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피우스

그로피우스

다른 표기 언어 Walter (Adolph) Gropius 동의어 발터 그로피우스
요약 테이블
출생 독일 베를린, 1883. 5. 18
사망 1969. 7. 5, 미국 보스턴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건축가·교육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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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청년기와 초기 훈련과정
  3. 바우하우스 시절
  4. 하버드대학 시절
  5. 평가

개요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지내면서(1919~28) 근대건축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공동작품이 많으며 대표작은 바우하우스 학교 건물 및 교직원 주택(1925~26),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센터, 아테네의 미국대사관 등이 있다.

청년기와 초기 훈련과정

건축가의 아들인 그는 뮌헨(1903~04)과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1905~07)의 공업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04년 베를린의 건축사무소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1904~05년에 군복무를 했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첫 작품으로 포메라니아에 농장노동자 숙소를 지었으며(1906), 그뒤 일년 동안 이탈리아·스페인·영국을 여행하고, 다시1907년 베를린에 있는 페터 베렌스 건축사무소에 들어갔다.

그로피우스는 베렌스와 함께 일한 경험과 독일 아에게(AEG)회사건물을 설계하면서 겪었던 설계상의 여러 문제들 때문에 건축과 예술의 상호관계와 진보적 건축에 일생동안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1910년 베렌스에게서 독립해 1914년까지 조직과 예술에 대한 이상을 증진시키기 위한 뚜렷한 의식과 재능을 키워나갔다.

1911년 그는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 회원이 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은 창조적 디자인과 기계 생산방식을 연결하기 위해 1907년 발족되었다. 그로피우스는 건물의 부분들을 공장에서 생산하고 현장에서 조립하는 건축기술을 주장했다.

그는 기계화의 불가피성과 한계를 잘 알고 있었으나 "기계로 만든 죽은 생산물에 영혼을 불어넣는 일"은 예술적으로 단련된 설계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에서 모방·속물근성·독단적 교리를 반대했고 생산물의 기능이 그 형태를 결정한다는 견해 같은 지나친 단순화에 대해서 경고했다.

그의 지적인 지도력은 아돌프 마이어와 함께 2개의 중요한 건물―알펠트안더라이네에 있는 파구스 공장(1911)과, 공작연맹 박람회에 출품한 콜로뉴의 사무실과 공장건물군 모델(1914)―을 공동설계함으로써 더욱 보강되었다.

파구스 공장은 베렌스의 공장보다 더 대담하게 넓은 유리벽들과 그 사이에 노출되어 보이는 강철지주가 특징으로서, 허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건물이다. 콜로뉴 건물군은 이보다 더 정형화된 것으로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서 영향받았다고도 한다.

이 두 건물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로피우스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설계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기병장교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하다 부상당했고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10년 그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인 알마 말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1915년 미망인이 된 그녀와 결혼했다. 휴가 때만 만날 수 있는 전쟁중의 결혼생활이었으므로, 부인이 독일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관계를 맺자 문제가 복잡해졌고 1919년 이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알마 마논은 1935년에 죽었다.

바우하우스 시절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이마르 시에서는 예술교육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로피우스를 찾았다.

1919년 4월에 그는 작센 대공 미술공예학교, 작센 대공 미술아카데미, 작센 대공 미술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이 세 학교는 곧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 Weimar)로 통합되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예술·정치·행정의 실용적 세계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디자인 교육 방법을 개발했고 이 바우하우스는 전세계적인 본보기가 되어 200년 전통을 지닌 프랑스 에콜데보자르의 명성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에서 실시한 교육의 요체는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재료 및 제조공정에 숙달되도록 실제적인 기능훈련을 경험하게 한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포괄적으로 계획되었으나, 예산 제약으로 단 1개의 공작실만 운영되었다. 그때만해도 바이마르에는 공식적인 건축교육과정이 하나도 없었다. 예술과 공업을 결합하려는 초기 공작연맹의 원칙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활동은 요업·직물업·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과 같은 수공예 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는 폴 클레, 리오넬 파이닝거, 바실리 칸딘스키,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그리고 그 뒤에 온 라슬로 모호이 노디와 요제프 알베르스 등과 같은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교수로 활동했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예술가들이었다.

어쨌든 예술가들이 응용디자인을 가르친다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스위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요하네스 이텐이 디자인 원리에 대한 개론으로서 '예비과정'(Vorkurs)이라는 입문과정을 개발했고, 이것은 바이하우스 교과과정 중에서 가장 널리 반복전수되는 과목이 되었다. 학생들은 철사·나무·종이 등과 같은 여러가지 단순한 재료를 써서 2차원, 3차원적인 디자인을 탐구했다. 형태, 색채, 질감에 대한 심리적 효과에서도 훌륭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학교 강사들도 재능이 있었지만 이 새로운 교육적 실험이 가능했던 것은 그로피우스의 집념 덕분이었다.

역사가들은 초기 바우하우스의 성격을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

1912~22년에 학생들이 자신의 예술에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도록 허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따라서 개인주의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성향이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전쟁 전에 예술은 근대사회의 경제적 특성과 합리적인 질서를 따르면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전쟁 전의 신념은 예술의 위대함이란 실용성을 고려한 바탕 위에 확립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신념 속에 흡수되었다.

여러 논쟁 끝에 1922년 바우하우스에 전환이 일어났다.

이텐이 학교를 떠나자 더욱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접근방법이 사용되었다.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기계 생산을 위한 원형이 되었으며 몇몇 디자인들은 상품화되었다. 그들은 기하학적 형태와 매끈한 표면, 균형잡힌 외관, 원색, 근대적 재료들을 강조했다. 이 모든 요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몰개성화한 예술로 받아들여졌으며 바우하우스 양식의 특징을 가진 마지막 산물로 인정되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과 디자인이 언제나 그 시대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았으며 건축가의 임무는 통합적인 시각환경을 포괄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도 가구, 기차, 자동차를 설계했으며 주거건축과 도시계획, 사회학의 유용성 및 전문가로 구성된 팀의 활용을 강조했다.

1925년에 바우하우스는 보수적인 바이마르 사회에서 적대감이 커짐에 따라 도피를 겸해 더 나은 재정지원을 약속받은 데사우로 옮겼다. 그로피우스는 데사우에서 학교건물과 교직원주택을 설계했다(1925~26). 바로 이 학교가 근대건축에서 기념비적 초석이 되는 건물이며 그로피우스 작품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다.

동적(動的) 구성, 비대칭 평면, 수평으로 늘어선 창이 나있는 희고 평평한 벽체, 평지붕 등은 1920년대 이른바 국제주의 양식과 관련된 특징들이다. 그는 1928년 바우하우스의 교장직을 사임하고 베를린에서 건축가로서 개인활동을 시작했다. 1929~30년에 베를린지멘슈타트에 주택단지 일부를 설계했다. 똑같은 방향으로 규칙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정면(facade)은 지나칠 정도로 획일적인 해결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로피우스 자신도 후에 자책했다.

하버드대학 시절

나치 체제에 동조할 수 없었던 그로피우스는 1923년 결혼한 두번째 부인 이제 프랑크와 함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를 거쳐 1934년 영국으로 망명했고 히틀러 정권은 1933년 바우하우스를 폐쇄했다.

영국에서 맥스웰 프라이와 함께 일하면서 중요한 공동작품인 캠브리셔 임핑턴의 빌리지대학을 만들었다.

1937년 2월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도착해 하버드대학의 건축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학과장이 되었고, 1952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그 자리를 맡았다. 1944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도 바우하우스 디자인 철학을 교과과정에 도입했으나 공작실 교육은 할 수 없었으며 교과과정에서 건축사를 없애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가 펼친 근대적 디자인 운동은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고, 하버드대학에서 보여준 개혁은 곧 미국의 다른 건축학교에 펴져 비슷한 교육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역사적 양식을 모방하는 건축에 종지부를 찍는 시발점이 되었다.

교육경력 이외에도 옛 바우하우스 제자이자 1937~40년에는 동료교수로 일했던 마르셀 브로이어와 함께 일했던 경력이 있다. 이들이 설계한 건물 가운데는 매사추세츠의 링컨에 있는 그로피우스의 저택이 있는데 흰색 페인트칠이 된 목재와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써서 뉴잉글랜드의 전통을 근대적 의미로 되살렸다.

이 집을 비롯한 여러 공동작품들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두 사람은 생전에 자신들의 이상이 인정받는 것을 보았다. 1942년 조립식 주택을 생산하는 제너럴패널사의 부사장이 되자, 그로피우스는 건물을 공장 생산하는 것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52년에 그 직을 사임했다.

1946년에는, 하버드 제자 6명과 함께 케임브리지에 본부를 둔 티에이시(The Architects Collaborative/TAC) 를 결성했다.

이 협회는 미국 및 외국에서 여러 설계를 위탁받았다. 그중 하나가 기숙사 건물군과 공동식당이 있는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센터(1949~50)이다. 이 작품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물을 연상시키지만 그만큼 강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밖에 티에이시 작품으로는 아테네의 미국대사관(1960)과 바그다드대학교 등이 있다. 그로피우스는 86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티에이시 회원으로 계속 활동했다.

1933년 그가 죽은 지 이틀 뒤, 그의 요청대로 애도 분위기가 아닌 축제 분위기로 치러진 장례식에서는, 케임브리지의 동료 70명이 모여 그를 회고하면서 샴페인을 들었다.

평가

그로피우스에 대한 많은 평가는 건축가라기 보다는 교육자와 작가로서 이룩한 일을 중심으로 내려지고 있다.

비현실적인 열정과 실천적인 야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예술을 개혁하고 관리하는 데 일생을 바친 그는 목표를 충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주관적인 면을 버리고 더 광범하고 사회적으로 절박한 문제를 지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임무를 바꿨다. 그의 가장 중요한 사고 가운데에는 건물·도시설계·의자 디자인 등 모든 디자인은 본질적인 면에서는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즉, 필요와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옛 형태나 양식을 모방하지 않고 근대적인 건축자재와 기술을 사용하여 디자인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건축은 라이트나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 갖는 감각적인 매력은 없지만 그의 일생에 걸친 건전하고 실용적인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항상 논란과 비판이 있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개성적 정신의 활력과 삶 자체의 자발성을 심어주었다. 신사복 차림에 베레모를 쓰는 그의 습관은 아마 그가 연결하고 싶어했던 '사업가와 공학자의 엄격한 정신과, 창조적인 예술가의 상상력이라는 두 세계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