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얀 후스

다른 표기 언어 Jan Hus
요약 테이블
출생 1372/73, 보헤미아 후시네츠
사망 1415. 7. 6, 콘스탄츠 자유시
국적 체크

요약 14~15세기 체코의 신학자. 주요 저서로는 <교회론>이 있다. 중세에서 종교개혁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활동했으며,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론을 기반으로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에 섰다. 교황 등 로마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사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보헤미안 공동체가 탄생했으며, 그의 개혁활동은 약 한 세기 뒤에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예고이자 그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및 교육경력
  3. 체크 개혁운동의 지도자 시절
  4. 후스와 서방교회 대분열
  5. 마지막 재판
후스(Jan Hus)
후스(Jan Hus)

개요

14~15세기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는 중세에서 종교개혁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활동했으며, 그의 활동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1세기 전에 미리 예고하고 있었다.

얀 후스는 일생을 통해 서방교회 대분열 논쟁에 휘말렸으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후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회론 De ecclesia〉이 있다(로마 가톨릭교).

초기생애 및 교육경력

얀 후스는 남부 보헤미아 후시네츠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에 프라하티체 근처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다. 5년 후 프라하대학교에 들어간 얀 후스는 합창단원이 되어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의 삶은 험난했다. 나중에는 그 시절을 여유있게 회상했지만, 후스가 사제가 된 것이 '좀 넉넉하게 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1394년 대학교를 졸업한 지 2년 후에 후스는 석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 동안 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잉글랜드의 급진파 종교개혁자인 존 위클리프의 실재론적 철학을 가르쳤다.

당시 민족주의 색채를 띠고 있던 체크대학교의 교수들은 위클리프의 견해를 열광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젊은 강사로서 얀 후스의 생할은 행복했지만 나중에는 당시의 삶에 대해 회개했다. 학력을 자랑하고, 화려한 외모와 서양장기를 즐기고, 동료의 잔치와 향연에 참석하는 생활이었다고 돌이켰다. 후스가 어떻게 해서 엄격한 종교개혁가로 '회심'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후스 자신도 거기에 대해 분명히 말한 적이 없다. "주께서 내게 성서를 깨우쳐주었을 때 나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삶을 내 마음에서 떨쳐버렸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이다.

체크 개혁운동의 지도자 시절

당시 체크대학교에서는 봉급을 석사 소지자들에게는 지급하지 않고 몇 명의 전임교수들에게만 주었기 때문에 얀 후스는 생계를 꾸려갈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얀 후스는 사제가 되었고, 프라하 소재의 큰 교회인 베틀레헴 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1402). 그 성당은 점차 일고 있는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로서 라틴어보다는 체크어로 설교했다. 12년간 설교자로 재직한 후 후스는 유명한 개혁운동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1403년 프라하의 대주교가 된 하즘부르크의 젊은 귀족 즈비네크 자이치의 고문이 되었는데, 그 일로 인해 개혁운동의 기초는 더 공고해졌다.

베틀레헴 성당의 업무가 과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얀 후스는 대학에서 계속 가르쳤고 마침내 신학박사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위클리프의 신학저술이 프라하에 소개된 것은 1401년에 이르러서였고 얀 후스도 그때 그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전에는 위클리프의 실재론적 철학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프라하의 히에로 니무스라고 하는 후스의 제자가 위클리프의 〈대화 Dialogus〉·〈삼자대화 Trialogus〉를 들여왔고, 아마 〈성만찬론 De eucharistia〉도 들여온 것 같다. 히에로 니무스는 후스의 동료들이 후스의 개혁을 지지하지 않을 때 그를 강력히 지지했다. 또 콘스탄츠 법정에서 후스를 도우려다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고 후스보다 1년 뒤에 화형에 처해졌다.

1403년 독일인 교수인 요한 휘브너는 위클리프의 작품을 발췌하여 45개 항목을 만들어 이단으로 정죄했다. 독일 교수들에게는 3장의 투표권이 주어졌고 체크 교수들에게는 1표밖에 없었으므로, 독일인들은 손쉽게 체크인들을 누르고 45개 항목을 정통에 도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가장 문제된 것은 위클리프가 잔류설을 주장했다는 점이었는데, 잔류설이란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여전히 물질의 성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교리이다(잔류교리). 또한 위클리프는 성서만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보고 교황을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정죄했다.

위클리프의 급진적 견해를 얀 후스가 모두 수용한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후스는 잔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당 가운데는 위클리프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그의 스승인 즈노이모의 스타니슬라프와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스테판 팔레치 같은 사람이었다. '복음당'에 대한 후스의 태도가 급격하게 바뀐 것은 즈비네크가 대주교로 있던 첫 5년간의 일이었다. 당시 개혁반대자들은 후스를 이기고 드디어 1407년에는 스타니슬라프와 팔레치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 두 사람은 로마 교황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로마에서 돌아온 그들은 신학적 견해를 완전히 바꾸어 개혁을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얀 후스가 개혁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고, 이전의 친구들과도 싸우게 되었다.

후스와 서방교회 대분열

1378년 이래 교회는 크게 분열되었고 재판권도 2명의 교황에게 나누어졌다.

프랑스의 왕은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스 왕(바츨라프 4세)의 도움을 받아 분열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1409년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벤체슬라스는 체크대학교의 교수들 특히 얀 후스를 지지했다. 당연히 대주교와 독일 교수들은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에 격분한 왕은 1409년 대학헌법을 개정하여 체크인에게는 3표를 주고 독일인에게는 1표만 주었다. 그결과 수많은 독일인이 프라하를 떠나 독일에 있는 여러 대학교로 이주했다.

1409년 가을 얀 후스는 이제 체크인들이 지배하는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피사 공의회는 당시 보헤미아에서 권위를 인정받던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를 해임하고, 그에 맞서 있던 대립교황 베네딕투스 13세도 해임한 후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 그때 대주교와 얀 후스의 사이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런데 해임된 교황들이 여전히 서유럽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어서 3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주교와 고위성직자들은 그레고리오에게 충성했으나 얀 후스와 개혁당은 새 교황을 인정했다. 왕의 강력한 조치에 밀려 알렉산데르 5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게 되자 대주교는 새 교황을 매수하여 베틀레헴 성당을 비롯한 모든 성당에서 설교를 금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스는 교황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황청 재판에서 후스는 파문되고 해임되었다. 출두명령을 받았으나 후스는 3명의 대리인을 보내 그를 대변하게 했고 벤체슬라스 왕과 왕비도 서한을 보내 후스의 면죄를 요청했다.

얀 후스가 로마에 가지 않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로마로 가는 도중 후스를 죽일 음모가 있었고, 둘째, 후스는 '로마 교황청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대주교가 추기경들과 교황에게 많은 뇌물을 뿌렸고, 따라서 후스도 마침내 파문되었다(1411). 이단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문당했다. 정죄된 뒤에도 후스는 베틀레헴 성당에서 설교를 계속했고 대학교에서도 계속 가르쳤다.

그러자 대주교 일당은 얀 후스를 잔류설을 따르는 이단으로 기소했다.

그러한 조치는 얀 후스를 지지하는 벤체슬라스 왕 역시 이단으로 몰아가는 격이 되어 마침내 왕은 고위 성직자들을 처벌하는 조치를 취했다. 대주교는 프라하를 탈출한 후 왕의 명령을 갖고 온 사절들을 파문했다. 그리고 프라하 시에 대해 성무금지령(聖務禁止令)을 내렸다. 벤체슬라스는 그 조치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중재위원회를 임명해 자기와 대주교를 판단하도록 했다. 중재위원회는 대주교의 패배를 유도하고 프라하와 후스에 대한 파문을 무효화했다. 후스는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이 땅에 이단은 없다고 선언했다.

한편 대주교는 굴복했으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탈출하여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같은 해인 1411년 더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 싸움은 대립교황 요한네스 23세가 나폴리의 왕 라디슬라스를 상대로 '십자군' 교서를 내리면서 비롯되었다. 나폴리의 왕은 해임된 그레고리오 12세의 지지자였고 요한네스를 로마에서 내몰았던 인물이다.

요한네스의 교서는 모든 군주들에게 칼을 잡고 "교회와 우리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에 따르면 "애통해 하고 있던 모든 죄를 사한다"고 약속했다. 또한 요한네스는 그레고리오 12세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재정의 마련을 위해 대사령 판매를 명령하기도 했다. 그처럼 형제를 죽이는 전쟁을 촉구하고 '부정한 것을 거래하는' 것을 보다 못한 얀 후스는 요한네스의 교서가 비그리스도교적이며 신성모독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후스는 벤체슬라스 왕의 지원을 잃었다. 왕은 대사령 판매의 수익금을 나누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백성은 대사령 판매에 대항하여 궐기했고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집회를 열었다. 그러자 왕은 양편의 대표자를 자기 성으로 불러들여 칙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아무도 대사령 판매를 반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대사령을 반대하던 3명의 젊은이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그리하여 개혁운동에 최초의 순교자가 생겼다.

얀 후스에 대한 재판이 재개되어 교황청 법정은 그를 출두불응을 이유로 파문했으며, 프라하를 비롯해서 후스가 거주하는 모든 도시는 성무금지령에 처한다고 선언했다.

성무가 금지된 지역에서는 교회의 성사를 베풀 수 없었다. 도시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얀 후스는 1412년 10월 자진해서 프라하를 떠났다. 후스는 보헤미아 남부에 있는 친구의 성을 주된 거처로 삼고 2년 동안 저술에 열중했다. 후스의 적들 특히 스타니슬라프와 팔레치는 수많은 글을 써서 그를 논박했고 그 역시 강렬한 어조로 응수했다. 그때 쓴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서가 〈교회론〉이다.

그밖에도 얀 후스는 체코에서 많은 양의 논문을 썼다. 그 가운데는 〈신앙해설 The Exposition of the Faith〉·〈십계명 해설 The Exposition of the Decalogue〉·〈주기도문 해설 The Exposition of the Lord's Prayer〉이 있으며, 〈주석 Postilla〉이라는 이름이 붙은 설교집이 있다.

마지막 재판

교회분열이 계속되는 가운데 1411년 독일의 새 왕으로 선출된 헝가리의 지기스문트는 교회의 일치를 회복한 왕이라는 영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요한네스에게 압력을 가해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분열을 최종적으로 해결하고 이단문제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다. 지기스문트는 사절을 보내 얀 후스를 공의회에 초청했다. 물론 후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꺼림칙한 초청이었다. 그러나 요한네스가 벤체슬라스 왕이 성무금지령에 불복한다고 비난하고, 지기스문트는 콘스탄츠까지 후스의 왕복 여행길을 안전하게 호위한다고(어떤 결정이 내려지든지) 설득했기 때문에, 마침내 후스는 가기로 했다.

얀 후스는 1414년 10월 11일 콘스탄츠로 떠났다. 그러나 후스가 호위를 받은 것은 11월 3일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 2일이 지나서였다. 교황이 성무금지령을 정지시켰기 때문에 후스는 도시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1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후스는 교황거처로 유인되었고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의 지하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후스의 적들, 특히 교황 대리인 카우시스의 미카엘과 스테판 팔레치가 그를 법정에 끌어내어 위클리프를 따르는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성공했다.

얀 후스의 적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단이 공의회에 의해 임명되어 그를 심문했는데, 그것은 불법이었다. 후스는 기소된 것이 아니라 호위를 받으며 자유인으로 콘스탄츠에 왔기 때문이다. 또한 후스는 전체 공의회에 자기 신앙을 소개할 기회를 약속받았었다. 그러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후스의 제자이며, 당시 후스 경호를 맡은 체크 귀족의 부하인 믈라도노비체의 페트르가 이 재판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처음에 심판관들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임의로 요약한 45개 항목을 근거로 얀 후스가 이단임을 설득하려 했으나 오히려 후스의 견해가 반영되어 의도가 빗나갔다.

얀 후스는 모든 비난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그래서 팔레치는 후스의 〈교회론〉에서 임의로 발췌하여 42개항목을 만들었고 나중에 20개 항목을 추가했다. 그 사이에 공의회의 분위기가 3명의 교황 모두에게 나쁘게 돌아갔다. 그러자 요한네스는 1415년 3월 21일 콘스탄츠를 빠져나왔고 공의회를 불법적인 것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스스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교회의 우위에 있음을 선언하고 교회를 재조직했다.

그리하여 얀 후스의 재판은 전체 공의회의 총회 앞에서 추기경이 주도하는 새로운 위원회로 넘겨졌다. 최종적으로 30개 항목(물론 그것은 그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임)이 그 앞에서 읽혀졌다. 후스는 그 항목들이 자기의 가르침과 관계없다고 하며, 입장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마침내 후스는 위클리프파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사제직을 박탈당했으며, 정죄하는 의식을 거쳐 불명예스럽게 사제복을 벗고, 그의 영혼은 악마에게 넘겨졌다. 후스는 스스로 자기 영혼을 하느님에게 맡겼다. 후스는 사형집행을 위해 세속 군인에게 넘겨졌고 같은 날 도시 교외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불꽃이 몸을 삼킬 때까지 얀 후스는 큰 소리로 기도했다.

화형당하는 후스
화형당하는 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