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더글러스

다른 표기 언어 Stephen A(rnold) Douglas
요약 테이블
출생 1813. 4. 23, 미국 버지니아 브랜든
사망 1861. 6. 3, 시카고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정치가.

민주당의 지도자이며 웅변가로서 미국 남북전쟁(1861~65) 전 남부의 노예문제에 관련하여 인민주권의 원칙을 주창했다.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과의 일련의 능란한 토론을 거쳐 1858년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재선되었으나 2년 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링컨이 그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더글러스는 20세에 뉴잉글랜드를 떠나 일리노이 주 잭슨빌에 정착했으며 일리노이 주 민주당 지도부로 단기간에 부상했다. 1843년 그는 미국 연방 하원에 최원소 의원 중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헌신적으로 일하고 능란한 말솜씨로 일찍이 유명해졌다. 160㎝ 정도의 키에 살이 찐 그는 당시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더글러스는 일생 동안 열정적으로 국토확장에 노력했는데 텍사스 합병(1845), 멕시코 전쟁(1846~48)에 찬성했으며 오리건 국경분쟁(1846) 때에는 영국에 대항해 확고부동한 자세를 견지했고,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토지지원과 정착민들을 위한 무상주택 정책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더글러스는 1846년 미국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평생 의원직에 재직했는데 상원에서 미국의 노예문제 해결에 깊이 몰두했다.

준주위원회 의장으로서 노예제도의 서부확대에 관한 남북 간의 격론이 벌어지자 크게 활약했고 의회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주민주권론(처음에는 무단 거주자 주권이라고 불렀음)을 제창했는데, 이것은 준주의 사람들이 스스로 그들 지역에서 노예문제를 허용할 지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예를 두지 않았으나 그의 부인은 노예를 두었다. 그는 1850년 의회가 자유주와 노예주 간 균형을 취하고자 했던 '타협안'의 통과에 영향을 미쳤으며 주민주권에 의거하여 유타와 뉴멕시코를 조직한 것은 그의 원리의 승리를 의미했다(1850년의 타협).

더글러스의 이론은 의회의 지시가 아니라 지역의 선택에 의해 노예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도록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안은 미주라 타협안을 번복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의 통과는 그의 승리를 의미했으나 그는 반노예 세력의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 그는 1852년과 1856년에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떠올랐으나 그가 파당간 간격을 좁히는 데 노력중이던 당시 민주당에서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후보로 지명될 수 없었다.

미국연방 대법원은 의회나 준주의회는 준주에서의 노예 금지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1857)을 내려 주민주권론과 간접적으로 충돌했다.

다음해에 더글러스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자리를 두고 링컨과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며 링컨과의 유명한 토론을 수차례 벌였다. 링컨이 대중의 인기를 모았으나 의회에서는 더글러스가 54 대 46으로 당선되었다. 토론과정에서 더글러스는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준주들은 스스로 노예제를 불법화하는 입법을 제정할 수 있고 이에 대한 경찰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의 유명한 '프리포트 독트린'(Freeport Doctrine)을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남부의 반격은 거세졌으며 그는 상부 위원회 위원장에 재임명되지 못했다. 1860년 북부 민주당 의원들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자 남부 민주당 의원들은 분리해 나와 켄터키 주의 존 C. 브레킨리지를 후보로 지지했다. 더글러스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12표를 얻는 데 그쳤으나 국민투표에서는 링컨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더글러스는 선거결과에 남부가 승복하기를 권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부의 분리는 범죄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연방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다. 링컨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그는 국경 주들과 북서부 주들에 가서 주민들 사이에 연방주의를 고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연방을 지키려는 임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너무 혹사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