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베르나르

사라 베르나르

다른 표기 언어 Sarah Bernha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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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4. 10. 22/23, 프랑스 파리
사망 1923. 3. 26,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 태생의 연극배우. 본명은 Henriette Rosine Bernard, 예명은 La Divine Sarah.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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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수련과정
  3. 국제적인 성공

개요

사라 베르나르는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연기활동을 했으며 연극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14년 레지옹 도뇌르 상을 받았다.

초기생애와 수련과정

파리에 기반을 잡은 네덜란드 출신의 악명 높은 고급 매춘부 유디트 반 하르트와 법률학도인 에두아르 베르나르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엄마의 생활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숙집에서 양육되다가 나중에는 수녀원에 맡겨졌다. 성미가 까다롭고 의지가 강하면서도 몸이 허약했던 어린시절, 사라 베르나르는 수녀가 되기를 원했으나 엄마의 정부(情夫)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나폴레옹 3세의 이복동생 모르니 공작이 그녀를 배우로 키울 것을 결심하고 16세 되던 해 정부의 후원을 받는 연기학교 콩세르바투아르에 입학시켰다(파리 고등음악원). 학교에서는 특별히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베르나르 또한 몇몇 선생님을 존경했으나 학교의 수업방식에 대해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1862년 이 학교를 그만두고 모르니 공의 영향력에 힘입어 국립극단인 코메디 프랑세즈에 견습배우로 들어갔다.

견습배우에게 허용되는 3편의 의무작품에 출연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동생에게 난폭하게 굴던 선배 여배우의 얼굴에 손찌검을 한 사건 이후 1863년 코메디 프랑세즈와의 계약이 취소되었다. 잠시 짐나즈 드라마티크 극단에서 일했으며 바보스런 러시아 공주 역으로 무대에 선 이후 연기자로서 자기분석과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구심으로 수개월을 보냈다.

자기비판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 리뉴 공 앙리의 정부가 되어 유일한 아들 모리스를 출산했다. 1866년 오데옹 극단과 계약을 맺었으며 그곳에서 성격이 서로 맞는 동료들과 6년 동안 열심히 연기생활을 하면서 점차 명성을 쌓아나갔다. 1868년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대(大)뒤마의 작품 〈케앙 Kean〉을 재공연한 작품에서 안나 당비 역을 맡아 처음으로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869년 젊은 극작가 프랑수아 코페의 1막 시극(詩劇) 〈통행인 Le Passant〉에서 음유시인 자네토 역을 맡음으로써 오데옹 극단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배역으로 나폴레옹 3세 앞에서 어전 공연을 해보이기까지 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사라 베르나르는 오데옹 극장에 군병원을 설치했다. 종전 후 다시 문을 연 오데옹 극장은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를 찬미하기 위해 그의 시극 〈뤼 블라스 Ruy Blas〉를 상연했다.

마리아 왕비 역을 맡은 사라 베르나르는 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위고는 베르나르의 목소리를 두고 '황금의 목소리'라는 말을 만들어냈는데, 비평가들은 이와 달리 플루트의 음색을 닮은 '은방울 소리' 같다고 했다. 1872년 오데옹 극단을 떠나 코메디 프랑세즈로 복귀했다. 볼테르의 〈자이르 Zaïre〉(1874)에서 주인공역을 맡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대체로 비중이 낮은 배역만을 맡았다. 마침내 라신의 〈페드르 Phèdre〉에서 주인공역을 맡게 되었는데 비평가들은 이 배역을 맡기에는 격렬한 열정을 표현해내는 자질이 베르나르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라 베르나르가 뛰어난 연기를 해보임으로써 비평가들은 생각을 바꾸어 열렬한 찬사가 담긴 비평을 쓰게 되었다. 위고의 작품 〈에르나니 Hernani〉에서 도냐 솔로 분장한 베르나르의 연기를 보고 위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1879년 코메디 프랑세즈가 런던에서 공연하게 되었을 때 사라 베르나르는 무대공포증이 무섭게 엄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겨내고 〈페드르〉의 2막에 등장해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적인 출세가도가 베르나르 앞에 열렸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여전히 베르나르의 매력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사라 베르나르가 애조 띤 대사를 "감탄할 정도로 민감하고 우아하게" 연기해내지만 "격렬한 장면에서는 어조에 무리하게 힘을 주어 목소리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날카롭고 현대적으로 들린다"고 지적했다. 런던의 관객들 앞에서 거둔 성공으로 베르나르는 오만해져 차분한 분위기로 유명한 코메디 프랑세즈의 홀에서 여러 차례 고약한 성질을 부렸다.

국제적인 성공

1880년 사라 베르나르는 자신의 순회극단을 창설해 곧 국제적인 우상이 되었다.

런던에 정기적으로 모습을 나타냈으며 유럽 대륙과 미국·캐나다 등지로 순회공연을 확대해갔다. 1880년 11월 8일 처음으로 뉴욕 무대에 섰으며 그후 8번에 걸쳐 미국을 방문했다. 1891~93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일주 여행을 했다. 전세계의 관객들이 사라 베르나르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작품은 〈페드르〉 이외에도 2편의 연극이 더 있었다. 소(小)뒤마 작품 〈동백꽃 부인 La Dame aux Camélias〉(일명 춘희[椿姬])에서 구원받은 매춘부 마르게리트 고티에 역과, 인기작가 외젠 스크리브의 〈아드리엔 르쿠브뢰르 Adrienne Lecouvreur〉에서의 주인공역이었다.

1880년대에 이름난 멜로드라마 작가 빅토리앙 사르두의 출현으로 사라 베르나르의 예술생애에 새로운 요소가 생겨났다.

사르두는 사라 베르나르를 염두에 두고 〈페도라 Fédora〉(1882)·〈테도라 Thédora〉(1884)·〈라 토스카 La Tosca〉(1887)·〈클레오파트라 Cléopâtre〉(1890)를 썼으며 그녀를 출연시켜 직접 연극을 감독했다. 또한 베르나르에게 폭넓고 화려한 연기를 가르쳤으며 풍부한 장식과 이국적인 의상, 대사 없이 동작만으로 하는 연기로 극적 효과를 높이려고 했다.

1905년 사라 베르나르는 남아메리카 순회공연중 〈라 토스카〉의 마지막 장면에서 난간에서 뛰어내리다 오른쪽 무릎을 다친 후 1915년에는 다리가 심하게 곪아들어가 절단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애국심이 강했던 베르나르는 제1차 세계대전중에 가마의자에 몸을 의지해 전방 병사들을 위문하겠다고 고집했다. 1916년 마지막 미국 순회공연을 시작해 고통스러웠던 18개월간의 공연을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냈으며 1918년 11월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곧 또다시 유럽 순회공연을 떠났다. 이때 베르나르가 맡았던 배역은 앉아서 연기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극작가 루이 베르뇌이, 모리스 로스탕, 사샤 기트리 등이 그녀를 위해 작품을 써주었다.

사라 베르나르는 기트리의 작품 〈소설의 주제 Un Sujet de roman〉의 의상 리허설 도중 쓰러졌으나 다시 기력을 되찾아 할리우드의 영화 〈예언자 La Voyante〉에 흥미를 느끼고 파리에 있는 자택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던 중 숨졌다.

사라 베르나르는 취미삼아 얼마 동안 조각과 미술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소설 〈귀여운 우상 Petite idole〉(1920)을 출간해 주목을 받았는데, 이 소설에서 직업이 배우인 여주인공은 바로 베르나르 자신의 성공과 야망을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이었다.

사라 베르나르의 자서전 〈나의 이중 인생:사라 베르나르의 회상 Ma Double Vie:Mémoires de Sarah Bernhardt〉(1907)에서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 자서전은 부분적으로 마리 콜롱비에가 쓴 비방적이고 외설스런 내용의 〈사라 바르눔의 회상 Les Mémoires de Sarah Barnum〉(1883)을 반박할 의도로 쓴 것인데, 이 책에서 마리 콜롱비에는 그의 유별난 사생활에 대한 소문과 사실들을 교묘히 이용했다.

연기에 관한 사라 베르나르의 논문 〈연극예술 L'Art du théâtre〉(1923)은 목소리 훈련에 관한 그녀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데, 베르나르는 항상 극중 성격묘사에서 목소리를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