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모차르트

다른 표기 언어 Wolfgang Amadeus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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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6. 1. 27,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사망 1791. 12. 5, 빈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겨 전시대를 통틀어 음악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62년 첫번째 음악 여행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1769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보았고 첫번째 이탈리안 오페라를 썼다. 1780년대 후반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코지 판 투테〉등의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35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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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생애와 작품
    1. 초기생애
    2. 초기 연주여행
    3. 이탈리아 여행
    4. 빈·잘츠부르크·뮌헨 여행
    5. 파리·잘츠부르크·뮌헨 여행
  2. 후기생애와 작품
  3. 평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겨 전시대를 통틀어 음악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87)의 아들이다.

그와 그의 누나인 마리아 아나(1751-1829)는 음악적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1762년 레오폴트는 그의 어린 아이들과 유럽 음악 여행을 시작하였다.

모차르트는 첫번째 음악 여행(1762-69)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이탈리아 여행(1769-74)에서 그는 처음으로 요제프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보았고 첫번째 이탈리안 오페라를 썼다. 1775-77년 그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첫번째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어머니가 1779에 죽자, 그는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고, 1781년 정가극 〈이도메네오 Idomeneo〉를 썼다.

1781년 그는 대주교와의 갈등으로 쫓겨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베버가로 옮기고, 비엔나에서 그의 독립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하였고, 〈The Abduction from the Seraglio〉(1782)와 많은 그의 위대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1780년대 후반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돈 조반니 Don Giovanni〉·〈코지 판 투테 Cosi fan tutte〉등의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35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초기생애와 작품

초기생애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작곡가이자 잘츠부르크 대주교 악단의 부악장이었으며 어머니 아나 마리아(결혼 전 성은 페르틀)는 장크트 길겐 출신인 공무원의 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1751년 7월 30일에 태어난 딸 마리아 아나(나네를로 알려졌음)와 볼프강만이 살아 남았다. 모차르트는 요아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라는 긴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지만 테오필루스가 독일어로는 Gottlieb, 라틴어로는 Amad였기 때문에, 후에 그는 자신의 편지나 작품에 W. A. Mozart, 혹은 Wolfgang Amad Mozart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볼프강과 누이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아버지로부터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비록 바이올린 연주자나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볼프강이 태어나던 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처음 출판한 그의 이론서 〈기본 바이올린 교습법 시론 Versuch einer gründichen Violinschule〉은 그가 죽고 오래지 않아 세계 각국어로 출판되었다. 1778년 2월 16일에 레오폴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모차르트의 어린시절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린시절 너는 어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른스러웠으며 네가 클라비어에 앉아 있거나 음악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아무도 감히 너에게 농담조차 걸 수 없었다. 심지어 너무나 엄숙한 너의 연주와 일찍 개화한 너의 재능과 생각에 잠긴 진지한 네 작은 얼굴을 지켜보았던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네가 오래 살 수 있을지 걱정했다."

5세에 볼프강은 미누에트와 소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하게 되었다.

1770년대말경 점차 공개적인 바이올린 연주와 피아노 협연을 그만두었으며 그때 이미 정상급의 대가가 되어 있었다. 레오폴트는 시골 잘츠부르크에서보다 두 자녀의 재능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고 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볼프강과 나네를에게 여러 차례 유럽 여행을 하도록 해 따로 또는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마련했다.

초기 연주여행

1762년에 있었던 첫 연주여행은 뮌헨·빈·프레스부르크·빈을 거쳐 1763년 1월 5일에 잘츠부르크로 되돌아오는 경로였다.

1763년 6월 9일부터 1766년 11월 30일까지 계속된 이 긴 첫번째 유럽 대여행에서 볼프강은 남부 독일의 주요도시를 포함하여 라인란트·브뤼셀·파리(1763~64 겨울에 볼프강은 이곳에서 그의 첫 작품인 K.6~9의 바이올린 소나타 4곡을 출판했음)를 순회했으며 그후 1년 6개월 동안 런던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모차르트 일가의 벗이 되었으며 모차르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그의 동료인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첫 교향곡들인 K.16과 K.19를 작곡했다(쾨헬). 모차르트에 대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763년대의 모차르트
1763년대의 모차르트

1765~66년 겨울을 네덜란드에서 보낸 모차르트는 브뤼셀·파리·제네바·베른·뮌헨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모차르트 일가는 1767년 9월 11일 2번째 빈 여행을 떠나 1769년 1월 5일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빈에서 볼프강은 첫번째 독일 오페레타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 Bastien und Bastienne〉 K.50을 작곡했다(징슈필). 1768년 12월 7일 바이젠호이스 성당의 헌당식을 위해 미사곡과 다른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황제 앞에서 그 작품들을 지휘했다.

그가 잘츠부르크로 돌아오자 언제나 모차르트 일가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인자한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 주교는 빈에서 거절당했던 〈보아라, 바보 아가씨 La finta semplice〉 K.51을 자신의 궁정에서 연주하도록 했으며 볼프강을 콘체르트마이스터로 임명했다(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는 거의 있지 않았으므로 급료는 없었음).

이탈리아 여행

1769년 12월 13일부터 1771년 3월 28일까지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로베레토·베로나·밀라노·파르마·볼로냐·피렌체·로마·나폴리를 차례로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레오폴트와 볼프강은 3개월 동안 볼로냐에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볼프강은 파드레 마르티니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밀라노에서 의뢰받아 작곡한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Mitridate, rè di Ponto〉 K.87은 1770년 12월 26일 밀라노 테아트르 레조 두칼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번이나 재공연되었다.

1771년 3월에 파도바에 간 모차르트는 새 오라토리오 〈구원받은 베툴리아 La Betulia liberata〉 K.118을 의뢰받아 작곡했다. 1771년 8월 13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2번째 이탈리아 여행 중 볼프강은 밀라노에 들러 극적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 Ascanio in Alba〉 K.111을 작곡·지휘했는데 이 작품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과 모데나의 공주 마리아 베아트리체의 결혼식을 위해 의뢰한 곡이었다.

그는 4주 만에 전곡을 완성했으며, 1771년 10월 17일에 있었던 공연은 전날 있었던 요한 아돌프 하세의 오페라를 '무색하게 할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1772년 10월 24일에서 1773년 3월 13일까지의 3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밀라노의 레조 극장 의뢰로 오페라 세리아인 〈루초 실라 Lucio Silla〉 K.135를 작곡하여 1772년 12월 26일 초연했다. 이 오페라는 그의 음악양식 발전에 있어 중요한 경계선을 이루는 작품으로 세부적인 표현과 처리가 적절하며 특히 관현악 처리가 완벽하고 풍부하다.

한편 슈라텐바흐 대주교가 죽고 구르크 주교인 콜로레도의 백작 히에로니무스가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모차르트와 새로 부임한 대주교의 관계는 결코 이전의 대주교와의 관계처럼 친밀하지 못했다. 1772년 4월 29일의 대주교 취임식을 위해 모차르트는 축전 오페라 〈시피오네의 꿈 Il sogno di Scipione〉 K.126을 작곡했다. 밀라노에 있는 동안 그는 〈루초 실라〉에 출연했던 뛰어난 가수인 라우치니를 위해 그 유명한 모테트 〈춤추라, 기뻐하라, 너 행복한 영혼이여 Exsultate, Jubilate o vos animae beatae〉 K.165를 작곡했다.

빈·잘츠부르크·뮌헨 여행

1773년 7월 14일~9월 26일 모차르트 일가는 다시 빈을 방문했다.

모차르트 부자는 황실의 직책을 희망했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빈에서 하이든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770년대초의 많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예를 들면 플로리안 레오폴트 가스만, 카를로스 오르도네스, J. B. 반할 등)들의 음악양식과 마찬가지로 하이든의 양식도 당시 이미 급진적인 변화를 겪은 뒤였다. 새로운 하이든의 양식은 가벼운 로코코 음악으로부터 갑자기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독일의 문예운동을 일컫는 용어 질풍노도는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폰 클링거가 쓴 개성이 강한 연극의 제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혁명'은 독일의 문예운동보다 몇 년 앞서 있었으며 질풍노도는 1767~68년에 이미 하이든과 함께 시작되었다. 1772년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작품 20에서 영향을 받아 6곡의 현악 4중주(K. 168~173)를 작곡했으며 폭풍우와도 같은 그의 〈교향곡 G단조〉 K.183은 그 시대 빈 교향곡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2대가 아닌 4대의 호른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1773년 후반과 1774년 한 해 동안 모차르트 일가는 잘츠부르크에 머물렀는데 볼프강은 작곡에 몰두했다. 그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아마도 〈바순 협주곡 B♭장조〉 K.191과 4곡의 교향곡(K.199~202)으로, 이 가운데 교향곡 A장조 K.201이 가장 유명하다.

모차르트 부자는 1774년 12월 6일부터 1775년 3월 8일까지 뮌헨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볼프강은 오페라 부파 〈가짜 여정원사 La finta giardiniera〉 K.196을 작곡했는데 이것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모차르트가 선제후 밑에서 일하려고만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으나 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1777년 후반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곡을 작곡했는데 그 가운데는 다른 작곡가들이 이미 많이 써먹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 곡을 붙인 매혹적이고 세련된 오페라 〈양치기 임금님 Il rè pastore〉 K.208이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모차르트는 몇몇 그의 미사곡에서 대중적이고 '민속적인' 미사를 시도했으며 그 가운데 〈미사 C장조〉(크레도 미사)가 특히 뛰어났다. 이 밖에도 유명한 5곡의 바이올린 협주곡(K.207·211·216·218·219)을 비롯해 현과 케틀드럼을 위한 매혹적인 〈세레나타 노투르나 Serenata notturna〉 K.239와 길고 웅장한 〈세레나데 D장조(하프너 세레나데)〉 K.250을 포함한 여러 곡의 세레나데와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했다.

후에 모차르트는 〈하프너 세레나데〉를 기초로(케틀드럼을 추가하는 등 여러 가지 변형을 통해)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기이하게도 이 작품은 주목을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쾨헬 번호도 없다. 모차르트는 그의 음악 세계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었던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작품(뒤르니츠 남작을 위한 6곡의 소나타 K.279~284, 3중 협주곡 K.242, 2곡의 협주곡 K.238·246) 등도 작곡했다.

모차르트와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관계는 점점 긴장감을 더해갔으며 1777년 8월의 어느 날 모차르트는 자신의 해직을 청원했다. 8월 28일의 회신에서 대주교는 모차르트 부자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나, 1781년에는 결국 모차르트와 대주교 사이에 파탄이 오고 말았다.

파리·잘츠부르크·뮌헨 여행

1777년 9월에 모차르트와 그의 어머니는 독일과 파리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났으며 모차르트는 파리에서 영구적인 일자리를 얻기를 희망했다.

뮌헨을 거쳐 만하임에 온 모차르트는 그곳에서 필경사이면서 무대 뒤에서 배우에게 대사를 읽어주는 일을 하는 프리돌린 베버의 둘째 딸 알로이지아와 사랑에 빠졌다. 알로이지아는 매우 뛰어난 기교를 가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으며 모차르트는 그녀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파리에서 모차르트는 전혀 돈을 벌지 못했으며 1778년 7월 3일 어머니가 죽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뮌헨으로 이사가 있던 베버가(家)에 들렀으나 알로이지아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다"라고 썼다. 오랜 귀행 여로 끝에 그는 1779년 1월 중순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여행중에 작곡한 많은 곡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6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K.301~306(여기에 7번째 소나타인 K.296이 추가되어야 함)과 2~3곡의 피아노 소나타(A단조 K.310을 포함), 〈하찮은 것 Les Petits riens〉(장 조르주 노베르의 발레를 위해 파리에서 작곡), 콩세르 스피리튀엘의 조제프 레그로를 위한 3곡의 교향곡이 있으며, 이 교향곡 가운데 교향곡 31번 D장조인 〈파리 교향곡〉 K.297만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동안 많은 궁정 음악가들이 잘츠부르크에서 죽자 모차르트는 1779년 1월 이전에 안톤 카제탄 아들가서가 맡고 있다가 공석이 된 궁정 오르간 연주자에 응모했고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1779년 한 해와 1780년 대부분을 잘츠부르크에서 지내면서 모차르트의 음악은 일관된 위대함을 보여주는 첫 시기에 돌입하게 된다. 새로이 나타나는 성숙함은 점차 모차르트 음악에서 그 중요성으로 인정받고 있는 어두운 색조와 더불어 이 시기의 모든 작품에 나타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일련의 교회음악(2곡의 C장조 미사곡, 〈대관식 미사〉 K.317, 〈장엄 미사〉 C장조 K.337 등)과 극적이면서 극히 현대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집트 왕 타모스 Thamos, König in Ägyten〉 K.245(이 작품을 통해 에마누엘 시카네더와 만나게 됨)를 위한 음악, 2곡의 교향곡(이 가운데 〈교향곡 34번 C장조〉 K.338은 당시 오스트리아 교향곡 가운데 수작으로 꼽힘), 〈바이올린·비올라·관현악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장조〉 K.364가 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관현악 세레나데인 〈세레나데 D장조〉(포스트 호른 세레나데, K.320)가 있는데 후일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줄이고 수정하여 하프너 세레나데로부터 유행한 교향곡의 형태로 개작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동안 모차르트는 뮌헨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 정가극 〈이도메네오 Idomeneo〉 K.336과 발레음악 K.367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1780년 11월 초와 1781년 1월 29일에 뮌헨을 방문했으며 이 새로운 오페라는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대주교는 빈에 있었으며 레오폴트와 나네를은 볼프강의 새로운 성공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왔다.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가 절정에 있는 자신의 역량을 과시한 최초의 극음악이었으며 비록 정가극이라는 낡은 형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음악이 너무나 심오·화려하며 관현악 처리 또한 절묘하여 잘츠부르크 궁정 사제인 아바테 바레스코의 진부한 대본을 사용했음에도 극적 효과가 뛰어났다. 뮌헨에서 작곡한 그밖의 작품 가운데에서는 〈키리에 D단조〉 K.341과 13대의 목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B♭장조〉 K.361이 단연 돋보인다.

〈세레나데 B♭장조〉는 목관악기와 특히 클라리넷족(族) 악기(바셋 호른을 포함한)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처리를 보여주고 있다. 모차르트는 전 세대 작곡자들이 그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클라리넷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781년 3월초 모차르트는 대주교의 소환을 받고 3월 16일 빈에 도착했다. 그는 툰 백작 부인과 코벤츨 백작을 비롯한 많은 빈 귀족들의 후원을 얻었으며, 콜로레도 대주교는 자신이 거느린 젊은 작곡가의 영광을 함께 누렸으나 자신의 자택 이외의 장소에서 모차르트가 연주하는 것을 금했으며 하인과 함께 식사하도록 강요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 관계는 곧 극에 다달아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썼고 모차르트는 사임했으나 그후로도 공식적인 해고 통지는 없었다.

후기생애와 작품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와 헤어진 후 완전히 독립하였으며 이로써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이후 공식적인 후원 없이 자립을 감행한 최초의 작곡가가 되었다.

몇 년 간의 기다림의 세월이 지난 끝에 1787년 12월 7일 황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연봉 800굴덴(그의 선임자였던 글루크는 2,000굴덴을 받았음)에 궁정 작곡가로 임명했다. 많은 연주회에서 황제의 갈채를 받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와는 별도로 그는 1778년 황제가 설립한 국립 징슈필을 위한 독일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의 작곡을 청탁받았다.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무리가 음모를 꾸몄지만 1782년 7월 16일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뮌헨에서 빈으로 이사한 베버가와 함께 살게 되었으며 셋째 딸 콘스탄체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782년 8월 4일에 장크트슈테판 성당에서 결혼했다. 콘스탄체에 대해서는 변덕스러운 성격에 악처였다는 등 비판이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으며 모차르트는 일생 동안 콘스탄체에게 애정이 담긴 편지를 썼다.

모차르트는 곧 부르크 극장이나 멜그루베에서 자신의 예약 연주회를 열기 시작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즉흥 연주도 했다. 그의 K.413~595의 위대한 피아노 협주곡은 대부분 이러한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의 구조와 기계적 장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발전과 완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지만 그의 경제사정은 안정적인 때가 결코 없었다.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을 작곡하기 직전에 모차르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장크트슈테판 성당 뒤쪽의 안락한 거처에서 살았다. 그러나 1785~91년에 점차 재정상태가 악화일로를 치달으면서 그는 친구들, 특히 프리메이슨 단원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돈을 빌려쓰게 되었다(모차르트는 열성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음). 모차르트가 가장 부담없이 돈을 빌렸던 사람은 동료 메이슨과 은행가였던 미하엘 푸흐베르크였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후궁으로부터의 유괴(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빚에 대한 부담은 죽을 때까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볼프강과 콘스탄체는 1783년 8월과 9월 그리고 10월에 아버지와 누이 나네를을 방문했으나 그들의 방문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아버지와 누이 또한 콘스탄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1783년 8월 장크트페터 성당에서 미완성인 채 남아 있는 〈미사 C단조〉 K.427의 연민송(Kyrie)과 영광송(Gloria)을 연주했다.

비록 미완성이기는 했지만 미사곡은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일요 연주회에서 보여주었던 바흐와 헨델에 대한 모차르트의 연구가 결실을 맺은 숭고한 작품이다. 빈에 있는 국립도서관의 책임자였던 슈비텐 남작은 후에 하이든과 친교를 가졌으며 젊은 베토벤의 후원자가 되었다.

마지막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을 작곡할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이때에 작곡된 교향곡들은 모두 걸작이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세레나데를 개작한 교향곡 〈하프너 Haffner〉 K.385, 1783년 10월과 11월에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작곡한 〈린츠 Linz〉 K.425, 보헤미아의 수도를 위해 작곡한 〈프라하 Prague〉 K.504, 그리고 마지막 3곡의 교향곡(E♭장조 K.543, G단조 K.550, C장조 〈주피터 Jupiter〉 K.551) 들이 이때 작곡되었다. 특히 마지막의 네 교향곡은 하이든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때까지 작곡된 그 어떤 작품도 따를 수 없는 18세기 교향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레오폴트는 1785년 2월 11일부터 1785년 4월 25일까지 아들 내외와 함께 있으면서 아들의 물질적·예술적 성공을 지켜보았다.

그때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헌정한 6곡의 현악 4중주(K.387·421·428·458·464·465)를 완성하는 중이었으며 그 가운데 마지막 3곡이 하이든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차르트의 집에서 연주되었다. 이때 하이든은 레오폴트에게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당신의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6곡의 현악 4중주에서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제외한 그 어떤 작곡가보다 이 형식을 다루는 데 있어 앞선 완숙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후속 작품 D장조 K.499와 〈프로이센〉에서도 실내악의 중심인 현악 4중주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의 현악 4중주는 모차르트의 현악 5중주(이 가운데 C장조 K.515와 C단조 K.516이 유명하지만 D장조 K.593도 훌륭한 작품임)를 제외하고는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이후 10년 동안 작곡한 대표적인 오페라로는 1786년 5월 1일 빈에서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 K.492,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에서 초연된 〈돈 조반니 Don Giovanni〉 K.527, 1790년 1월 26일 빈에서 초연된 〈여자는 다 그런 것 Così fan tutte〉 K.588이 있는데 모두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에 의한 것이다.

〈여자는 다 그런 것〉은 앞서 두 작품과는 달리 초연에서 실패했는데 요제프 2세의 사망으로 야기된 빈의 혼란이 그 부분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쓴 〈황제 티투스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 K.621은 새로운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을 위해 보헤미아의 의회가 위촉한 작품이다. 시카네더에게 돈과 명성을 가져다 준 〈마술피리 Die Zauberflöte〉(에마누엘 시카네더의 대본) K.620은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으나 청중들은 곧 기계장치까지 동원된 희극적인 요소와 동화의 세계, 프리메이슨적 이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생명을 주는 모차르트의 환상적인 음악에 매혹되었다.

경제적 곤란을 겪는 아내를 구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서 모차르트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떠났다.

그는 제자이자 후원자인 카를 리흐노프스키 공작(뒤에 그는 베토벤의 확고한 후원자가 되었음)과 함께 1789년 4월 8일 빈을 떠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이곳에서 그는 J. S. 바흐의 필사본을 구했음)·베를린·프라하를 방문하고 1789년 6월 4일 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행의 결과로 얻은 재정적 수입은 프랑크푸르트로 떠났던 마지막 연주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형편없었다. 결국 그는 빚더미 속에 빠졌고 결국 그의 재정상태는 파산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791년 여름, 어떤 낯선 사람이 찾아와 〈진혼 미사곡 Requiem Mass〉 K.626을 의뢰하자 모차르트는 신비스런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실 그 사람의 배후에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려는 의도에서 이 일을 꾸민 아마추어 음악가인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 프란츠 하비어 쥐스마이어는 구술을 통한 지시와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하여 발제크에게 주었다.

1791년 늦가을 모차르트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그의 갑작스런 쇠약과 죽음은 곧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낳았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에 발표된 카를 베어의 의학적 연구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이미 어린시절 류마티즘열로 심장에 무리가 있었으며 1791년 12월 같은 병으로 인한 심장의 충격과 과다한 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1791년 12월 5일 빈에서 사망했으며 다음날 묘를 파는 인부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크트마르크 묘지에 묻혔다. 홀로 남은 콘스탄체는 엄청난 빚더미 속에서 절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받았다.

그녀는 후일 덴마크의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결혼했으며 1842년 잘츠부르크에서 죽었다.

평가

주요작품 대부분이 사후에야 출판되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자신의 계파를 만들지 못했다. 비록 1795년경에 이미 그의 오페라들이 독일 전역에 퍼져 있었지만 같은 해 런던에는 그의 작품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낭만주의시대에 모차르트는 바흐와 베토벤을 제외한 그 어떤 음악가도 근접할 수 없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과 심오함, 완전함은 청중들의 찬탄과 기쁨을 자아내고 있다.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고 그중에도 특히 오페라의 등장인물에 성격을 부여하는 능력은 아마도 베르디를 제외한 그 어떤 작곡가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의 유물에 대해 향수를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인류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서양 음악이 이룩한 완전함의 극치를 찾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