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야슈 1세

마티야슈 1세

다른 표기 언어 Matya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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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43. 2. 24, 트란실바니아 콜로스바르
사망 1490. 4. 6, 빈
국적 헝가리

요약 헝가리의 왕(1458~90 재위).
(영). Matthias Ⅰ. 별칭은 까마귀왕 마티야슈(M대체이미지ty대체이미지s Corvin). 본명은 M대체이미지ty대체이미지s Hunyadi.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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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왕위에 오름
  3. 대외적 성공
  4. 마티야슈 1세에 대한 평가

개요

수십 년에 걸친 봉건적 무정부상태 이후 왕위에 올라 재정·군사·사법·행정 개혁을 통해 헝가리를 재건하려 했다.

그의 별명은 그의 방패에 새겨진 까마귀(라틴어로 corvus) 문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왕위에 오름

장군 야노슈 후냐디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와 형이 죽은 뒤 막대한 토지와 함께 투르크 정복자들과의 전쟁을 통해 연대기 작가들의 칭송을 받았던 위대한 가문의 이름을 상속받았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유복자 왕 라슬로가 죽은 후 그의 삼촌인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를 비롯한 여러 경쟁자들이 헝가리 왕위계승 권리를 주장했으나, 1458년 1월 부도(Buda)와 페슈트(Pest)에서 열린 전국의회는 마티야슈를 왕으로 뽑았다. 이는 중세 헝가리 왕국에서 왕가의 후손이 아니고 왕실과 인척관계가 없는 귀족 출신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일로서 당시 이웃 보헤미아 왕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일반적인 왕위계승의 관례에 벗어난 것인 데다가 합스부르크 왕조(부분적으로는 폴란드의 야기에우오 왕조)의 계획과는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두고 두고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이 사건은 체코와 헝가리에서 '신분질서'의 우위성과 의회제도, 중앙집권적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주로 반대파 귀족들과 외국의 왕권 경쟁자들이 되풀이해 벌이는 공세에 맞서 자신의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그후 마티야슈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영토를 합병한 투르크 침략자들을 남쪽 국경에서 물리쳤다. 그리고 병력부족을 감안해 투르크인들에 대한 방위체제를 재편했다. 그는 국가수입을 늘리고 군대와 전투 형태를 근대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첫번째 조치는 재정 및 세제 개혁(1467)으로 대토지소유자들이 누린 특별면세 혜택을 없앴다.

결국 몇 년 후 국고는 짜임새있는 관료기구의 관리를 받게 되었으며 '특별세금'을 정기적으로 징수했다(원래 이 세금은 주로 투르크의 침략위협 같은 긴급상황이 일어났을 때 걷기로 했던 것임). 그결과 국가수입은 상당한 액수에 달했으나 무거운 세금이 대부분 농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재정개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란이 일어나 행정을 마비시키고 때로는 마티야슈의 통치까지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외국 세력들이 뒤에서 부추긴 이같은 반란에는 국왕의 오랜 고문관들도 일부 가담했다. 그러나 마티야슈는 그때마다 힘과 외교적인 수단으로 반란을 진압해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통치력을 재정립하거나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근대 절대주의의 초기 대변자로 규정하기도 하지만 이는 약간 무리한 표현이다. 그는 영지를 소유한 상층 귀족에 맞서기 위해 하층 귀족의 영향력을 높였고 봉건적 무정부상태를 억누르거나 최소한 완화시키려 했으며, 상인과 소(小)지주들과 심지어 농민들까지도 그들의 영주와 관련된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나서서 보호해주었다.

그는 주로 각료들과 왕실비서를 비롯한 몇 가지 관직의 행정적 역할을 높이는 방식을 써서 지방의 자율성을 해치는 일 없이 중앙정부의 제도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는 법학자들에게 성문법 제정이라는 대사업을 맡겼다. 1486년에 공표한 국왕의 포고령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법률의 기본원리들을 집약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같은 성문법 제정은 상비군의 발전과 더불어 봉건국가에서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뜻했다.

대외적 성공

대외정치·외교·전쟁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마티야슈는 자신의 권위와 자기 나라의 입장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1470~80년대에 더욱 활발한 외교를 수행했다. 교황청 및 베네치아, 나폴리 등의 이탈리아 국가들과 항상 외교관계를 유지했고 프랑스, 부르고뉴, 스위스, 그리고 독일의 많은 국가들과도 거듭 사절을 교환했으며, 나중에는 러시아와 때로는 페르시아 및 이집트와도 정기적인 접촉을 가지려고 애썼다. 마티야슈 외교의 주요목적은 현재나 미래의 경쟁·적대 세력에 대항하는 동맹체제를 만드는 데 있었던 듯하다.

그의 외교활동은 외교정책의 목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마티야슈는 1463년 보스니아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한 뒤 보헤미아 왕국을 점령하려고 했는데 이는 커다란 실책이었다. 폴란드의 야기에우오 왕조가 여기에 개입하면서 분쟁이 일어나 10년간의 전쟁 끝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결국 보헤미아 왕위는 부아디수아프 2세에게 돌아갔으며 마티야슈는 모라비아슐레지엔(실롱스크)의 왕으로 즉위하여 그 지역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마티야슈는 재위기간 내내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끊임없는 경쟁을 벌였다. 그는 황제를 회유 또는 강요하여 헝가리 왕권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도록 만들려고 거듭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폴란드-보헤미아 전쟁에 뒤이어 마티야슈는 프리드리히의 주요 권력기반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던 황제 적대세력의 지원을 받아 장기간의 잇달은 군사적 승리를 거둔 끝에 마티야슈는 합스부르크 가문 보유지 가운데 상당 부분과 빈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같은 전과를 올렸음에도 독일 제국이나 중부 및 서부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지는 못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은 부르고뉴에서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차지한 정복지는 1490년 마티야슈가 죽기 전까지는 헝가리의 소유였으나 이후에는 모두 다른 나라에 넘어갔다.

마티야슈 1세에 대한 평가

교황청 및 이탈리아 국가들과 마티야슈가 맺은 정치적 관계는 투르크 전쟁의 이해관계와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헝가리 내의 고위 성직자 자리의 배분과 관련된 헝가리 왕들의 특권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었다. 이때문에 교회와 헝가리 왕국의 관계는 복잡했다. 마티야슈가 나폴리의 왕녀인 아라곤의 베아트리체와 2번째 결혼을 한(1476) 이후 마티야슈의 외교정책은 이탈리아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했다.

피렌체와 밀라노 같은 이탈리아의 문화중심지와 교류를 계속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탈리아의 예술과 인문주의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을 알 수 있다. 마티야슈는 당대인들이 이야기했듯 '뮤즈(학문과 예술의 여신)의 친구'라는 평판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각국어와 고전 라틴어, 근대 인문주의 사상, 고대 서적들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새로운 예술과 과학에 대한 후원은 모두 어린시절부터 마티야슈에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공부했고 유명한 인문주의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독서와 학습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또한 모든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상당량의 소장품(유명한 코르비나 소장품)을 모았다. 대다수 동시대인들이 그랬듯이 그는 점성학(占星學) 같은 당대의 반과학적인 신앙을 믿기도 했으나 많은 순수과학을 후원했으며, 자신의 궁정으로 초대한 철학자들의 토론에 열심히 참여했다.

적이나 친구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마티야슈는 고매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헝가리를 강화하고자 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이름은 이후 투르크의 점령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억압으로 고통받던 시대의 헝가리인들에게는 힘과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정치가와 군인들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학자들도 그를 거룩하게 여겼고, 또한 무거운 세금에도 불구하고 왕이 죽은 몇 년 후 그가 다시 일어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세금을 더 내겠다고 했다는 민중들 역시 그를 숭상했다.

이는 마티야슈가 죽은 후 헝가리의 국력이 전반적으로 쇠퇴한 데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티야슈는 죽었다. 정의도 사라졌다"고 하는 일반 사람들의 속언(俗諺)에서도 그 까닭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