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파

후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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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추종자들.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1414~18)에서 단죄받아 화형당했다.

1415년 그가 죽은 뒤 많은 보헤미아 기사들과 귀족들은 공식 항의서를 발행하고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이 운동의 주요지지자들 가운데는 후스를 계승하여 프라하 베틀레헴 예배당 설교자가 된 스트리브로의 야코베크(1429 죽음), 타보르파(극단적인 후스파로서, 이들이 요새로 삼은 프라하 남쪽 타보르에서 그 이름이 유래함)의 지도자 바클라프 코란다, 프라하에 극단적인 개혁당을 조직한 얀 첼리프스키가 있었다.

후스파는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전례에 체코어를 사용하며 평신도들도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게 했다 양형영성체파라고 했음)(로마 가톨릭교).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스 왕(바츨라프 4세) 때 이 운동은 널리 퍼졌다.

그러나 1419년 벤체슬라스가 죽고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왕이자 벤체슬라스의 이복동생인 지기스문트가 계승했는데, 그는 후스파를 철저히 적대시했다. 후스파는 만일 지기스문트가 일찍이 야코베크가 작성한 ① 설교의 자유, ②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는 성찬식, ③ 성직자들의 청빈과 교회재산의 공유화, ④ 극악한 죄인들에 대한 처벌 등의 프라하 4개 조항을 받아들인다면 그를 승인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프라하를 장악하는 데 실패한 지기스문트는 1420년 후스파에 대해 십자군원정을 선포한 교황 마르티노 5세의 대칙서를 공포했다. 프라하와 그외 도시들의 시(市)당국, 보헤미아의 주력부대 등으로 구성된 후스파 동맹은 지기스문트를 폐위시키고 십자군의 2차례에 걸친 프라하 공격을 물리쳤다.

그뒤 몇 년동안 여러 차례 후스파에 대해 십자군 원정과 전투가 있었으나 굴복시키지 못했다. 1427년 프로코프 홀리가 이끈 후스파는 방어에 치중하기보다는 더욱 혁명적인 정치 계획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또한번 십자군을 조직했으나, 1431년 이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1431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바젤 공의회는 과거에 교황 마르티노 5세가 거부한 바 있는, 동등한 조건에서 후스파와 협상을 벌이는 데 동의함으로써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1433년 후스파 대표단은 바젤에서 3개월을 머물면서 프라하 4개 조항을 논의했다. 그뒤 공의회는 프라하에 사절을 보내 후스파에 대해서 성찬식을 2종류로 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 허용조치로 후스파는 분열되었다. 양형영성체파는 이 조건을 가지고 화해할 의사가 있었지만 타보르파는 그럴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뒤 양형영성체파와 가톨릭 세력은 군대를 합하여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를 물리쳤고, 이로써 타보르파는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그뒤 양형영성체 후스파는 평화협상을 다시 시작하여 1436년 7월 다음과 같은 주요전쟁 대가를 모두 보증하는 것을 골자로 한 평화조약(이글라우 협정)을 얻어냈다.

평신도의 양형영성체 허용, 교회토지의 사회환원(이것은 보헤미아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제권을 무너뜨렸음), 얀 로키카나를 대주교로 삼는 보헤미아 가톨릭 독립 교회 등이 조약의 내용이다. 양형영성체 후스파 교회는 그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으나 분열상태로 남아 있었고, 이따금씩 박해를 당하다가 1620년경 마침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15세기 중엽 보헤미아에서 형제단운동이 시작되어 1467년 독자적인 조직을 세웠다(보헤미아 형제단).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보헤미아 형제단은 루터파 및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와 접촉했다.

그러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프로테스탄트는 진압되었고, 1620년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이 30년전쟁중에 벌어진 빌라 호라산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개혁운동이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보헤미아 형제단의 세력들이 남아 있었고, 1722년 이들 가운데 한 집단이 모라비아로 도피하여 작센에 있는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 백작령에 정착했다. 그뒤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와 헤른후트 공동체를 세웠으며, 이곳에 모라비아 교회를 조직했다(모라비아 교회). 20세기 체코 개신교는 이들의 명맥을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