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민주의

삼민주의

다른 표기 언어 Three Principles of the People , 三民主義

요약 중국혁명동맹회, 중국 국민당의 사상적 지주로서 신해혁명·국민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민혁명이 좌절되자 그 혁명적 측면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계승되었다. 타이완의 국민당 체제에서 정치철학의 근본이 되고 있다.
삼민주의는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의 3원칙으로 되어 있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으나, 쑨원은 이것이 중국 인민들의 자격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민권주의는 군권에 대한 민권 투쟁으로 출발하여 군권을 정복한 뒤 선거·발의권·국민투표·소환권의 4가지 민권을 강조하고, 입법·사법·행정·고시·감찰의 5권에 의해 국가권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민생주의는 3원칙 가운데 가장 의미가 모호하다. 쑨원은 토지소유의 균등사상을 염두에 두고 민생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혁명동맹회, 중국 국민당의 사상적 지주로서 신해혁명·국민혁명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

국민혁명이 중도에 좌절되자 그 혁명적 측면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계승되었다. 타이완[臺灣]의 국민당 체제 아래서 정치철학의 근본이 되고 있다.

삼민주의는 민족주의(民族主義)·민권주의(民權主義)·민생주의(民生主義)의 3원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3원칙은 하나로 연결되어 통일된 사상체계를 형성한다. 첫번째 원칙인 민족주의는 처음에는 외국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쑨원은 이것이 전반적으로 중국 인민, 특히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자격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번째 원칙인 민권주의는 간혹 '민주주의'라고도 하는데, 우선 군권(君權)에 대한 민권의 투쟁으로 출발하여 군권을 정복한 뒤 영국과 미국식 대의정치(大義政治)의 결함을 보충하여 선거·발의권·국민투표·소환권의 4가지 민권(政權)을 강조하고, 이와 아울러 입법·사법·행정·고시·감찰의 5권(治權)에 의해 국가권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정권·치권의 조화에 의해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기도하는 것이다.

3번째 원칙인 민생주의, 즉 때때로 '사회주의'로 통하는 '인민의 생활권'은 이 3원칙 가운데 가장 의미가 모호하다. 그러나 쑨원은 올바른 과세제도를 통한 토지소유의 균등사상을 염두에 두고 민생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토지 소유의 집중과 땅값의 상승에 의한 지주의 이익독점을 막고(地權平均), 독점적 자본가의 발생을 막음과 동시에 국가자본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資本節制)으로 그 바탕에는 사회주의적 이상이 담겨 있다.

삼민주의는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의 성립 직전에 3대주의(三大主義)로 성립하여 청조를 몰아내고 '중화(中華)를 회복하며(민족주의), 민국(民國)을 건립하고(민권주의), 지권을 평균화하는(민생주의) 중국혁명동맹회의 강령에 요약되어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민족주의는 5족공화론(五族共和論)으로 바뀌었고, 민권주의는 직접 민권의 사상으로 흡수되었으며, 민생주의는 자본절제가 추가되었다. 5·4운동까지 주류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나 5·4운동과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급속히 반군벌·반제국 주의로 발전하여 1924년 국민당 개편을 계기로 공산당과의 통일전선사상으로서 비약적 발전을 보였다. 그 특색은 소련과의 제휴(連蘇), 공산당과의 합작(容共) 및 노동자·농민 원조(工農扶助) 정책에 나타나 있다. 특히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농민문제의 해결책으로써 '경작자에게 밭을'(耕者有其田)이라는 원칙이 구체적으로 전개된 새로운 단계의 삼민주의를 기본적으로 특징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쑨원의 사망 후, 국민당은 반공·용공·중도파로 분열되어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삼민주의를 자기 파에 유리하게 해석했다.

우파는 유교의 입장, 중도파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계급투쟁을 부정했고, 용공파는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계급투쟁을 긍정했다. 전국제패 후, 장제스[蔣介石]는 우파의 유교적 해석을 받아들여 독재의 길로 들어서면서 삼민주의의 혁명성을 배제했다. 그러나 항일통일전선의 성립에 의해 삼민주의의 혁명적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어 공산당의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에 포함되었다.

삼민주의는 중국의 민족 부르주아 사상으로 성립·발전되었으나, 민족 부르주아의 발육미숙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과 제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삼민주의는 처음부터 혁명적 여러 계급의 통일전선사상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동맹회시대, 제1·2차 국공합작시대의 혁명투쟁사상으로서 유효하게 작용했다. 특히 '경작자에게 밭을' 원칙은 문자 그대로 공산당에 의해 수용되어 태평천국의 홍수전(洪秀全)으로 부터 쑨원, 쑨원으로부터 마오쩌둥[毛澤東]에 이르는 계보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장제스의 국민당은 증국번(曾國藩)에게 직결되어, 쑨원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삼민주의의 보수적 측면만을 형식적으로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쑨원(孫文)
쑨원(孫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