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박태원

다른 표기 언어 朴泰遠 동의어 구보, 仇甫, 丘甫, 몽보, 夢甫, 박태원, 泊太苑
요약 테이블
출생 1909. 12. 7, 서울 수중박골
사망 1986. 7. 10, 평양
국적 한국

요약 소설가. 주로 소시민의 생활을 소재로 한 심리소설과 세태소설을 썼다. 대표작으로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천변 풍경>이 있다.

1930년대에 광고 도표를 문장 속에 삽입하고, 콤마를 사용한 만연체 등의 독특한 문체를 시도했다. 주로 소시민의 생활을 소재로 한 심리소설과 세태소설을 썼다.

호는 구보·박태원. 약국을 경영하는 아버지 용환과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야기책을 좋아하고 글짓는 데 재주가 있었다. 11세 때인 1919년 경성사범보통학교에 들어가 4학년을 마치고, 1923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중퇴하고 집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는 등 불규칙한 생활을 해 건강과 시력이 나빠졌다. 한때 이광수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그의 계몽주의 문학을 따르지는 않았다.

1933년 이태준·정지용·김기림 등으로 구성된 구인회에 이상(李箱)과 함께 가담했으며 특히 이태준과 친하게 지냈다. 중국 소설을 번역하면서 한때 작품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고, 해방 직후 이태준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참여해 소설부 위원을 지냈다. 6·25전쟁 중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시조 시인 조운과 함께 〈조선창극집〉(1953)을 펴냈다. 1956년 한때 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0년 작가로 복위, 1986년 고혈압으로 죽었다.

1965년 실명한데다 1975년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되어서도 아내 권영희의 도움으로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문학세계

1920년대말부터 시〈누님〉(조선문단, 1926. 3)·〈떠나기 전〉(신민, 1926. 12) 등과 단편소설 〈최후의 모욕〉(동아일보, 1928. 12. 13)·〈해하(垓下)의 일야〉(동아일보, 1929. 12. 17~24)·〈수염〉(신생, 1930. 10)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 발표한 단편 〈옆집 색시〉(신가정, 1933. 2)·〈사흘 굶은 봄 달〉(신동아, 1933. 4)·〈오월의 훈풍〉(조선문학, 1933. 8, 10)에서 지식인의 우울을 주제로 했으나, 이것은 당시의 유행을 따랐을 뿐 결정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작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표현기교에 관심을 갖고, 〈오월의 훈풍〉에서는 구절마다 다른 행으로 옮겨 쓴 간결체를 시도했다.

1934년 〈3월 창작평〉(조선중앙일보, 1934. 3. 26~31)에서 "문예감상은 문장의 감상"이라고 하면서, 이제까지의 월평은 이데올로기에 치중했다고 비판하고, '무엇'과 함께 '어떻게' 쓰는가도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창작여록-표현·묘사·기교〉(조선중앙일보, 1934. 12. 17~31)에서는 '어조'와 '문장부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교를 자유롭고 솜씨 있게 써야지 그 기교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단편 〈전말 顚末〉(조광, 1935. 12)·〈비량 悲凉〉(중앙, 1936. 3)·〈방란장주인〉(시와 소설, 1936. 3) 등에서 5행에 걸친 만연체를 썼고, 〈피로〉(여명, 1933. 5)·〈딱한 사람들〉(중앙, 1934. 9) 등에서는 신문광고문과 기호를 대담하게 삽입했다. 그러나 초기의 기법에 대한 관심은 차츰 소시민의 생활을 소재로 한 세태소설로 바뀌었다. 자전적 소설인 〈소설가 구보씨의 1일〉(조선중앙일보, 1934. 8. 1~9. 19)에서 전환의 징조를 보였고, 장편 〈천변풍경 川邊風景〉(조광, 1936. 8~1937. 9)과 단편 〈골목안〉(문장, 1939. 7)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세태소설로 자리잡았다.

첫 작품집인 〈소설가 구보씨의 1일〉(1938)은 미혼이며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설가 구보씨가 서울 거리를 배회하면서 느끼는 내면세계의 방황과 세태풍속을 잘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 〈천변풍경〉은 짧은 이야기 50절로 이루어진 장편으로, 철저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따르고 있다.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나 뚜렷하게 내세우는 사상도 없이, 청계천변에 사는 서민층의 몰락과 가난을 시선에 잡히는 그대로 그려냈다. 해방 전까지 개인의 문제, 지식층의 문제, 현재의 문제에 치중했으나, 해방 후에는 집단의 문제, 민중의 문제, 과거의 문제에 치중해 〈춘보〉(신문학, 1940. 8) 등의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월북 후 북한에서 익산민란을 그린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1, 2부(1963~64)를 발표했고, 1977~86년 북한의 역사소설 가운데 최고걸작으로 손꼽는 〈갑오농민전쟁〉 전3권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