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

라그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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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36. 1. 25, 이탈리아 사르데냐피에몬테 토리노
사망 1813. 4. 10, 파리
국적 이탈리아/프랑스

요약 정수론과 해석역학 및 천체역학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중요한 저서인 〈해석역학〉은 나중에 이 분야의 모든 연구에 기본이 된 최초의 교본이었다. 잉글랜드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논문집을 읽은 것을 계기로 수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1761년에 이르러 그는 이미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수학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764년 달의 칭동에 관한 논문으로 파리 과학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179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개교했을 때 가스파르 몽주와 함께 주도적 수학교수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원로 수학자에 대한 경의로 그를 원로원의원 및 백작으로 임명했으나, 그는 조용하고 겸손한 학자로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하는 덕망있는 인물로 남았다.

라그랑주(Joseph-Louis Lagrange)
라그랑주(Joseph-Louis Lagrange)

정수론과 해석역학 및 천체역학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중요한 저서인 〈해석역학 Mécanique analytique〉(1788)은 나중에 이 분야의 모든 연구에 기본이 된 최초의 교본이었다.

그는 프랑스 혈통의 부유층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사르데냐 왕의 재무부장관이었는데 투기로 재산을 잃었다. 라그랑주는 훗날 "내가 만일 부자였다면 수학에 몰두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잉글랜드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논문집을 읽은 것을 계기로 수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세(16세라고 하는 이도 있음)에 이미 토리노 포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또 토리노 과학 아카데미 설립을 도왔다. 그의 소리전달과 최대·최소 개념에 관한 초기 저작들은 평판이 좋았다. 베를린의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라그랑주의 변분론(變分論)에 대해서 칭찬했다. 이 젊은 수학자의 발견들은 동시대 사람들을 계속 놀라게 했다.

1761년에 이르러 그는 이미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수학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764년 달의 칭동(秤動)에 관한 논문으로 파리 과학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달의 칭동이란 지구로 향한 달 면 위에서 달 모양의 놓인 위치에 약간의 변화를 일으키는 진동을 말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지금은 라그랑주 방정식으로 불리는 방정식을 사용했다. 1766년 아카데미는 현상 과제로 목성의 위성에 대한 운동론을 제안했다. 상은 다시 그에게 수여되었고 1772, 1774, 1778년에 같은 영예를 얻었다.

1776년 오일러와 프랑스의 수학자 장 달랑베르의 추천을 받아 오일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아카데미 소속 수학자가 되었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를 갖는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소원이기도 했다.

그는 1787년까지 베를린에 머물렀다. 당시 그의 생산력은 대단했다. 뉴턴의 중력법칙에 따라 서로 끄는 3개의 입자 변화에 관한 삼체(三體) 문제, 미분방정식, 소수론, 존 펠 방정식(오일러에 의해 부당하게 명명되었음)으로 알려진 기초적으로 중요한 정수론적 방정식, 확률, 역학, 태양계의 안정성에 대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긴 논문 〈방정식의 대수적 해결법에 대한 고찰 Réflexions sur la résolution algébrique des équations〉(1770)로 대수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갈루아를 고무시켜 군론(群論)을 발전시키게 했다.

오직 과학만을 위해 일생을 보낸 친절하고 조용한 성품의 그는 왕 주변의 당파나 음모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자 루이 16세의 파리 초청에 기꺼이 응했다. 그에게는 루브르 궁에 방이 주어졌고, 계속해서 영예를 얻으며 전 혁명시기를 통해 존경스럽게 대우받았다. 루브르에서 그는 뉴턴 이후 100년 동안의 역학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해석역학〉을 펴냈다. 이 연구는 자신의 변분법을 기초로 한 것으로, 역학계의 어떤 특성들은 역학계의 실제 내력을 묘사하는 경로로부터 생겨나는 변위(變位)에 의한 합(또는 적분)에서의 변화를 고려함으로써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한개의 입자계 상술에 필요한 독립좌표계, 즉 '일반화된 좌표계'를 낳았다. 또한 고전역학체계를 위한 방정식(라그랑주 방정식)을 낳았고 이 체계에서 운동 에너지는 일반화된 좌표계, 이에 상응하는 일반화된 힘, 그리고 시간과 관련된다. 이 책은 전형적으로 해석적이었는데, 그는 서문에서 "이 책에는 어떤 도형도 없다"고 밝혔다.

1789년에 시작된 혁명으로 그는 도량형체계개혁위원회에서 일해야 했고 교육에 종사해야만 했다.

위대한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을 때 그는 "머리를 자르는 것은 한순간이나 그와 같은 머리를 생산하는 데는 1세기라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179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개교했을 때 가스파르 몽주와 함께 주도적 수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강의는 〈해석함수론 Thé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1797)·〈함수의 미적분 강의 Le이미지on sur le calcul des fonctions〉(1804)로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해석실함수에 대한 최초의 교과서였다.

이들 책에서 그는 소량의 비율과 이 비율의 극한(즉 도함수)과 관계를 갖는 미적분학의 허약한 기초를 걱정하여 그것을 대수학에 근거를 둠으로써 무한소를 없애려 했으나 실패했다. 〈해석역학〉에 대해서도 계속 연구했지만 그가 죽은 뒤에야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나폴레옹은 원로 수학자에 대한 경의로 그를 원로원의원 및 백작으로 임명했으나, 그는 조용하고 겸손한 학자로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하는 덕망있는 인물로 남았다.

2번 결혼했고, 둘째 아내는 천문학자 피에르 샤를 르 모니에의 딸로 그보다 훨씬 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