 시드니 콜빈이 편집한 서간집에는 그의 인물됨과 생활상이 생생하고 매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콜빈이 가장 재미있는 편지들을 빠뜨리고 많은 부분을 요약·정리한 까닭에 스티븐슨의 정서에 대한 많은 중요한 사실은 모든 편지의 원문이 밝혀진 뒤에야 알려졌다. 콜빈은 스티븐슨이 패니 시트웰에게 보낸 편지를 1949년까지 개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또한 친구인 찰스 백스터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흥미진진한 편지는 예일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스티븐슨은 일찍 인정을 받은 결과 참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후세의 작가들은 그를 시샘 많은 아내 때문에 마지못해 체면을 지킨 부도덕한 허풍쟁이로 묘사했다. 그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편지를 보면 그는 헨리의 비난처럼 '초콜릿으로 된 천사'가 아니며, 천한 방탕자도 낙천적인 도피주의자도, 행복한 병자도 아니었다. 그대신 삶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해결의 열쇠를 갖지 않은 세상을 잔뜩 비꼬아서 잘 이용한 예민하고 지적인 작가였다.

작가로서의 평판도 일관되지 않는다. 그는 죽은 뒤에 곧바로 틀에 박히고 모방이나 한 작가라느니 동화작가밖에 될 수 없다느니 하는 혹평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와서는 예리한 비평가들 사이에서 독창성과 힘을 가진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최고로 꼽히는 그의 수필은 다양한 인간상황의 정곡을 예리하게 찌른다. 그의 소설은 미묘한 도덕적 의미가 함축된 뛰어난 모험담이거나, 아니면 심리뿐만 아니라 역사나 지형과도 연관되어 인간의 행위를 보여주는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단편소설은 로맨스와 아이러니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효과적으로 변경시키기도 하고, 공포와 서스펜스에 도덕적인 분석을 결합시키기도 했다. 시적인 재능이 풍부하지는 않았으나, 가끔 스코틀랜드어를 사용해 흥미롭고 독창적인 시를 쓰기도 했으며, 〈어린이의 시동산〉 같은 시에서는 특별한 감수성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