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다른 표기 언어 Max Reinha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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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3. 9. 9, 빈 근처 바덴
사망 1943. 10. 31, 뉴욕 시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연극연출가.
본명은 Max Goldmann.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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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연극 입문
  3. 전성기
  4. 귀향과 망명
  5. 라인하르트에 대한 평가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개요

베를린, 잘츠부르크, 뉴욕 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면서 창조적 대예술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해마다 열리는 잘츠부르크 예술제의 창설을 도왔다.

연극 입문

정통적인 유대교를 신봉하는 부모 빌헬름과 로제 골트만의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그와 마찬가지로 내성적인 남동생 에트문트와 몇 시간이나 인형을 가지고 놀았으며, 거리에서 공연되는 실제 인형극을 발코니에서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연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들이 빈 부르크테아터 배우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을 이해했고, 그중 한 배우에게 설득당해 아들이 지루한 은행원으로 일하기보다는 흥미있는 연극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라인하르트는 턱수염을 달고 짙은 분장을 해야 자기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수줍은 배우였으나, 잘츠부르크에서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친구들도 생겼다.

헨리크 입센의 작품을 독일에 소개한 오토 브람의 초청을 거절하지 못해 1894년 베를린에 있는 그의 '도이치 극단'에 들어갔고 그 얼마 전부터 라인하르트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도이치 극단(Deutsches Theater)
도이치 극단(Deutsches Theater)

라인하르트는 브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의 작품에 반영된 자연주의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것도 흉내만 내서는 안 되고 실제로 행해야 한다는 브람의 사실주의에 관한 견해에 따라 "매일 밤 무대에서 수염을 달고 맛 없는 국수와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먹는 일"에 싫증이 났다.

브람의 방식은 라인하르트가 생각하는 연출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친구는 빨리 사귀는 편이어서 카페에서 만난 젊은 예술가들을 모아 경쾌한 시사풍자극단 '소리와 연기(煙氣)'를 창설했으며 초청 관객 앞에서 보인 공연이 성공을 거두자 본격적인 무대공연으로 방향을 돌렸다. 1902년 극단 이름도 '소극단'으로 바꾸고 4계절 공연을 계획, 자신의 첫 연출작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Salome〉를 무대에 올렸다.

전성기

라인하르트에게는 자신의 계약 위반으로 노여워하던 브람을 달래기 위해 1만 4,000마르크를 변통하는 등 문제를 적절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수완도 있었다.

1903년 '신극단'을 인수하고, 수많은 작품을 연출했다. 1904년말까지 연출한 작품은 모두 42편이었지만, 그의 천재성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Midsummer Night's Dream〉을 무대에 올리면서부터였다. 라인하르트의 무대연출은 빠르고 경쾌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관객들은 오랫동안 셰익스피어의 작중 대사를 장황하고 엄숙하게 전달하는 데 치중해왔던 공연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극적 탁월성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졌다. '도이치 극단'의 상임 연출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자신의 극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뒤 '도이치 극단'을 100만 마르크에 샀으며, 32세에 이미 연극계 정상에 올랐다. 극장 건물을 완전히 다시 짓고, 무대 디자인에 당시의 혁신기술을 도입하고, 연극수업을 시작했다.

극장 옆에 있던 선술집을 사서 관객과의 친밀감을 필요로 하는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소극장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연극개념을 실내극(Kammerspiele)이라는 용어로 요약했다.

라인하르트는 성공했을 때도 가족을 따뜻하게 돌보았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남동생 에트문트를 베를린으로 데려와 마치 정신과의사처럼 그를 보살피면서 그가 자신감을 되찾도록 극장의 일을 맡기기도 했다. 1907년부터 '도이치 극단'은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에 들어갔다.

1911년 런던에서 초연한 뒤 뉴욕 시와 유럽의 대도시에서 공연한 〈기적 The Miracle〉은 그가 무대에 올린 작품 중 가장 장대하고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의식(儀式)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감각적 특성에 매료되어 이를 〈기적〉에 도입했는데, 극적 대사 없이 2,000여 명의 배우·음악가·무용수가 참여한 이 작품은 연극과 의식을 현대적으로 재통합한 가장 원형적인 의미에서의 순수연극이었다.

〈기적〉에서 고대(古代)의 통일성을 재창조한 것처럼 그는 과거의 많은 훌륭한 연극에도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1910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을 무대에 올린 것은 2,000여 년 만에 그리스 고전극을 대규모로 재현한 최초의 시도였다. 그는 자신이 이미 연출한 22편의 셰익스피어 작품 가운데 10편을 1913~14년 무대장치를 거의 또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새롭게 무대에 올림으로써 셰익스피어 작품을 크게 부활시켰다. 1911년에는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오페라 대본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Rosenkavalier〉를 처음 무대에 올리면서 오페라를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연출했다.

몇 년 뒤 1920년 잘츠부르크 대성당 광장에서 호프만스탈의 〈보통사람 Jedermann〉을 공연하여 잘츠부르크 예술제의 첫 개막을 도왔다. 잘츠부르크 예술제는 그의 지원을 받아 연례행사로 자리잡았으며, 〈보통사람〉의 원작이 씌어졌던 중세 연극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귀향과 망명

라인하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예술과 관객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연출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1920년에는 가끔씩 일하기는 했으나 도이치 극단에서의 연출활동은 중단하고 오스트리아에 사두었던 대저택에 머물면서, 자신이 해외에서 얻은 명성을 조국에서 찾으려 했다. 그의 집은 국제적 명사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향에서 편안히 지낼 수 없어서 베를린·빈·잘츠부르크 등지를 돌아다니며 지내야 했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는 운좋게도 해외에 있었다.

그는 나치 정부에 보내는 개인적 의견, 야유, 정치적 불만, 예언적 직관이 뒤섞인 특유의 편지를 통해 도이치 극단을 독일 국민에게 넘겨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도이치 극단과 같은 기구를 개인이 경영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앞으로도 국가의 후원 없이는 그같은 문화사업을 할 수 없게 되리라고 썼다. 유럽에서 좀더 활동한 뒤 1938년 라인하르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자신이 1934~35년에 영화 〈한여름밤의 꿈〉을 만들었던 할리우드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배우에게 현대적인 의상을 착용하게 해 〈보통사람〉을 공연한 뒤, 이 작품을 다시 흑인배우들만 출연시켜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재산도 없이 건강도 나쁜 상태에서 말년을 지내다가 언어능력까지 상실한 채 생을 마쳤다.

라인하르트에 대한 평가

라인하르트는 말수가 적고 연극이론을 전개하거나 설명하는 능력이나 의향도 거의 없는 사람이었으나 사물의 적합성에 대한 본능적 감각으로 20세기 연극연출을 변화시킨 실용주의자였다. 라인하르트가 출현하기 전에는 연출가가 독립적인 창조적 예술가라는 인식이 싹트지도 않았으나 그의 작업과 함께 연출가는 연극작품 배후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힘과 조형을 상징하는 정신으로 부각되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비극의 줄거리처럼, 라인하르트의 인생은 성공의 절정까지 올라갔다가 고향을 잃은 망명생활로 전락했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배우인 첫 아내 엘제 하임스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고 2번째 아내 헬레네 티미크 역시 아름다운 여배우였으며 라인하르트처럼 강한 내적 힘에 감동받고 갖가지의 상반된 모습으로 생기가 넘치는 수줍은 여자였다.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극도로 외향적인 행동을 하고 폴스타프(셰익스피어 희극 〈헨리 4세〉에 나오는 뚱뚱하고 쾌활한 기사)의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감상적 행위를 싫어했지만, 그 자신은 빈 사람의 감수성과 독일 사람의 엄격함과 세계주의가 결합된 낭만적 감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의 작품은 이전 시기의 연극을 집약하여 이후의 연극을 위한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