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비아 교회

모라비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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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세기에 창설된 개신교 교파.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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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
  2. 영국의 모라비아 교회
  3. 북아메리카의 모라비아 교회
  4. 조직·교리·예배

15세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후스파 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 형제단이 그 기원이다.

역사

16, 17세기에 보헤미아 형제단 운동은 반종교개혁 집단에 의한 박해와 베스트팔렌 조약(1648)에 의한 금지조처에도 불구하고 소위 '감추어진 씨앗'인 충성스런 신자들의 노력을 통해 살아남았다.

당시 개신교는 초기의 활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 17세기 후반 독일에서 경건주의라는 형태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으로 인해 인근의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지하 개신교도들이 더욱 동요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개신교 지역으로 도망쳤고, 경건주의는 여러 귀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젊은 백작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는 감추어진 씨앗을 다시 살려내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1722년 보헤미아 형제단의 전통을 따르는 일단의 가문들이 모라비아를 떠나 작센에 있는 친첸도르프 백작의 땅에 정착해 헤른후트를 건설했다.

헤른후트는 순식간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수많은 사람들과 독일 등지에서 온 경건주의자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베르텔스도르프라는 인근 마을의 루터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했으며, 헤른후트에 있는 집회실에서 정규예배 외의 많은 예배를 보았다.

독실한 루터 교회 신자였던 친첸도르프 백작은 피난민들을 국가교회의 틀 속에 묶어두려고 했다.

그는 종파주의자들로 보이는 피난민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지만 그들이 자신의 교회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교회의 남은 자들임을 알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전통을 부활시키도록 도와주었는데, 그 발전과정은 2갈래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헤른후트 공동체는 모라비아 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기존의 경건주의 모형을 따르는 여러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부분이 루터파 교회이지만 일부 개혁교회도 포함되는 국가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곳의 모라비아교도들은 후대의 관점으로 보아 '디아스포라'로 알려졌고, 그들의 수효는 나중에 한 교파가 되었을 때의 모라비아 교회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1727년 8월 13일 특별 성찬식을 드리면서 형제애로 뭉치는 놀라운 체험을 했고, 이는 공동체 내부의 의견충돌을 없앴으며, 지속적인 복음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헤른후트는 수년 내에 세계적인 그리스도교 선교 프로그램의 중심지가 되었다.

최초의 디아스포라 전도자들은 1727년에 선교여행을 시작했으며, 1732년 최초로 선교사들이 서인도제도의 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헤른후트를 떠났고, 그뒤 20년 이내에 그린란드, 수리남, 남아프리카, 알제리,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와 같은 선교적 관심, 특히 저개발지역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이후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1735년 베를린에서 다피트 니치만이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에 의해 새 모라비아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면서 친첸도르프 추종자들은 한 교파가 되었고, 코메니우스의 손자 야블론스키는 장로교회 목사이면서 보헤미아 형제단 감독이 되었다.

모라비아교도들은 니치만의 지도로 활동을 재개했고, 감독·장로·집사의 세 성직으로 이루어진 직제를 만들었다. 헤른후트파는 시민생활과 교회생활이 신정주의(神政主義) 사회로 통합된 독특한 공동체 양식을 발전시켰고 이는 유럽, 영국, 아메리카에 있는 20여 개 모라비아 공동체의 모형이 되었다. 친교 모임을 통한 그리스도교인 양육, 찬양과 악기 연주로 매일 드리는 예배, 기숙학교, 집중적인 해외선교와 디아스포라 전도가 배타적인 모라비아 마을들의 특징이었다.

이들은 수공예품 생산으로 수익을 올려 자신들의 생계와 선교활동에 쓸 경비를 충당했다.

영국의 모라비아 교회

1734년 아메리카 식민지로 선교활동을 하러 가던 모라비아교도들은 런던에 들러 접촉을 가졌으며, 이는 1738년 잉글랜드·웨일스·아일랜드에 있는 교회의 선구가 되는 페터레인단(Fetter Lane Society)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슬리는 1735~36년 조지아로 가는 도중 배 위에서 모라비아교도들을 알게 되었고, 2년 뒤 영국으로 돌아와서 동생 찰스와 함께 모라비아교도들과 관계를 맺고 1740년까지 함께 활동했다. 그후 감리교와 모라비아교는 각각 독자적인 길을 갔다.

영국인의 기질에 보다 잘 맞는 감리교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한 반면, 모라비아교는 부흥 절정기가 지난 뒤로는 약 40개의 교회와 5,000명 미만의 신도밖에 안 되는 영국 제도의 작은 교파 중 하나로 남았다.

북아메리카의 모라비아 교회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모라비아 교회가 벌인 선교활동은 서인도 제도의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1732). 그러나 그들의 선교 동기가 분명하지 않았고, 유럽에서의 지위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1735년 조지아로 갔다. 친첸도르프는 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고국에서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기대했다. 조지아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들은 1740년 펜실베이니아로 가서 나자렛과 베슬리헴을 세웠다.

친첸도로프가 펜실베이니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소종파들과 루터파, 개혁파 교회 배경을 가진 많은 독일인 이주자들을 하나의 연합교회로 조직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아메리카에서 14개월을 보내며(1741~43), 유럽의 계획을 본뜬 선교계획을 세웠다. 교회의 일치를 이루겠다는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으나 신대륙에 모라비아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 있는 몇몇 모라비아 교회들은 폐쇄적공동체를 이루었으나, 다른 교파와 친교를 나누는 모라비아 교회들도 있었다. 약 1세기 동안 펜실베이니아의 베슬레헴, 나자렛, 리티츠, 노스캐롤라이나의 세일럼(지금의 윈스턴세일럼)에서는 모라비아교도들끼리만 살았다. 베슬레헴 출신의 모라비아교인들은 1753년 최초의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인디언, 인근의 유럽인 이주자, 해외의 원주민을 위한 선교활동과 복음전도 프로그램이 퍼져나갔다. 특히 독립전쟁 이후 교회 밖에서 온 많은 어린이들이 모라비아 교회 기숙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는 교파적 전망보다는 디아스포라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규제되었으며 폐쇄적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규모가 작았다. 교회는 19세기 중엽 국제적인 단체로 다시 조직해 미국인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성을 허락할 때까지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 교회는 대부분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온 이주민들로써 성장했지만,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는 주로 토착민들이 점점 많이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에 컸다.

미국 모라비아 교회는 1771년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북부와 남부 관구로 나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 두 관구는 공동의 해외선교위원회와 신학교를 두었으며, 목회자들의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졌다. 윈스턴세일럼에 있는 세일럼대학과 베슬레헴에 있는 모라비아대학은 모라비아 교회와 관련이 있다. 다른 미국 모라비아 교회 집단인 형제단은 모라비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해외선교에 협력했다.

조직·교리·예배

전세계에 퍼져 있는 모라비아 교회의 지역별 행정단위는 관구별 장로 협의회가 행정을 담당하면서 그것을 통해 자치적으로 운영된다. 10년마다 열리는 대표 총회를 통해 모든 교회가 연결되며, 전체 교회에 공동으로 적용되는 교리와 교회법의 모든 문제를 결정한다.

성직임명권은 감독들에게 있으나 감독 직무는 본래 행정 업무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감독은 자주 행정직에 임명된다. 모라비아 교회는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계율인 성서의 본래 원칙을 고수한다. 사도신경니케아 신조에 모두 동의하므로 독자적인 신조를 따로 만들지 않으며, 개신교 주요교파들이 낭송하는 여러 신앙고백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항목이 이미 언급되었다고 믿는다.

부활절 일출예배 때 사용하는 기도문은 모라비아 교회의 주요신앙내용 요약서로 간주된다. 예배는 전례로 행하며, 전통적인 교회력을 따른다. 성찬식은 1년에 6번 거행하지만 어떤 지방은 매달 거행하기도 한다. 찬송가로 사용하는 곡으로는 독일의 합창곡이 특히 많으며, 그리스도 중심의 모라비아 교회는 부활절을 앞둔 수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