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나

메디나

다른 표기 언어 Medina
요약 테이블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헤자즈 지방
인구 1,545,000명 (2022년 추계)
면적 589㎢
대륙 중동
국가 사우디아라비아

요약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헤자즈 지방에 있는 이슬람교 제2의 성지. 마호메트가 살기 전 이 도시의 이름은 야스리브였으나 마호메트 이후 마디나트라술알라 또는 알마디나알무나우와라로 바뀌었다. 주민은 아랍어를 쓰는 이슬람교도들로서 대부분 수니파에 속한다.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업이 주요수입원이며 과일·채소·곡식 재배에 바탕을 둔 농업이 이루어진다.

목차

접기
  1. 자연환경
  2. 도시형태
  3. 주민
  4. 경제
  5. 역사
메디나(Medina)
메디나(Medina)

마호메트가 살기 전 이 도시의 이름은 야스리브(Yathrib)였으나 마호메트 이후 마디나트라술알라(Madinat Rasul Allah:신의 사자의 도시) 또는 알마디나알무나우와라(al-Madinah al-Munawwarah:가장 영광스러운 도시)로 바뀌었다.

자연환경

메디나는 메카 북쪽으로 401km 지점, 홍해에서 내륙으로 136km 들어간 비옥한 오아시스에 자리잡고 있다. 고도는 해발 625m이다. 동쪽 지역 일부는 1207년 화산폭발로 형성된 광활한 용암 벌판과 인접해 있으며 다른 3면은 헤자즈 산맥의 건조한 구릉지대에 둘러 싸여 있다. 이 구릉지대에서 가장 높은 우후드 산은 오아시스 위로 600m 이상 솟아 있다.

도시형태

성지 메디나는 이슬람교도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공항이 성지 경계선 바로 밖에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여객기가 착륙할 때 메디나의 전경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터키 지배시대에 작은 군용비행장이 있었던 남쪽의 수비대 막사 부근 술타나에는 오늘날 왕의 궁전과 넓은 부속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정복한 초기 이슬람 세계의 유명한 정복자 암르 이븐 알 아스의 무덤 유적도 있다. 우후드 산 꼭대기에는 아론의 무덤이 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종교적인 특색을 지닌 장소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쿠바 사원이다.

쿠바 사원은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사원으로 마호메트메카 정복 계획을 계시받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알리마에는 기도하는 방향이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바뀐 것을 기념하는 투키블라스(Two Qiblahs) 사원이 있다. 마호메트가 부상을 입었던 우후드 전투(625)에서 전사한 마호메트의 삼촌 함자와 그 동료들의 무덤이 있으며, 우후드 산에는 마호메트가 전투중에 피신했던 동굴이 있다.

마호메트가 전투하러 가기 위해 갑옷을 입은 곳, 가는 도중 쉰 곳, 참호전을 위해 깃발을 올린 곳에 각각 기념사원이 세워져 있으며, 마호메트가 메디나 주위에 파놓은 참호도 그대로 있다. 참호에는 술탄 아브둘메시드 1세 시대(1839~61)의 큰 화재로 생긴 돌무더기가 버려져 있다. 이 모든 곳은 메디나를 찾는 이슬람교도들의 경건한 순례장소로서 비(非)이슬람교도는 출입할 수 없다. 또한 메디나 시에는 1961년에 세워진 이슬람대학교가 있다.

그러나 모든 순례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곳은 마호메트가 손수 지은 예언자의 사원이다.

여러 칼리프들이 잇따라 증축과 개축을 거듭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알 왈리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시대에는 확장 공사로 마호메트 부인들의 침실이 소실되었다. 사원은 1256년과 1481년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손상되었으나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열성적인 군주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술탄 셀림 2세(1566~74 재위)는 금을 입힌 모자이크로 사원 내부를 장식했고 술탄 무하마드는 1817년 둥근 지붕을 올렸으며 1839년에는 이슬람 색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녹색을 사용해 사원을 칠했다.

술탄 아브둘메시드 1세는 1848년 사원을 사실상 재건하는 공사를 시작해서 1860년에 완공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개축 공사였다. 그후 1948년 아브둘 아지즈 왕이 현대식 증축 계획을 세우고 1953~55년 사우드 왕이 공사를 완료했다. 현재 사원 북쪽에는 열주(列柱)로 둘러싸인 새로 세워진 궁정이 있는데, 19세기 건물과 양식은 같지만 근처 구릉지대에서 나는 돌 대신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다. 예전에 여성 순례자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감옥은 허물어져 있으며 사원 남쪽 본관은 수리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본관에는 마호메트의 집이 있었던 자리를 표시하는 철제 장식물이 3개 있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그 안에 각각 마호메트의 무덤(푸른색 큰 돔이 있는 장식물), 첫번째 두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무덤, 마호메트의 딸인 파티마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남쪽 주랑(柱廊)은 최초의 사원 건물이 세워졌던 야자 숲(알라우자)을 상징하는 장식물로 꾸며져 있다.

메디나는 지다와 리야드를 비롯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른 도시들처럼 빠른 속도로 현화되지는 않았다.

도시 개발을 통해 옛 도시 성벽은 완전히 철거되었고 역사적인 지역에는 오늘날 순례자들의 숙소가 있는 야영지(알마나크)가 들어섰다. 아부지다 분류(奔流) 하상(河床) 너머에 있는, 이전에 투르크인들이 철도역과 역사(驛舍)를 세웠던 상업지역에는 안바리야 지구가 자리잡고 있다. 옛 도시 성벽의 기반이 진흙과 돌무더기로 덮인 지면보다 낮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나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유적을 조사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다.

또한 폐허가 된 옛 유대인 마을 유적지에 대해서도 고고학적인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은 톨레미와 스테파누스 비잔티우스가 라스리파 또는 이아스리파로 지칭했던 야스리브로, 이 이름은 이슬람 시대까지 오아시스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관심을 끄는 고분들도 여러 개 있다. 알바키야(바키알가르카드) 이슬람 공동묘지의 경우, 1925년 와하비파(派)에게 점령되었을 때 성인(聖人)들의 무덤에 있던 모든 돔과 장식물이 없어졌으나 그뒤 폐허가 된 묘지는 말끔히 정리되어 옛 비석 대신 단순한 콘크리트 묘석들이 세워지고 주변은 담장으로 정돈되었다.

주민

주민은 아랍어를 쓰는 이슬람교도들로서 대부분 수니파에 속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보통 순례를 마친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에 정착한다. 농업과 도기 제조가 중요한 생활수단이다.

경제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업이 주요수입원이며 과일·채소·곡식 재배에 바탕을 둔 농업이 이루어진다. 메디나는 특히 대추야자로 유명하며 대추야자 열매를 가공·포장해서 수출한다.

20세기초 터키에게 지배를 받던 때부터 사용한 관개용 자동 펌프가 사실상 재래식 두레 우물을 대신하고 있다. 식수는 오아시스 남쪽 끝에 있는 샘에서 송수관을 통해 공급된다. 별로 깊지 않은 땅속에서 충분한 지하수가 공급되며 여러 와디가 메디나 가까이에서 합류해 겨울 우기에는 급류로 쏟아져 들어온다. 서쪽 산맥에서 발원한 와디 알아키크와 남쪽의 앗타이프 지역에서 흘러 오는 와디가 대표적이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는 금속세공·보석·무기로 유명했지만 이러한 공업들은 소규모로 이루어졌을 뿐이며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공업은 농업 기술에 관계된 것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는 자동차 수리, 벽돌·타일 제조, 목공, 금속세공 등의 공업이 행해지고 있다.

1908~16년 메디나는 헤자즈 철도를 통해 다마스쿠스와 연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파괴된 이 철도의 재건이 계속해서 검토되고 있으나 정부는 아직 공사에 착수하지 않고 있다. 아스팔트 도로로 지다·메카·얀부(홍해에 있는 메디나의 항구)와 연결된다. 또다른 도로로 북쪽의 헤자즈를 거쳐 가까운 알질라다인 공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중심부로 가는 항공편과 요르단·이집트·시리아로 가는 노선을 이용할 수 있다.

역사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부터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나 메디나 최초의 역사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들어온 때는 135년경 로마 황제 하드리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메디나로 들어온 무렵으로 추측된다. 그무렵 아우스와 카즈라지의 아랍 부족들이 오아시스를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나 400년까지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메디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집단은 유대인들이었다.

400년에 식민지 메디나를 방문한 예멘의 시바 왕 아비 카리바 아사드는 유대인 랍비의 지식과 가르침을 듣고 유대교를 받아들여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국교로 삼았으며 그밖의 우상숭배를 억압했다. 1949년 이스라엘로 이주한 예멘 태생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때 개종한 아랍인들의 후손이다.

622년 9월 20일 메카로부터 선지자 마호메트가 도피해옴으로써 메디나 역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히지라(hijrah)로 알려진 마호메트의 이 도피는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었다. 그후 이슬람교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처음에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곧 헤자즈에 있는 그들의 마을에서 유대인을 모두 쫓아냈다. 메디나는 꾸준히 영토를 넓혀가는 이슬람 국가의 행정수도가 되었으며 661년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그 위치를 지켰다.

683년 칼리프의 약탈을 당한 후 메디나 군주들은 어느 정도 누리고 있던 독립에 위협을 받았다. 그들은 메카 샤리프의 침략을 받거나 이따금 이집트의 섭정을 받기도 했다. 1517년 이후 이집트를 정복한 투르크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으나 점차 지배가 약화되어 거의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가 1804년 이슬람교의 와하비파에 점령되었다.

1812년 투르크-이집트 연합군이 메디나를 다시 점령한 후 1912년 이븐 사우드가 이끄는 와하비 운동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투르크인들이 메디나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다. 투르크인들은 1904~08년 오스만 제국을 강화하고 하지(hajj:가까운 메카 성지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의무적인 순례)를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서 메디나로 가는 헤자즈 철도를 건설했다.

투르크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중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이븐 알리가 영국 관리 T.E. 로렌스(아라비아 로렌스)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철도를 폐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후 후세인은 이븐 사우드와 충돌하게 되었고 1925년 메디나는 사우드 왕조에게 점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