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포로스 2세

니키포로스 2세

다른 표기 언어 Nikephoros II Phokas
요약 테이블
출생 912, 카파도키아
사망 969. 12. 10/11, 콘스탄티노플
국적 비잔틴

요약 비잔티움의 황제(963~969 재위).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권력으로의 부상
  4. 군사적 업적
  5. 명성

개요

아랍 이슬람교도들을 물리침으로써 10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을 회복하는 데 이바지했다.

초기생애

비잔티움 국경지대인 아나톨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비잔티움의 유명한 장군 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로 일찍이 군인이 되어 동방에서 아랍의 함단 왕조와 맞서 싸웠을 때 아버지 곁에서 크게 활약했다.

954~955년에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그를 연로한 아버지 대신 동방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니키포로스는 규율을 강화하고 징집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군대를 재조직했으며 군사전략에 관한 논문을 쓴 듯하지만 그 논문들이 그의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황제 로마노스 2세크레타 섬(826년부터 아랍의 지배를 받았음) 해방을 위한 원정 사령관으로 그를 임명했다. 이 원정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전 함대와 2만 4,000여 명의 군사가 동원되었고 이 싸움으로 에게 해 주민과 비잔티움의 국제상업이 큰 피해를 입었다.

비잔티움군은 961년 3월 7일 지금의 이라클리온에 있던 칸닥스를 함락시키고 크레타 섬을 장악했으며 비인도적인 대학살을 벌여 모든 아랍 저항세력을 무찔렀다. 아토스 산에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을 세웠고 니키포로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크레타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강화했다. 그뒤 크레타 섬의 마지막 아미르(amir:이슬람 왕국의 군주)인 아브드 알 아지즈를 포로로 삼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이제껏 크레타를 해방시키려던 시도가 수십 번 있었고 모두 다 실패했지만 시인 테오도시오스가 시로 읊은 것처럼 니키포로스는 마침내 그 위업을 이루었고 동부 지중해는 비잔티움의 세력 안에 들어와, 그는 황제가 되어서도 자신이 바다를 제패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962년초에는 실리시아와 시리아의 아랍군을 공격해 60개가 넘는 요새를 함락시키고 이슬람교도들의 해군기지를 장악해 실리시아와 키프로스 섬을 되찾았다.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 2세가 죽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황은 변했다. 황제는 환관 요세포스 브링가스에게 국정을 맡기고 합법적 황제이지만 아직 6, 3세밖에 되지 않았던 바실리오스와 콘스탄티노스를 대신해서는 갓 20세인 황후 테오파노에게 섭정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잡고자 하는 생각은 갖지 않았던 것 같다.

권력으로의 부상

그의 인기는 무척 높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외모가 그다지 준수하지 못하고 아타나시우스의 영향을 받아 금욕생활을 할 것 같았기 때문에 젊고 아름다운 황후를 유혹하거나 유혹당할 기미는 전혀 없었다.

이런 얘기가 있었다면(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가 있음) 이는 당시 브링가스가 이끄는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야심만만한 테오파노가 꾸민 것일 가능성이 많다. 왕의 시종이던 바실리오스의 선동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은 브링가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 군대는 니키포로스에게 충성하던 부관 요한네스 치미스케스의 중재로 니키포로스에게 963년 7월 3일 카이사레아에서 제위를 받아들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행군하도록 강요했다.

963년 8월 16일 그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귀족 폴리에우크투스에게서 왕관을 받았고 9월 20일에는 테오파노와 결혼식을 올렸다.

자기 아내에게 완전히 빠져 있던데다가 동생 레오 포카스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차츰 말수가 적어지고 절친한 고문들까지도 의심해 1명씩 해임시켰다. 당시 레오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에게 밀값을 조작했다는 원성을 샀다. 니키포로스는 아랍인들에 대항해 계속 공훈을 세웠으나 마침내 모두에게 버림을 받아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지어 둔 요새화된 궁전 부콜레이온으로 은퇴했고 969년 12월 어느날 밤 테오파노의 사주를 받은 치미스케스를 비롯한 그의 옛 동료들에게 그 궁전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성격과 생애에는 모순점이 많았고 국내 정치에서도 그런 면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정부에 불만을 품었다.

백성들은 군대유지와 전쟁 때문에 빚어진 재정부담과 화폐가치하락에 불만을 품었고 교회는 황제가 수도원의 재산증식을 막는 정책을 결정하자 분개했다. 그의 정신적인 지도자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사생활을 꾸짖었으며 그의 부인 테오파노는 레오 포카스가 음모를 꾸며 자기 아이들을 내쫓을까봐 염려했다. 이 모든 요인들이 합쳐져 음모풍토가 조성되었으며, 결국 니키포로스는 암살되고 요한네스 치미스케스가 제위에 올랐다.

군사적 업적

니키포로스는 비록 국내 정치에서는 실패했으나, 군사활동 면에서는 큰 업적을 쌓아 그의 재위기간은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제일 영광스러운 시기로 손꼽힌다.

그에 관해서 가장 완전한 전기를 쓴 C. 슐럼버거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는 동방에서 비잔티움 시대의 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교도들과 맞서 싸운 인물로서 유명하지만 그밖에도 비잔티움 영토를 유프라테스 강 건너 시리아까지 넓혔으며 다른쪽 국경도 소홀히 하는 일 없이 영토를 계속 늘려나갔다. 불가르족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서 러시아를 부추겨 도나우 지방을 간섭하도록 했으나 이 정책은 비잔티움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특히 심한 위기까지 몰고 갔다.

또한 카롤링거 왕조의 영광을 되살린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의 팽창정책을 막기 위해 오토의 황제칭호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입지를 강화하려 애써 다소 성공을 거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정책목적은 비잔티움을 국제 중재국(仲裁國)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무력을 써서 이를 이루었다.

명성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니키포로스(승리를 가져오는 사람)였다.

비잔티움인들은 그에게 승리의 기술사란 뜻을 가진 '칼리니코스'라는 성(姓)을 붙여주었으며, 아랍인들은 그를 니크포우르(사라센의 망치)라 불렀다. 그가 죽었을 때 이슬람 세계는 무척 기뻐했으나 그리스도교도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의 업적과 비극적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설이 되어 퍼져나가 비잔티움 제국은 물론 불가르족 시인들까지도 그의 업적을 주제로 한 시를 썼다. 후대 사람들도 그를 추모했으며 변경지방에서 씌어진 서사시에도 그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온다.

교회는 그를 시복(諡福)했으며('아콜루티에'는 그를 기념해 만든 노래임), 아토스 산에 사는 수도승들은 니키포로스를 그들의 후원자, 수도원 건립자, 황제, 순교자라 여겨 아직도 공경하고 있다. 그의 석관(石棺)에는 "그대는 한 여자만을 빼고는 모든 것을 정복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한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