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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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6. 5. 10, 스위스 바젤
사망 1968. 12. 9/10, 바젤
국적 스위스

요약 스위스의 신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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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로마서 강해〉 출간
  4. 정치에 대한 관심
  5. 〈교회교의학〉
  6. 국제적 명성과 영향
바르트(Karl Barth)
바르트(Karl Barth)

개요

20세기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他者性)'을 강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사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도했다(신학적 자유주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에 강력히 저항해 본에서 신학회 의장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바젤에서 기념비적인 저작 〈교회교의학 Kirchliche Dogmatik〉(4권 완성) 집필을 계속했고 500회가 넘는 설교를 했다.

초기생애와 경력

베른대학교에서 교회사와 신약학을 가르친 개혁파 교수 프리츠 바르트와 안나 자르토리우스의 아들로 바젤에서 태어났다.

베른에서 프리 김나지움에 다녔는데 젊은 학생으로서 역사와 군사 문제에 예리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회심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그에게 견신례를 베푼 목사가 신학수업을 받도록 권유해 18세 때 베른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 독일의 베를린·튀빙겐·마르부르크 등지를 거쳤는데, 이 기간에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 아돌프 폰 하르낙과 빌헬름 헤르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네바에서 2년간(1909~11) 부목사로 일했고, 1911~21년 자펜빌(아르가우 주)의 농민·노동자 교인을 위해 목회했다.

1913년 재능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 넬리 호프만과 결혼해 딸 프란치스카(1914)와 후에 신약학교수가 된 마르쿠스(1915), 구약학교수가 된 크리스토프(1917), 1941년 신학생 시절에 등반사고로 죽은 마티아스(1921), 조경사 한스 야코프(1925)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자펜빌에 있는 동안 일생의 친구이자 동료 신학자였던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과 절친하게 교류하면서 19세기 개신교 자유주의의 짐을 지고 있던 당시 교회와 신학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마서 강해〉 출간

사회문제들과 제1차 세계대전에 직면해 스승들의 신학이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 데 충격을 받은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으며, 자기 교회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했다.

신학과 교회의 현실적인 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1919년 〈로마서 강해 Der Römerbrief〉를 출판했고 거듭 6판이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1920년대초 안일에 빠져 있던 신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신정통주의). 그 기간에 개신교 자유주의를 지배했던 합리주의·역사주의·심리주의에 대립되는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을 강조했다.

〈로마서 강해〉는 큰 화젯거리가 되어 대학의 신학자들은 당시 박사학위도 없던 젊은 바르트를 주목하게 되었고, 바르트는 곧 괴팅겐(1921)·뮌스터(1925)·본(1930) 대학교의 신학교수로 임명되었다. 〈로마서 강해〉의 발간이 이룩한 또하나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루돌프 불트만,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에밀 브루너, 게오르크 메르츠 등과 함께 '변증법적 신학 학파'(Dialectical school)를 구성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개신교는 물론 다른 교파에도 영향을 끼친 신학자들로서 〈Zwischen den Zeiten〉이라는 정기간행물을 창간했다. 이 학파의 회원들 사이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토대와 관련해 견해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큰 위기가 닥쳐왔다.

정치에 대한 관심

처음부터 바르트는 국가사회주의와 독일 복음주의교회 내부의 '독일국가교회'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다.

그의 소책자 〈오늘의 신학적 실존 Theologische Existenz heute〉(이 제목으로 나온 연작의 첫 권)을 통해 그는 기본적인 신학적 쟁점들을 분명히 했고, 저항을 하도록 교인들을 규합했다. 반나치 교회 지도자 마르틴 니묄러 및 그밖의 사람들과 함께 바르멘 회의를 조직했고(1934. 5), 거기서 고백교회의 신앙고백 토대가 된 바르멘 선언을 채택했다.

고백교회는 국가사회주의에 반대하지 않았던 기존 교회에 대항하는 '독일 개신교회'라고 주장했다. 바르멘 선언문은 거의 바르트 혼자 완성한 작품이었다. 선언문 첫째 조항은 그의 신학적 입장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해주듯이 우리의 삶과 죽음 가운데서 듣고, 믿고, 순종해야 할 유일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맹세를 거부한 바르트는 본에서 자격 정지당하고 바젤의 신학교수 자리를 받아들였으며, 그곳에서도 나치즘에 대한 싸움을 계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과 전쟁중에 여러 나라 교회와 성직자들을 격려하고 충고하는 편지를 썼고, 스위스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교회교의학〉

바르트는 본에서 시작했던 〈교회교의학〉 저술을 바젤에서도 계속했다.

결국 완성하지 못했으나 전4부(13권)의 9,0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술이다. 새로운 통찰력, 풍부한 주석, 역사적·철학적·교의학적 자료들로 가득 찬 참다운 초교파적 저술인 이 책은 여러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학자들로부터 20세기의 고전적 신학 저술로 호평을 받았다. 매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설교자의 책임에 대한 관심이 그의 모든 저서에 기본적으로 나타난다. 말년에는 바젤 감옥에서만 '죄수 가운데 한 죄수로서' 설교에 전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3제국이 붕괴되기도 전에 바르트는 최초로 패전국 독일과 우호관계를 수립하려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1946년과 1947년 폐허가 된 본대학교에서 이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강의를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18세기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대제에서부터 19세기 독일 제국의 창설자요 첫 총리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제3제국의 창설자 아돌프 히틀러에 이르는 독일의 역사 발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진심으로 바르트는 독일 국민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당신들은 가장 위대한 독일 그리스도교도, 즉 율법과 복음, 세속적 권력과 영적 힘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오해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그로 인해 이교주의(Paganism)는 강력하게 제한 및 견제받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변용해 용인되고 강화되었다." 이어서 바르트는 교회 안팎에서 '반공산주의 십자군'을 주창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해 논쟁을 계속해나갔다. 그는 평화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동서간의 '철의 장막' 철거를 주장하고 소련과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를 동일시하는 것과 핵무기 사용을 반대했는데, 이는 바르트가 공산주의에 애착이 있어서가 아니라 반공주의 속에 깃든 바리사이주의(율법주의와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를 꿰뚫어보았기 때문이었다.

국제적 명성과 영향

초교파적 중요성과 국제적 명성, 영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는 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영국·스코틀랜드·헝가리·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 등지를 여행했고, 1962년에는 미국을 방문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첫 모임 개회식에서 주제강연을 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뒤에 가톨릭 교회 갱신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특별히 로마를 방문했다.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본대학교의 명예이사, 헝가리와 루마니아 대학교 명예교수, 영국 및 해외 성서공회 명예회원, 프랑스 학술원의 인문과학 및 정치과학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이었으며, 영국 국왕이 수여한 자유은공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