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축화옥

계축화옥

다른 표기 언어 癸丑禍獄 동의어 칠서지옥, 七庶之獄

요약 대북파가 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단순 강도범 박응서 등을 이용하여 조작한 무옥이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 간에 심한 암투가 있던 중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자 대북이 집권하였다. 이들은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는 구실로 소북을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과 측근들을 박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박응서·서양갑·심우영 등 서얼 일당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대북은 이 사건을 영창대군과 그 일파를 제거하는 데 활용하고자 서얼 일당에게 거짓 자백하도록 사주,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게 하려 했다고 고변케 함으로써 옥사가 시작되었다.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 간에 심한 암투가 있었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자 대북이 집권하였다.

이들은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는 구실로 소북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을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과 측근들을 박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박응서·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서얼 일당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칠서사건). 대북은 이 사건을 영창대군과 그 일파를 제거하는 데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이첨(李爾瞻)과 그 심복 김개(金闓)·김창후(金昌後) 등은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 등과 모의하여 국문 과정에서 서얼 일당에게 거짓 자백하도록 사주했다. 일당 가운데 박응서가 거짓 자백함으로써 옥사가 시작되었다.

박응서는 자신들이 1608년부터 명나라 사신을 죽임으로써 사회혼란을 일으키고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아 정권을 장악하고, 성공한 뒤에는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게 하려 했다고 고변했다. 그리고 거사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살인했다고 하였다. 또 서양갑은 주모자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이며 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했다고 하였다.

이로써 이 사건에 연좌된 종성판관 정협(鄭浹),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 등 일곱 대신과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황신(黃愼) 등 수십 명을 관련자로 몰아 가두었다.

또 전에 선조의 병이 위독해지자 일찍이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에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무당을 보내서 저주하였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했다.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대북파가 정권을 완전 장악했으며, 1618년에는 인목대비마저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정권이 바뀌자, 이 사건은 대북파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기 위하여 단순 강도범 박응서 등을 이용하여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하였다.→ 칠서사건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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