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터

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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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7. 4. 5, 잉글랜드 에식스 업턴
사망 1912. 2. 10, 켄트 월머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외과의사, 의학자로 방부의학(防腐醫學)의 창시자, 예방의학의 선구자.
Sir Joseph Lister, Baronet이라고도 함(1883~97).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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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교육
  3. 방부제 연구

개요

그의 방부제의 사용에 기초한 방법은 이제 사용되지 않지만 수술상처에 세균침입의 여지를 남겨서는 안된다는 원칙은 오늘날에도 외과술의 기초가 되고 있다.

1883년 준남작이 되었고 1897년 귀족이 되었다.

교육

리스터는 프렌즈 교파 또는 퀘이커 교파의 일원이었던 조지프 잭슨 리스터와 이사벨 해리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포도주 상인이자 아마추어 물리학자, 현미경학자인 리스터의 아버지는 근대적인 무색(색에 의해 달라지지 않는) 현미경을 발견해 왕립학회의 연구원으로 선출되었다. 리스터는 아버지로부터 자연사와 현미경의 사용에 대해 배웠으며 자연사와 과학교육을 중시한 두 퀘이커 기관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그는 비교해부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6세가 되기 전에 외과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교양과정을 마친 뒤 1848년 10월 의학부에 등록했다.

총명한 학생이었던 그는 1852년 우등으로 의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왕립외과협회의 회원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의 상주 외과의사가 되었다. 1853년 가을 에든버러로 여행갔다가 당시 가장 위대한 외과의사였던 제임스 시미의 조수가 되었고 1856년 10월 에든버러 왕립진료소의 외과의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4월 시미의 큰 딸과 결혼했다.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리스터는 스코틀랜드의 성공회에 가입했다. 자식은 없었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아내는 리스터의 전문가로서의 삶에 동참했다.

1859년 글래스고대학교 외과 흠정교수직으로 뽑혔으며, 1861년 8월 글래스고 왕립진료소의 외과의사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외과병동의 책임자가 되었다.

진료소장은 새 병동에서는 병원병(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의한 혈액감염으로 현재는 수술패혈증이라고 함)이 훨씬 줄어들기를 바랬으나 그 희망은 헛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리스터는 그가 근무한 남자사고병동에서 1861~65년 사이에 절단환자 중 45~50%가 패혈증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방부제 연구

이 병동에서 리스터는 방부법에 관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의 초기 저서 가운데 많은 부분이 혈액의 응고 메커니즘과 염증 1단계에서 혈관의 역할을 다룬 것이다. 이 연구들은 상처치유와 직접 연관된 것으로 모두 현미경에 의존했다. 리스터는 깨끗하게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모로 시도해보았으며, 만연된 패혈증에 대한 이론들을 세웠다. 그는 '미아즈마'(나쁜 공기에 의한 직접적인 감염)라는 일반적인 개념 대신 꽃가루와 같은 먼지에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먼지들이 살아 있는 물질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것은 사실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가 1865년에야 세균학자 루이스 파스퇴르의 연구를 접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파스퇴르는 발효부패에 관한 실험을 통해 미생물이 발효와 질병을 일으킨다는 이론에 도달했다. 현미경에의 친숙함, 발효과정, 염증과 혈액응고라는 자연적인 현상은 리스터로 하여금 파스퇴르의 이론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했다.

처음에는 병원균이 오로지 공기에 의해서만 운반된다고 믿었는데 그 그릇된 견해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외과적으로 깨끗이 치료할 수 있는 방법만을 썼기 때문이다. 상처와 공기 사이를 방부제로 차단시켜 수술부위가 의사의 손이나 기구에 의해 감염되는 것을 막았다. 리스터는 석탄산이 방부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석탄산은 불쾌한 냄새가 나는 하수구를 청소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으며 1863년부터는 창상 처치약으로 권장되고 있었다(→ 색인 페놀). 1865년 8월 12일 자신의 새로운 방법에 처음으로 성공했고, 1867년 3월에는 일련의 사례들을 출간했다.

결과는 극적이어서 1865~69년 그가 근무하던 남자사고병동에서는 수술사망률이 45%에서 15%로 떨어졌다.

1869년 리스터는 시미의 뒤를 이어 에든버러 왕립진료소의 임상외과 과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7년을 보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독일이 방부제 실험을 한 결과 그의 진료소는 외국에서 온 방문객과 열성적인 학생들로 붐볐다. 1875년 리스터는 독일의 주요한 외과연구소를 돌아보았고, 다음해 미국을 방문했으나 보스턴 시와 뉴욕 시를 제외하고는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리스터의 업적은 잉글랜드와 미국에서 많은 오해를 받았는 데, 반대 의견들은 '석탄산치료'에 대해서가 아닌 미생물병원설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개업 외과의사들은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리스터의 의견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고, 방부법이 주요한 발전을 가져왔다는 보다 분명한 증거를 기대했다. 리스터는 자신의 통계를 출판하기를 거부했다. 에든버러는 의학교육에서 이전에 누렸던 명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지방도시로 간주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리스터는 자신의 연구가 일반적으로 수용되려면 런던에서 먼저 확신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킹스 칼리지의 임상외과 과장으로 제의를 받았던 1877년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다. 리스터는 그해 10월 26일 킹스 칼리지 병원에서 골절된 무릎뼈를 철사로 고정시키는, 혁신적인 수술을 처음으로 해냈다. 당시에는 생명에 위험이 없는 단순골절이 종종 전신적인 감염과 사망을 초래하기도 하는 복합골절로 전환되기도 했었다.

리스터의 제안이 널리 공표되면서 큰 반발을 일으켰으나, 방부상태에서 이루어진 그의 수술이 완전히 성공함으로써 전세계의 외과계는 그의 방법이 외과수술의 안전성을 크게 증가시켜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개척자들에 비해 리스터는 운 좋게도 당대에 자신의 원칙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았다. 아내가 사망한 다음해인 1893년에 은퇴했다. 1883년 준남작이 되었고, 1897년 림리지스의 리스터 남작이 되었으며, 1902년에는 메리트 훈장을 받은 12명 중 1명이 되었다.

일생을 통해 신사적이고 수줍음을 타며 겸손했지만, 신이 자신을 인도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에는 완고했다. 그는 사회적인 성공이나 금전적인 보상에는 흥미가 없었다. 잘생긴 용모와 강건한 몸매에 피부색이 깨끗하고 담갈색의 눈에 은빛 머리카락을 지녔다. 그러나 사망하기 전 몇 년 동안은 거의 완전히 눈과 귀가 멀어 고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