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투쟁

문화투쟁

다른 표기 언어 Kulturkampf , 文化鬪爭

요약 독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마 가톨릭 교회를 국가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1871년경에서 1887년에 걸쳐 격렬하게 벌인 싸움(→ 교회와 국가).

문화투쟁이란 말은 1873년 프로이센의 과학자이며 자유주의 정치가인 루돌프 피르호가 가톨릭교도와의 싸움은 '인간성을 위한 위대한 투쟁의 성격'을 띤다고 선언한 뒤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열렬한 개신교도였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에 충성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1870년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을 포고한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가톨릭 중앙당으로 대표되는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개신교 세력인 프로이센이 제국을 주도하는 것을 불신했고 종종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반대했다.

1871년 7월 비스마르크가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프로이센의 교육과 교회문제를 맡은 문화부 내의 가톨릭 국을 폐쇄하고 11월에는 성직자들이 설교중 정치에 관한 견해를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자 이것이 싸움의 계기가 되었다.

1872년 3월에는 모든 종교학교가 국가감찰을 받도록 했으며 6월에는 종교과목 교사들을 국립학교에서 쫓아냈고 예수회교단을 해체했으며 12월에는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끊었다. 1873년 프로이센의 문화장관 아달베르트 팔크가 공포한 '오월법'은 종교교육, 심지어는 성직자 임명까지도 엄격하게 국가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1875년 독일 전역에서 종교의식을 행하지 않는 민사혼을 의무화함에 따라 이 싸움은 절정에 달했다. 규정을 따르지 않는 교구에는 국가지원을 중단했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직자를 추방했으며 모든 교회재산을 압수해 평신도가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들은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강력히 맞섰고 1874년 선거에서 의석을 2배로 늘려 독일 의회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실리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그는 많은 조치들이 지나쳤으며 가톨릭 중앙당의 저항을 강화시켰을 뿐이라고 인정했다.

사실 그는 사회주의자를 공격하기 위해 가톨릭 중앙당의 지원이 필요했다. 1878년 새 교황이 즉위하자 타협은 한층 쉬워졌다. 1887년 교황 레오 13세가 싸움은 끝났다고 선언할 무렵에는 반가톨릭 법안의 대부분이 철회되었거나 완화된 후였다. 이 투쟁은 국가가 교육과 공식문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으나 한동안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소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