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다른 표기 언어 Diego (Rodríguez de Silva) Velázquez
요약 테이블
출생 1599년 6월 6일, 스페인 세비야
사망 1660년 8월 6일, 마드리드
국적 스페인

요약 17세기 스페인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주요 작품은 <브레다의 항복>과 <인노켄티우스 10세>와 <시녀들>. 세비야에서 태어나 1623년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왕의 수집품 중에서 티치아노의 그림을 본 후 그의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후기에는 루벤스의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채색을 받아들였다. 두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베네치아 회화를 연구하여 보다 폭넓은 기법을 발전시켰다. 후기 양식에서는 자유로운 스케치풍의 기법을 사용했으며, 말년에 이를때까지도 매우 독창적인 구도의 걸작을 그렸다. 직계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기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목차

접기
  1. 벨라스케스의 세비야 시절
  2. 벨라스케스의 마드리드 궁정화가 시절
  3. 벨라스케스의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
  4. 벨라스케스의 중년기
  5. 벨라스케스의 2번째 이탈리아 여행
  6. 벨라스케스의 말년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Velázquez)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Velázquez)

17세기 스페인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서 전세계적으로도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연주의 양식으로 묘사한 인물과 정물작품들을 보면 그의 뛰어난 관찰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6세기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하면서 여기에 영향을 받아 사물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시로서는 독특하게도 시각적 인상을 강조한 걸작들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베네치아 화파). 벨라스케스는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질감·공간·빛·분위기의 효과를 내는 데 성공했으며, 그로 인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주요선구자가 되었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화가로서보다는 전기작가 겸 이론가로서 더 많이 알려진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프란시스코 파체코가 1649년에 발간한 〈회화미술 Arte de la pintura〉를 통해 주로 알려져 있다.

벨라스케스에 대한 완전한 전기는 궁정화가 겸 미술학자인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에 발간한 〈미술관과 시각적 단계 El Museo pictórico y escala óptica〉의 제3권〈스페인 파르나소 El Parnaso español〉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스케스의 제자이자 팔로미노의 후원자인 후안 데 알파로가 쓴 전기적 자료를 기초로 쓴 것이다.

개인적인 기록은 매우 적으며 그의 그림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도 비교적 드물다. 그는 작품에 서명이나 날짜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자와 연대를 밝히는 데는 양식상의 증거만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의 초상화들은 분명히 그의 화실에서 조수들에 의해 모사된 것이 많지만 그 자신의 작품은 많지 않으며, 그의 자필서명이 들어 있는 작품들 중 남아 있는 것은 150점도 채 안 된다. 그는 그림을 천천히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기에는 마드리드에서의 궁정관리직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세비야의 물장수(Water Seller of Seville)
세비야의 물장수(Water Seller of Seville)

벨라스케스의 세비야 시절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에서 태어나 1599년 6월 6일에 세례를 받았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그의 첫번째 스승은 세비야의 화가인 프란시스코 에레라(1576경~1656)였다. 1611년 그는 공식적으로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도제가 되었으며 1618년에 그의 딸과 혼인했다. 파체코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5년 동안 그에게 교육과 수련을 시킨 뒤 그의 미덕과 성실성, 훌륭한 자질에 감동받아 그의 기질과 뛰어난 재능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를 나의 딸과 혼인시켰다." 파체코 자신은 평범한 마니에리스모 화가였지만 벨라스케스가 초기의 자연주의 양식을 발전시킨 것은 바로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였다. 파체코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실물을 기초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다양한 자세의 모델을 대상으로 많은 스케치를 그림으로써 인물 묘사에 있어 뛰어난 수준에 도달했다." 그가 〈세비야의 물장수 Water Seller of Seville〉(1619경, 런던 웰링턴 박물관)를 그린 것은 20세도 되기 전이었는데, 이 그림에 나타난 구도·색채·명암의 조절과 인물 및 그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의 자연스로움, 사실적인 정물 묘사는 이미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붓놀림을 보여주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환상적인 초기 양식에서 볼 수 있는 단단한 모델링과 뚜렷한 명암 대비는 이탈리아의 화가인 카라바조(1573~1610)가 혁신한 것들 중 하나인 테너브리즘이라는 극적인 명암법과 매우 비슷하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주제들은 주로 종교적이거나 풍속적(일상생활의 장면들)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회화에서 '보데곤'(bodegón:17세기 스페인의 정물화 양식)이라는 새로운 구성 양식을 널리 퍼뜨렸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정물이 있는 부엌 장면을 그린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있는 노파 Old Woman Frying Eggs〉 등이 있다. 때때로 보데곤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에서처럼 배경에 종교적인 장면을 취하기도 했다. 〈동방박사들의 예배 Adoration of the Magi〉는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서 그린 그림들 중 하나로 지금도 스페인에 남아 있다.

벨라스케스의 마드리드 궁정화가 시절

펠리페 4세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뒤인 1622년에 벨라스케스는 왕궁의 후원을 얻기 위해 처음으로 마드리드를 방문했다. 그는 시인인 루이스 데 곤고라의 초상화(1622, 보스턴 미술관)를 그렸지만 왕이나 왕비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는 없었다. 그 다음해에 그는 세비야의 동향인이며 그후 그의 후원자가 된 수상 올리바레스 백작의 부름을 받아 마드리드에 갔다. 그는 마드리드에 도착한 뒤 곧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려 이 그림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 이외에는 어느 화가도 왕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한다는 약속과 함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파체코는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려진 펠리페 4세의 기마 초상화(뒤에 분실됨)에 대해 "풍경을 포함한 모든 것이 실물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초상화는 "모든 궁정인들의 찬탄과 다른 화가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공개 전시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벨라스케스의 동료 미술가들은 그가 사람의 머리만을 그릴 수 있을 뿐이라고 비난했으며 그들의 이러한 시기로 인해 왕은 그에게 다른 궁정화가들과 겨루어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무어인들의 추방 Expulsion of the Moriscos〉(뒤에 분실됨)을 그리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이 경쟁에서 이겨 상을 받았고 1627년에 왕의 궁정 의전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계속 다른 주제들도 그렸지만 궁정화가로서 주로 왕가와 그 측근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전념했으며, 그리하여 이 기간에 펠리페 4세의 많은 초상화들을 그렸다. 파체코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위대한 군주로부터 매우 후하고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궁 안에 큼직한 화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은 그 화실 열쇠와 전용 의자를 갖고 있어 거의 날마다 한가한 때는 그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에서의 지위로 인해 왕의 수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특히 그의 화풍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베네치아의 화가 티치아노(1490경~1576)의 그림들이 많았다. 펠리페 4세의 전신 초상화(1626경, 프라도 미술관)와 그의 동생인 돈 카를로스 왕자의 전신 초상화(1626경, 프라도 미술관)는 티치아노가 세운 스페인 왕가의 초상화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어느 정도 그의 양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초상화들에서는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서 그린 그림들에서 볼 수 있었던 상세한 묘사와 테네브리즘은 완화되었고, 다만 얼굴과 손이 강조되고 밝은 배경을 바탕으로 어두운 색의 인물화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는 1628년에 플랑드르 바로크 양식의 대가인 페테르 파루벤스(1577~1640)가 2번째로 스페인의 궁정을 방문했을 때 그와 만났으며, 그뒤 후기의 궁정 초상화들에서 루벤스의 좀더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채색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파체코에 따르면,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의 꾸밈없는 작품들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술고래들 Los Borrachos〉(또는 〈바코스의 개선 The Triumph of Bacchus〉)로 알려져 있는 바코스에 관한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주제에 대한 그의 사실적 접근은 스페인 고유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그뒤 전생애에 걸쳐 이러한 접근방식을 유지했다.

벨라스케스의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

팔로미노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와 함께 마드리드 근처에 있는 에스코리알의 왕립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의 유명한 그림들을 구경한 뒤 이탈리아에 가고 싶어졌다. 그는 왕에게서 여행 허가와 2년치 봉급을 받고 올리바레스에게서는 후원금과 추천장을 받아, 1629년 8월 바르셀로나에서 배를 타고 제노바로 떠났다.

당시 마드리드 주재의 이탈리아 대사들이 보낸 문서들에는 그가 왕과 올리바레스가 총애하는 젊은 초상화가로서 그림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 여행은 실제로 그의 미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베네치아에 머물렀으며, 팔로미노에 따르면, 그곳에서 16세기 후반 베네치아파 회화의 대가인 틴토레토(1518~94)의 작품을 모사했고 얼마 후 로마로 갔다.

파체코에 따르면, 그는 바티칸 궁전에 여러 개의 방을 얻었지만 외부로부터 너무 고립되었음을 알고 나중에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모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 메디치 빌라로 주거를 옮겼는데, 그곳은 지대가 높고 공기가 좋았으며 고대 조각의 복제품들이 있어 모사할 수 있었다.

뒤에 그는 열병에 걸리는 바람에 스페인 대사관 근처로 주거지를 옮겨야만 했다. 로마에서 1년을 보낸 뒤 스페인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나폴리에서 머물렀으며, 1631년 초 마침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에서 그린 드로잉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그린 몇 점의 그림들 중 로마에서 그린 것이라고 파체코가 말한 유명한 자화상은 아마 복제품(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발렌시아 산카를로스 주립미술관)으로만 남아 있는 것 같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동안 그린 주요작품으로는 로마에서 그린 2점의 걸작인 〈야곱에게 보내진 요셉의 피묻은 외투 Joseph's Bloody Coat Brought to Jacob〉·〈불카누스의 대장간 The Forge of Vulcan〉이 있으며, 팔로미노의 기록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들을 스페인 국왕에게 바쳤다. 이 2점의 웅장한 인물화는 그가 예전에 습득한 단순한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불카누스의 대장간〉
디에고 벨라스케스 〈불카누스의 대장간〉

그는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한 결과 공간·원근법·빛·색채의 처리와 보다 폭넓은 기법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한 시각적 현상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있어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중년기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이 시기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다시 초상화가로서 중요한 직무를 맡았으며, 때때로 왕의 방들을 신화적인 주제의 그림들로 장식하도록 의뢰받았다.

그 이후 그의 종교적인 작품들은 대단히 훌륭하고 독특한 성향을 띠고 있다.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 그림들의 경건한 분위기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웅장한 구도를 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hrist on the Cross〉에서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스페인 왕비의 기도실을 위해 그려진 〈성모의 대관식 The Coronation of the Virgin〉에서는 '하늘의 여왕'을 주제로 한 그림에 어울리는 매우 웅대한 구도 속에서 부피가 크고 화려한 의복들이 신성한 사람들의 엄숙함과 위엄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1635년에 완성된 새로운 부엔레티로 궁전의 알현실을 장식하기 위하여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에서 티치아노의 〈뮐베르크의 카를 5세 Charles Ⅴ aühlberg〉(1548, 프라도 미술관)를 시작으로 그뒤 루벤스가 이어받은 전통에 따라 왕을 주제로 한 일련의 기마 초상화들(프라도 미술관)을 그렸다. 그가 그린 기마화들은 루벤스의 바로크 양식보다는 티치아노의 양식에 더 가까운 균형과 조화를 띠고 있는데,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세세한 드로잉이나 명암의 강렬한 대비 대신 풍부한 붓놀림과 자연광을 이용하여 3차원적인 효과를 달성했다.

〈브레다의 항복 The Surrender of Breda〉은 부엔레티로 궁전의 알현실을 장식하기 위해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여 그려진 유명한 그림으로,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그의 그림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의 정교한 구도는 루벤스의 회화 양식에 기초를 두었지만, 그는 세부의 정확한 정밀 묘사와 주요인물들의 살아 있는 듯한 묘사를 통해 생생한 실재감을 전달하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브레다의 항복〉
디에고 벨라스케스 〈브레다의 항복〉

벨라스케스는 특히 왕의 초상화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전통적인 구도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그가 창의력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의 새로운 사냥용 별장인 '토레 데 라 파라다'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펠리페 4세(1635경, 프라도 미술관)와 페르난도 왕자(1632~35경, 프라도 미술관), 사냥꾼의 차림을 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화들에서 그는 비공식적인 왕의 초상화를 새로운 양식으로 그려냈다. 그 별장을 위하여 그는 〈멧돼지를 사냥하고 있는 펠리페 4세 Philip Ⅳ Hunting Wild Boar〉(런던 내셔널 갤러리)를 비롯한 사냥 장면들과 〈이솝 Aesop〉·〈메니푸스 Menippus〉(1639~40, 프라도 미술관) 등 초상화와 비슷한 고전적인 주제들을 다룬 몇 점의 인물화를 그렸다.

그뒤 몇 해 동안 그려진 궁정 소인들의 초상화들(프라도 미술관)은 왕과 귀족들의 것과 똑같은 공정하고 통찰력 있는 눈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인들의 기형성은 그들의 어색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자세와 개성적인 표정을 통해, 그리고 매우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붓놀림에 의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한편 여인들을 그린 몇 점의 비공식적인 초상화들 중 하나인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 Lady with a Fan〉은 미묘하고 섬세한 채색법과 뛰어난 감각의 인물묘사로 유명하다.

벨라스케스의 2번째 이탈리아 여행

1649년초 벨라스케스는 2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났다.

이번에 그는 침실 시종으로서의 공식적인 직무를 맡았다. 그는 아마 펠리페 4세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에게 보내는 선물일 것으로 생각되는 그림들의 운반을 맡았다. 이 여행의 주요목적은 왕궁의 새로운 방들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림과 고미술품들을 구입하고 그 방들의 천장을 장식하기 위하여 프레스코 화가들을 고용하며 스페인에 프레스코를 재도입하는 것이었다.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 회화에서, 특히 티치아노로부터 다시금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처음에 그는 베네치아로 가서 티치아노·틴토레토·베로네세의 그림들을 구입했다. 그 다음에 그는 모데나로 가서 자신이 1638년에 마드리드에서 그린 모데나 공작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공작의 유명한 컬렉션을 구경했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그는 볼로냐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에 머물렀는데 볼로냐에서는 마드리드에서 일할 프레스코 화가들과 계약을 맺었다.

팔로미노는 벨라스케스가 로마에서 프랑스 화가인 니콜라 푸생(1594~1665)과 이탈리아의 주요한 바로크 조각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등 유명한 미술가들 및 고위 성직자들과 친교를 맺었다고 상술하고 있다. 팔로미노는 그가 정선한 고미술품들의 목록을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을 보면 그는 16세기 이래 중요한 수집가들의 전통을 따라 질이 떨어지는 원품보다는 오히려 로마에 있는 가장 유명한 조상들의 복제 주조품들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다른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그림들을 그렸는데," 그중 하나로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등이 있었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 실물을 기초로 한 습작으로서 그의 물라토 노예인 후안 데 파레하(1650년 벨라스케스가 해방시켜줌)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것은 예외적인 비공식적 초상화로 특히 대담하게 그려졌으며 친근하고 생생한 초상의 효과를 강하게 자아내고 있다.

1970년 이 그림은 554만 4,000 달러의 금액에 팔렸는데 이 금액은 그 당시 경매된 미술품의 가격으로는 가장 높은 것이었다.

벨라스케스는 그의 가장 중요한 공식 작품들 중 하나인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를 그릴 때, 라파엘로가 〈율리우스 2세 Julius Ⅱ〉(1511~12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시도하고 뒤에 티치아노가 〈파울루스 3세 및 그의 손자들 오타비오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 Paul Ⅲ and His Grandsons Ottavio and Cardinal Alessandro Farnese〉(1546,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을 그릴 때 사용한 교황 초상화의 전통 양식을 따랐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캔버스에 유채, 1650, 140×120cm, 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팡필리 미술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캔버스에 유채, 1650, 140×120cm, 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팡필리 미술관

강렬한 느낌을 주는 머리와 심홍색을 화려하게 배합한 커튼·의자·코프(겉옷) 등은 티치아노의 후기 양식을 능가하는 아주 섬세한 붓놀림과 능숙한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스페인 밖에서 오랫동안 벨라스케스의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평가되어온 이 초상화는 수없이 복제되었으며, 그는 이 그림으로 이탈리아에서도 곧 유명해져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1650년 로마의 가장 유명한 미술가 단체인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와 '콘그레가치오네 데이 비르투오시 알 판테온'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1659년까지 산티아고 수도회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초상화로 말미암아 스페인 기사단의 회원이 되기 위한 매우 까다로운 신청과정에서 교황의 후원을 얻었다.

벨라스케스가 로마를 처음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메디치 빌라를 주제로 한 2점의 작은 풍경화는 양식적으로 볼 때 그가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한 기간에 그려진 것임이 틀림없다(베네치아 화파). 그것들은 그의 남아 있는 작품들 중 순수하게 풍경을 다룬 독특한 작품들로서 19세기의 인상주의를 예고한 뛰어난 그림들이다.

이른바 〈로케비 비너스 Rokeby Venus〉라고 하는 그림도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19세기 이전의 스페인 회화에서는 희귀한 여인 누드화 중 하나이다. 비너스의 몸단장에 관한 주제와 화려한 채색 및 선정적인 피부 색조는 주로 티치아노 등의 베네치아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독특하게 모델을 꾸미거나 이상적으로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훌륭한 비너스 그림은 당대로서는 예외적으로 실재 여자의 누드를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벨라스케스의 말년

벨라스케스는 1651년 여름에 선물을 사 가지고 마드리드로 돌아갔으며 왕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왕은 그 다음해에 왕의 방들을 정리하고 왕의 여행을 준비하는 직책인 궁정의 시종에 그를 임명했다. 그가 여행을 떠난 동안 펠리페는 재혼했으며, 그리하여 젊은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와 그녀의 자녀들을 주제로 새로운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왕비의 초상화(1652~53, 프라도 미술관)와 왕의 맏딸인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1652/53,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그는 유사한 구도법을 사용했으며, 많은 화실에서 이들의 복제품이 만들어졌다. 왕가의 여자들은 커다란 머리장식과 치마 속을 버팀살대로 장식하여 마치 인형같이 묘사되어 있다.

벨라스케스는 후기 양식에서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고 자유로운 '스케치풍'의 기법을 사용하여 형태·질감·장식의 효과를 달성하고 있다.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1659, 빈 미술사박물관)와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의 초상화는 구도와 양식이 서로 비슷하고 그의 작품들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꼽히는데, 그는 모델을 표현하는데 있어 매우 섬세하게 정면에 왕가의 위엄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면에는 모델들의 어린애 같은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펠리페 4세의 흉상을 그린 벨라스케스의 후기 초상화들(1654경 프라도 미술관, 1656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은 성격이 매우 다르고 왕의 비공식적인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서 예외적인 작품들인데, 현재 많은 복제품들이 존재하고 있다. 슬픔에 잠긴 늙은 군주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린 이 마지막 그림들은 그가 그린 왕의 모든 초상화들 중 가장 친밀감을 주는 작품들에 꼽힌다.

벨라스케스는 많은 공식적인 초상화들 외에도 말년에 매우 독창적인 구도로 2점의 뛰어난 걸작을 그렸다. 태피스트리 공장의 풍속적인 장면을 그린 〈힐란데라 Las Hilanderas〉는 한편으로는 동시에 팔라스 아테나와 아라크네의 베짜기 경쟁에 관한 고대 그리스의 신화를 나타낸 그림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초기의 여러 '보데곤'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인 장면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주제가 배경에 깔려 있다. 그러나 이 후기 작품에는 신화와 현실 세계 사이에 경계가 없으며, 그 두 세계가 형식에 지나지 않은 뛰어난 원근법적 구도로 결합되어 있다.

힐란데라(Las Hilanderas)
힐란데라(Las Hilanderas)

〈왕가 The Royal Family〉라고도 알려져 있는 〈시녀들 Las Meninas〉에서 그는 시녀들과 다른 하인들을 거느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면전에 있는 왕과 왕비를 그리는 동안 자신의 작업실에서 순간적으로 우연한 장면을 얼핏 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 복잡한 구도에서는 거의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중앙의 공주와 조명원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자세한 정도가 다르게 묘사되어 있으며, 벨라스케스 자신이나 당대의 어떤 다른 미술가도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게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벨라스케스의 마지막 작품은 1660년 봄에 왕과 왕실을 따라 프랑스 국경으로 가서, 루이 14세와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혼인식을 거행할 스페인풍의 파빌리언을 장식한 것이었다. 그는 마드리드에 돌아온 뒤 곧 병에 걸려 1660년 8월 6일에 죽었다. 벨라스케스는 학생이나 직계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19세기초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그무렵 외국(주로 영국)의 수집가들은 그가 세비야에서 그린 초기 그림들의 대부분을 입수했다. 그가 후기에 그린 공식적인 작품들의 대부분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