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

갈루아

다른 표기 언어 Évariste Gal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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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파리 근처 부르라렌, 1811. 10. 25
사망 1832. 5. 31,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군론(群論)'으로 알려진 고등대수학 분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이론은 각을 3등분하는 문제나 원적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답할 수 없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다. 루이르그랑 왕립중학교에서 수학적 능력을 발현하기 시작해서, 당시의 수학계에 대한 대담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의 훌륭하고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핵심적인 발견은, 근에 의해 해를 얻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자기동형군이 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5차 이상의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2차·3차·4차 방정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사후 40년 뒤에야 비로소 독일의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이 그의 대수함수론을 완전하게 발전시켰다.

갈루아(Évariste Galois)
갈루아(Évariste Galois)

군론(群論)으로 알려진 고등대수학(高等代數學) 분야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이론은 각을 3등분하는 문제나 원적(圓積)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답할 수 없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는 부르라렌의 유명한 시민 니콜라 가브리엘 갈루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한 뒤 정권을 장악했던 백일천하 동안 그의 아버지는 시장(市長)으로 뽑혔다. 그의 어머니 아델라이드 마리 드망은 유명한 변호사 집안 출신이었다. 그녀는 1823년 갈루아가 루이르그랑 왕립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집에서 그를 가르쳤다.

학교에서 선생들의 따분하고 평범한 가르침 때문에 그의 학구열은 시들해졌다. 그러나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의 기하학에 관한 저서와 대수학에 관한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의 연구를 재빨리 터득하고 났을 때 그의 수학적 능력이 갑자기 발현되었다.

루이르그랑에서 그의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인 루이 리샤르의 지도 아래 대수학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여 당시 수학계에 대담한 도전을 시도했다. 수학자들은 오랫동안 4차방정식까지의 해(解)를 구하기 위해 오직 유리연산(有理演算)과 근풀이에 의해서 얻어지는 명확한 공식을 사용했었다.

예를 들어 3x2+5=17은 지수(指數) 2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2차방정식이라고 하고, 이런 형태의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근에 의한 해법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방정식을 풀 때 방정식에 나타나는 계수(係數)가 하나 이상의 항(項)으로 구성된 식을 제곱근풀이하기 때문이다.

2차방정식의 해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차와 4차에 대한 공식은 수학자 니콜로 타르탈리아와 루도비코 페라리가 발견한 뒤, 1545년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의사 제롤라모 카르다노가 발표했다. 많은 수학자들이 5차방정식을 풀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1796년 파올로 루피니가 근에 의해 5차방정식의 해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했다. 그의 증명은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1824년 노르웨이의 수학자 닐스 아벨이 본질적으로 타당한 증명을 해냈다.

갈루아는 비록 나중에는 알게 되었지만, 그의 연구 초기에는 아벨의 연구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아직 학생이었던 16세에 방정식이 근에 의해 풀리기 위해 만족해야 하는 본질적인 조건들(지금은 갈루아 이론이라 함)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방법은 방정식의 근에 대한, 허용되는 순열(順列 : 순서가 있는 배열의 변환)을 분석하는 것이었다(대수구조, 갈루아 군). 즉 오늘날의 용어로 하면 방정식의 근들을 결부시켜 얻어지는 '체'(體)의 자기동형군(自己同形群 : 특별한 종류의 변환)을 만들었다.

그의 훌륭하고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핵심적인 발견은, 근에 의해 해를 얻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자기동형군이 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항상 쉽게 이해되는 구조를 가지는 소수차수 성분으로 군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소수(素數)란 자기 자신과 1로만 나누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整數)를 말한다. 그가 풀 수 있다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것이 근에 의해서 해결 가능하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5차 이상의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2차·3차·4차 방정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르그랑에 있는 동안 그는 몇 편의 소논문을 발표했으나 실망과 괴로움만 맛보았다. 그가 과학아카데미에 제출한 3편의 논문은 수학자이면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던 아카데미 회원들에 의해 폐기되거나 거절당했던 것이다.

첫 논문은 1829년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폐기했다. 또한 프랑스 제일의 수학과가 있는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 입학하려고 2회(1827, 1829)에 걸쳐 시도했으나 운 나쁘게도 까다로운 구두(口頭)시험관을 만나 실패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1829년 고향에서 보수주의자들과 격렬한 논쟁 끝에 자살했다.

그해 자신에게 수학자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고등사범학교(Éole Normale Supérieure)에 교사지원생으로 등록했고,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가로 변신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연구활동은 계속했다.

그가 1830년 과학아카데미에 제출한 대수함수에 대한 2번째 논문은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가 없애버렸다. 1830년의 혁명은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샤를 10세를 추방시켰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은, 비록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두른 시민왕이었다 하더라도 또 다른 군주인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을 때 크게 실망했다.

갈루아는 이러한 견해를 강한 어조의 논설로 나타냈으며, 그결과 그는 즉시 고등사범학교에서 쫓겨났다. 곧이어 그는 이런 공화파 활동 때문에 2번 체포되었는데, 처음에는 무죄로 풀려났으나 2번째에는 유죄로 감옥에서 6개월을 보냈다. 1831년에 쓴 그의 3번째 논문은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좀더 보충되어야 하며 보다 분명하게 논의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메옹 드니 푸아송이 돌려보냈다.

파리 결투에서 그가 죽게 된 주변 배경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이 나온 적은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여인을 둘러싼 말다툼 때문이었다는 둥, 그의 공화주의적 견해를 싫어하는 왕정파(王政派)들이 도전을 했다는 둥, 경찰공작원이 개입되었다는 둥 무수한 추측이 있었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그의 자서전 〈회상록 Mes Mémoirs〉(1863~65)에서 갈루아를 쏜 사람이 페쇠 데르뱅빌이라고 넌지시 밝혔다. 어쨌든 다가올 싸움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그는 친구이자 동창생인 오귀스트 슈발리에에게 과학에 관한 마지막 글을 보냈다.

이 산만한 메모에서 그가 대수함수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40년 뒤에야 비로소 독일의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이 이 대수함수론을 완전하게 발전시켰다.

조제프 리우빌의 주석이 붙은 갈루아의 원고는 1846년 〈순수수학과 응용수학 저널 Journal de Mathématiques Pures et Appliquées〉에 발표되었다. 1870년 프랑스의 수학자 카밀 조르당은 갈루아의 이론을 완전하게 다룬 〈대입론과 대수방정식론 Traité des Substitutions et des Éuations Algébriques〉을 발표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갈루아의 발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했으며 수학사에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했다. 1909년 6월 13일 그의 출생지인 부르라렌에 작은 현판이 걸렸다. 이 현판의 헌납식에서 수학자 쥘 타네리가 한 감동적인 연설은 같은 해 〈수리과학편람 Bulletin des Sciences Mathématiques〉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