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란트

라인란트

다른 표기 언어 Rhineland
요약 테이블
위치 독일 라인강 연변
대륙 유럽
국가 독일,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요약 독일과 프랑스, 룩셈부르크 등의 국경부터 라인 강까지의 지역. 라인 강을 끼고 독일과 프랑스·룩셈부르크·벨기에·네덜란드 사이의 현재의 경계선 동쪽독일에 있다. 16세기 프랑스는 로렌을 침략했으며, 브란덴부르크는 1614년 프로이센 세력의 핵심을 구축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경을 라인 강 쪽으로 옮겼으나, 나폴레옹의 몰락 후 다시 알자스로 제한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은 많은 영토를 합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연합군이 독일령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 비무장지대로 선포했다. 1923년 10월 분리주의자들이 라인란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2주일도 지속되지 못했다.

라인란트(Rhineland)
라인란트(Rhineland)

라인 강을 끼고, 독일과 프랑스·룩셈부르크·벨기에·네덜란드 사이에 있는 현재의 경계선 동쪽, 즉 독일에 있다.

카를스루에 시에서 남쪽으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의 끈 모양 지역(이곳의 서쪽에서 라인 강이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이루고 있음)을 별도로 하면, 이곳은 프랑스의 모젤 주와 바랭 주의 북쪽 경계선에서부터 독일의 자를란트 주와 라인란트팔츠 주를 지나 북서쪽으로 바덴뷔르템베르크, 서쪽으로 헤센, 남서쪽으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까지 뻗어 있다.

라인 강 중류유역의 마인츠와 본 지역 사이는 구릉지대로, 수세기 동안 포도주를 생산하여 성주들과 여러 수도원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과 촌락들의 생계를 뒷받침해왔다. 본에서 아래쪽으로는 경관의 특징이 바뀌고 넓어져 북해까지 펼쳐지는 북유럽 대평야로 이어진다. 라인 강 하류지역은 공업이 아주 발달했다(라인 와인).

고대 로마 시대에는 동쪽으로 골족과 헤르만족 사이의 완충지로 유명하였으며, 그후에는 아우스트라시아 프랑크 왕국에 속했다. 그후 로렌·작센·프랑켄·슈바벤 공작령으로 분할되었으나, 중세시대 말기와 근대초에는 주권을 가진 수많은 영지로 분열되었다. 그러한 주권 영지로 북쪽에는 선제후인 쾰른 대주교 관구와 세속영주가 통치하는 클레베·베르크·윌리히가 있었고 중부에는 선제후들인 트리어 대주교 관구, 마인츠 대주교 관구, 보름스·슈파이어 주교 관구, 선제후인 팔츠 백작령, 나사우 백작령, 헤센의 몇 개의 속령이 있었다. 또한 남쪽으로는 슈트라스부르크 주교 관구, 알자스의 여러 도시와 봉건영지들, 그리고 브라이스가우를 포함한 바덴 후작령이 있었다.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혼란을 이용하여 프랑스는 16세기에 로렌을 침략했으며, 브란덴부르크는 1614년 클레베와 마르크를 차지해 라인란트에서 장차 생겨날 프로이센 세력의 핵심을 구축했다. 30년전쟁을 통해 프랑스는 알자스에 거점을 확보했다.

루이 14세가 일으킨 일련의 전쟁으로 인해 알자스에서 프랑스의 위치가 확고해졌으나, 로렌 공작령은 1766년 비로소 확실하게 프랑스로 편입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경을 라인 강쪽으로 옮겼으며 강 오른쪽에 라인 연방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빈 회의(1814~15)에서는 라인 강을 경계로 하던 프랑스의 국경을 다시 알자스 지방으로 제한시켰다.

알자스 북쪽에서는 바이에른 왕국에 속한 새로운 팔츠 지역이 제정되었다. 팔츠 북서쪽에는 여러 게르만 국가들의 조그마한 영토가 약간 있었으나, 이 지역을 포함하여 클레베까지 펼쳐진 라인 강 왼쪽 제방 전지역은 서쪽의 윌리히·아헨과 남쪽의 트리어·자를로이스와 더불어 프로이센의 영토가 되었다. 이 영토와 오른쪽 제방에 있던 프로이센의 다른 인접 영토들을 연합하여, 1824년 라인 주를 형성했다. 프로이센은 1866년 7주전쟁 후에 나사우와 마이젠하임을 합병했고,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에는 알자스-로렌을 합병했다. 그후 독일에서 가장 번영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특히 프로이센 북부는 공업이 매우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반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이 약 5~15년 동안 강 양안(兩岸)의 독일령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했다. 게다가 독일령의 강 좌안과 우안의 50㎞ 깊숙이 들어간 지역까지 영구적 비무장지대로 선포되었다. 1920년대의 라인란트는 위기와 반목의 분쟁이 빈발하는 화약고였다. 1923년 10월 반란을 일삼던 분리주의자들이 라인란트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이는 2주일도 지속되지 못했다. 독일 공포증을 갖고 있던 프랑스는 대독 유화정책을 쓰는 미국과 영국에 저항했는데 1930년 6월 30일 비로소 마지막 점령군이 이 지방에서 철수했다.

나치 독일은 5년 동안의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1935. 5. 2)이 이전의 국제협약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선포했다. 프랑스 상원이 이 조약의 인준에 대해 논란을 벌이던 중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 중 라인란트에 관한 조항의 이행을 거부하고, 독일군이 비무장지대로 진군했다고 발표했다. 히틀러가 군인들에게 프랑스인이 침입하면 퇴각하라고 지시한 것을 몰랐던 프랑스군 참모장은 부분 동원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군사작전을 펴지 않겠다고 버텼고, 프랑스 내각은 동원령 내리기를 거부했다. 지지부진한 국제협상은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해제하는 데 실패했다. 서방 각국의 소극적인 태도는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요구를 묵인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