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앙

브리앙

다른 표기 언어 Aristide Bri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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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2. 3. 28, 프랑스 낭트
사망 1932. 3. 7,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

11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냈으며, 1906~32년 모두 26차례 장관직에 올랐다. 국제협력과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2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법학도로서 사회주의 운동에 매료되어 〈푀플 Peuple〉·〈랑테른 La Lanterne〉·〈프티트 레퓌블리크 Petite Republique〉지(誌)에 논설을 기고했고, 1904년 조레스과 함께 〈위마니테 L'Humanité〉를 창간했다.

1894년 브리앙은 낭트의 노동자대회에 참가해 현실적인 전략으로써 총파업을 결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 결정은 조레스가 이끄는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쥘 게드가 이끄는 급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이해단절의 깊은 골을 만들었다. 3차례(1889, 1893, 1898) 총선에서 실패한 뒤 1901년 사회당 총서기에 올랐으며, 이듬해 루아르 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죽을 때까지 의석을 지켰다.

브리앙이 정계에서 거둔 최초의 성공은 1905년의 정교분리주의 운동이었으며, 그의 보고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제명으로 출간되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브리앙은 1906년 3월 교육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부르주아 정부의 직책을 수락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1906~09년 조르주 클레망소의 1차 내각에서 다시 교육부 장관직을 지낸 뒤 1909년 7월부터 1910년 11월까지 총리직을 수행했으며, 스스로 작성한 비례대표제안이 1913년 3월에 상원에서 부결되기 직전까지 잠깐 동안이지만 2차례 더 내각을 구성했다.

1915년 10월 르네 비비아니 내각이 붕괴되자 브리앙은 다시 총리에 올랐고 이번에는 외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1916년 12월에 자신의 6번째 내각을 구성했으나 지지부진하게 계속되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실패했으며, 이듬해 3월에는 가중되는 압력과 발칸 반도에서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리앙은 이후 3년 동안 국제연맹과 집단안보의 개념을 주창한 것 외에는 공무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1921년 1월 총리직에 복귀했으나 외정에서의 실패로 인해 1922년 1월 12일 물러났다.

1925년 4월 브리앙은 펭르베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취임함으로써 14개 내각에서 연속 각료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14개의 내각 중 1925~26년의 3개와 1929년의 1개 내각은 그 자신이 총리직을 수행했다. 외무장관 시절 브리앙은 로카르노 조약켈로그-브리앙 조약이라는 의미 있는 결실을 이루어냈다. 로카르노에서 브리앙은 독일의 슈트레제만,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와 함께 독일과 연합국 사이의 관계정상화에 노력했고, 켈로그-브리앙 협정에서 세계 60여 개국은 정책수단으로서의 전쟁의 수행을 불법화시켰다.

1930년 12월 브리앙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당시로서는 담대하게 유럽의 연방화를 주장했다. 1932년 1월 대통령선거에서 패배 후 은퇴했는데 그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