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하르트 오일러

레온하르트 오일러

다른 표기 언어 Leonhard Eu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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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07. 4. 15, 스위스 바젤
사망 1783. 9. 18,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스위스

요약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순수수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기하학, 미적분학, 역학, 그리고 정수론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관측천문학적인 문제를 푸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과학기술 및 공공업무에 수학을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일러의 수학적 재능은 당시 유럽 최고의 수학자 중 하나인 장 베르누이와 그의 아들 다니엘과 니콜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748년의 <해석적 무한대의 소개>에서는 해석학에서 변수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함수의 개념을 전개했고 무한소와 무한량의 사용을 촉진시켰다. 미적분학에 관한 교과서인 오일러의 저서 <미분학 개론>(1755), <적분학 개론>(1768~70)은 미분공식과 여러 가지 부정적분 방법들을 담고 있어 지금까지도 원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일러(Leonhard Euler)
오일러(Leonhard Euler)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순수수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기하학·미적분학·역학, 그리고 정수론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관측천문학적인 문제를 푸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과학기술 및 공공업무에 수학을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수학적 재능은 당시 유럽 최고의 수학자 중 하나인 장 베르누이와 그의 아들 다니엘과 니콜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72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학교 부교수가 되었고 1733년 다니엘 베르누이의 뒤를 이어 수학과장이 되었다. 학회에 제출한 많은 책과 논문에 의하여 오일러는 더 높은 단계에서 완벽하게 적분학을 전개했고 3각함수와 로그함수이론을 개발했으며 해석적인 연산을 매우 간단히 하는 등 순수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새로운 빛을 주었다.

그러나 자신을 너무 혹사하여 1735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741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으로 베를린 아카데미 일원이 되어 25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그중 많은 것들을 자신에게 연금을 준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1748년의 〈해석적 무한대의 소개 Introductio in analysin infinitorum〉에서는 해석학에서 변수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함수의 개념을 전개했고 무한소와 무한량의 사용을 촉진시켰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가 〈기하학원본 Elements〉에서 고대 기하학에 공헌했던 것처럼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근대 해석기하학과 3각함수에 공헌했다. 그결과 수학과 물리학을 산술적 용어로 표현하는 경향이 계속되었다. 오일러는 초등 기하학에서 이미 잘 알려진 결과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수심(3각형에서 수직선들의 교점)을 통과하는 오일러 직선, 외심(3각형의 외접원의 중심), 그리고 3각형의 무게중심 등이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3각형의 두 변과 한 각의 관계인 3각함수를 기하학적인 선분의 길이가 아닌 수의 비율로서 다루었고, 그 둘 사이를 복소수들의 소위 오일러 항등식(eiθ=cosθ+isinθ)을 통해 연관지었다. 음수의 허수 로그를 발견했으며 모든 복소수는 무한 개의 로그를 갖는다는 것을 보였다.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쓴 미적분학에 관한 교과서 〈미분학 개론 Institutiones calculi differentialis〉(1755)·〈적분학 개론 Institutiones calculi integralis〉(1768~70)에는 미분공식과 여러 가지 부정적분 방법들을 담고 있으므로 지금까지도 원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내용 중 많은 것들은 힘이 한 일을 결정하고 기하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하여 레온하르트 오일러 자신이 만들었다. 오일러는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선형미분방정식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중요하고 새로운 개념과 기술을 도입해 수학을 질적으로 향상시켰다. 또한 오일러는 현재 사용하는 기호를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합 ∑, n의 약수의 합 ∫n, 자연로그의 밑 e, 3각형의 변 a, b, c 와 이 변들의 대각 A, B, C, 함수를 나타내는 문자'f'와 괄호, 원주율 π, 그리고 √-1을 i로 나타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대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관심이 줄어들자 오일러는 1766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로 돌아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온전했던 한쪽 눈마저도 백내장이 생겨 생의 마지막 몇 년을 장님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상한 기억력과 놀라운 암산력으로 연구논문의 발표는 줄지 않았다. 오일러는 관심의 폭이 넓었고 〈독일 왕비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s à une princesse d'Allemagne〉(1768~72)는 역학·광학·음향학·물리천문학의 기본 원리들을 놀랄 만큼 명확히 설명한 것이다.

교실에서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근대 어떤 수학자보다 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자는 거의 없었지만 러시아 수학교육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일러는 의 운동에 대해 더욱 완벽한 이론을 세우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이론은 해·달·지구의 상호작용인 소위 3체문제(여전히 미해결임)와 관련된 것이므로 특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1753년에 발표된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부분적인 해는 영국 해군성이 바다에서 경도를 재는 데 중요한 달에 관한 도표를 계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장님으로 지내는 동안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1772년 달운동에 관한 오일러의 제2이론의 모든 정밀한 계산을 암산으로 했다. 오일러는 일생동안 정수의 성질·관계를 다루는 수론의 문제에 몰두했다.

이중 1783년에 발견한 2차 상호관계 법칙은 근대 정수론에서 절대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종합적 방법을 분석적 방법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뒤를 이어 J. L. 라그랑주가 이어받았다.

그러나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초점을 둔 반면, 라그랑주는 추상적 일반성을 추구했고, 오일러가 무모하게도 발산하는 급수를 다룬 반면 라그랑주는 견고한 토대 위에 무한급수를 다루려고 시도했다. 이처럼 오일러와 라그랑주는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손꼽히지만, 오일러가 논문수에서나 문제를 푸는 산술방법(계산과정)을 고도의 기술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