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사도세자

장조, 思悼世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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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중했던 어린 시절
  2. 불안한 세자의 자리
  3. 혼례, 혜경궁 홍씨와의 만남
  4. 문무를 겸비한 영재
  5. 대리청정으로 더욱 깊어진 갈등
  6. 정신질환의 심화
  7. 임오화변의 전개
  8. 비극의 실상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를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진다.’고 한다. 반대로 자식이 먼저 죽으면 참척(慘慽), ‘참혹한 슬픔’이라고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잃고 애간장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조선 왕실에서는 그런 고통스러운 슬픔을 스스로 실행한 임금이 있다. 조선의 최장수 임금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 임오화변이 바로 그것이다.

한데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은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 즉 ‘애달프게 생각한다.’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곤 손자 정조에게 ‘금등(金縢)’이라는 친필 비밀문서를 주어 세자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죄를 입었다고 자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지는 기록에는 세자가 좁은 뒤주 속에 갇혀 허기와 기갈에 신음하던 여드레 동안 이 비정한 아버지가 어떤 마음의 고통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세자의 비행을 신고한 생모 영빈 이씨의 불가피한 상황과 아버지의 냉혹한 처결 과정만이 전해진다. 조선 후기,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진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통해 전해지면서 오늘날까지 세인들에게 권력의 비정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출중했던 어린 시절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1735년 1월 21일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영조는 82세까지 살았고 왕위에 52년 동안 머물렀던 조선 왕실의 기록적인 인물이다. 그에게는 정비 정성황후와 계비 정순왕후가 있고,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후궁 문씨 등 4명의 후궁이 있었다. 그는 후궁에게만 2남 12녀를 얻었는데, 그 중에 5녀는 요절했다.

영조는 즉위 이전에 정빈 이씨에게서 첫 아들 효장세자를 얻었지만 1719년(숙종 45년) 2월 15일에 9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고, 사도세자는 그로부터 9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늦은 나이에 후사를 보게 된 영조는 몹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다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늙은 아버지 영조의 기쁨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원자로 정호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초고속 후계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이런 부왕의 기대에 걸맞게 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다. 두 살 때 왕(王)이란 글자를 보고 영조를 가리켰으며 ‘세자(世子)’라는 글자를 보고 자기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이런 세자가 책봉례를 올릴 때 조현명은 영조를 배알하면서 ‘세자가 효종대왕을 닮았으니 종사의 끝없는 복’이라고 경하했다.

1737년(영조 13년) 2월 14일에는 세자가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신료들이 앞 다투어 가져가려고 했다. 같은 해 윤 9월 22일에는 종이 12장에 두 글자씩 써서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여러 대신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불안한 세자의 자리

영조는 오래전부터 세간에 널리 퍼져있던 자신의 경종 독살설을 불식시키려는 듯 경종 비 선의왕후 어씨가 살았던 저승전에 세자의 거처를 정해주었다. 게다가 과거 경종의 나인이었던 한상궁과 이상궁에게 세자의 훈육을 맡겼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세자는 평소 학문에 열중했다. 그런 와중에 틈틈이 상궁들과 전쟁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한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세자를 엄하게 추궁한 다음, 자식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는 이유로 두 상궁에게 혹형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았다. 어린 세자는 이런 영조의 처사에 극심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느꼈다.

훗날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통하여 이런 극적인 상황이 세자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불안한 시기에 세자를 지켜준 사람은 영조의 편애를 받던 누나 화평옹주였다. 그녀는 변덕스러운 성격의 영조와 하나뿐인 남동생 사이에서 동분서주하면서 화해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가 출산 도중 숨지고 영조의 사랑이 막내인 화완옹주에게 기울어지면서 세자에 대한 영조의 압박도 가중되었다.

그렇듯 세자에 대한 영조의 질책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보위를 향한 궐내의 암투도 심화된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와 문성국 남매, 계비 정순왕후 등이 수시로 세자의 잘못을 고해바쳤다. 조정에서는 김상로, 홍계희 등 노론 중진과 외척인 김한구, 김귀주 등이 세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혼례, 혜경궁 홍씨와의 만남

세자는 1743년(영조 19년) 1월 3월, 관례를 치른 다음, 11월 13일, 성균관 장의로 정9품직의 세마(洗馬)에 불과했던 홍봉한의 둘째 딸 홍씨와 혼인식을 치렀다. 그렇게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가인 풍산 조씨 가문은 노론의 대표적인 가문이었지만 장인 홍봉한은 그때까지 수차례 문과에서 떨어진 낙방거사에 불과했다. 왕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노론의 후원을 받았던 영조로서는 노론 가문과의 혼인이 불가피했지만 기왕이면 좀 무기력한 사돈을 맞아 쥐락펴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이 되자마자 문과에 급제하더니 도승지, 어영대장을 거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와 혼인한 뒤 성인이 된 15세 때 비로소 합방을 했고, 1750년, 첫 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 정(琔)을 낳았다. 영조는 늘그막에 얻은 손자를 몹시 사랑했다. 그러나 세손은 1752년(영조 26년) 8월 27일 겨우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홍씨는 같은 해 9월 22일 둘째 아들 산(祘)을 낳음으로써 첫째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문무를 겸비한 영재

일찍이 조현명이 꿰뚫어보았듯이 사도세자는 무재가 출중한 인물이었다. 훗날 아들 정조가 백발백중의 주몽이었음을 보아도 그의 핏속에는 태조 이성계의 야성과 웅혼이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평소 군복을 즐겨 입었으며, 홍역에 걸렸을 때도 세자빈에게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런 아들의 무골을 감지한 영조는 1743년(영조 19년) 형조판서 이종성을 세자시강원 빈객으로 임명하면서 세자의 강인한 성품을 인자함으로 보필해 조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성이 차지 않은 듯 세자가 13세 때 어전으로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물었다.

“중국의 한 문제와 무제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문제가 훌륭합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를 속이려 하느냐? 네가 지은 시 중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구절이 있어 기가 매우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대화 속에서 영조의 세자에 대한 불신이 엿보인다. 1744년(영조 20) 11월 4일, 영조는 세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글을 읽는 것이 좋은가, 싫은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영조는 세자의 말이 진실하니 마음이 흡족하다고 말했지만 본심은 달랐다. 그는 세자가 일찍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예나 술을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1755년(영조 31년) 9월 10일에 이렇게 세자를 다그쳤다.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1일에 쓰기 시작해 그믐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召對)하고 어느 날에는 차대(次對)했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書筵)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公事)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篇)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강관(講官) 등을 기록해 내가 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이 장면은 마치 변호사가 된 아버지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법전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이런 부당한 처사에 생각이 있는 젊은이라면 당연히 반발할 것이다. 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영조와 세자는 수시로 부딪쳤고, 그런 갈등이 깊어지면서 부자간에 보이지 않는 금성철벽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학문과 더불어 무예에 심취하여 15세 무렵에는 효종대왕이 쓰던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가 되었다. 아울러 궁술과 승마에도 일가견을 보여주었다.

세자는 24세 때인 1759년(영조 35년)에 <무기신식>이라는 무예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은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선조 때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를 저본으로 곤봉, 장창 등 6가지 기예에 죽장창, 월도, 쌍검 등 12가지 기예를 추가해 그림과 설명을 붙인 무예서이다. 이 책은 당시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고,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대리청정으로 더욱 깊어진 갈등

영조는 세자가 15세 때인 1749년(영조 25년)에 대리청정을 명했다. 세자에게 정치적 경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민감한 사안은 자신이 판단해 결정할 것이었다. 그해 2월 16일,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기본지침을 제시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을 ‘그렇게 하라(依爲之)’는 세 글자로 미봉적으로 대답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헤아린 뒤에 결정하라.”

그때부터 세자는 부왕의 폭언과 질책 속에서도 대리청정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당시 세자는 여러 지역의 환곡을 조정하고, 현지의 형편에 따라 세금을 증감하는 등의 방법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 군역을 치러야 하는 백성들을 괴롭히던 대전(代錢)과 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이런 선정에 접한 백성들은 몹시 기뻐했다. 그리하여 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자 환호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소론의 정치적 입장에 기울었다고 여긴 집권 노론 일파에서는 세자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 계기는 나주벽서사건의 처리 과정이었다. 1755년(영조 31) 2월, 나주 객사에 ‘간선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라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 범인은 영조 초기에 숙청된 소론 윤취상의 아들 윤지였다.

당시 대리청정에 임하고 있던 세자는 그 일로 사직을 청하는 소론의 지도자 이종성을 만류하고, 유배된 소론 인물을 극형에 처하거나 처벌을 확대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장을 외면했다. 아울러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송준길의 문묘배향과 김창집의 석실서원 배향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탕평책을 추구하던 영조의 뜻이었다. 실제로 세자는 조정에서 노론이 소론을 공격할 때마다 부왕의 뜻을 물은 다음 처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자를 의심했고, 영조 역시 세자를 믿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늘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자에게 불만을 품었고, 시시때때 양위선언을 통하여 그를 괴롭혔다. 봉건시대에 건강한 군주의 양위선언은 정국을 전환하기 위한 자극적인 시도이다. 임금이 양위를 선언하면 당사자인 세자와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만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장차 불충으로 규정되어 어떤 징벌을 받을지 모른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임금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지만 당하는 세자나 신하들은 극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리청정 이전에도 영조는 이미 다섯 차례나 양위 선언을 했다. 어린 세자는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면서 결정의 철회를 애원했다. 그런데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뒤에도 세 차례나 양위를 선언하여 분란을 일으켰다. 부왕의 변덕이 그렇게 재발할 때마다 세자가 겪어야 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리청정 3년째인 1752년(영조 28년), 영조가 양위선언이 떨어지자 세자는 야반삼경에 뜰에 엎드려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2년 뒤인 1754년(영조 3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사간 신위의 상소에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때 영조는 세자를 불러들인 다음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글을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며 다그치며 양위 선언을 하여 세자를 괴롭혔다.

2년 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조의 변덕에 견디다 못한 세자는 자신이 불초하고 불민한 사람이라며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고 더욱 학문에 몰두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겠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바쳤다. 한데 승정원을 통해 그 글을 읽은 영조는 또 다시 양위파동을 일으켰다. 보다 못한 홍봉한과 유척기 등의 중신들이 세자를 변호했을 정도였다.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홍봉한은 동궁이 평소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한다며 임금을 달랬다. 과연 이날 밤에도 세자는 눈물로 결정의 유보를 통촉하더니, 물러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버렸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당시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쯤 되면 부자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리 없었다. 지쳐버린 세자는 1757년 7월부터 11월까지 넉 달 동안 문안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이후에도 4년여나 계속되었다.

정신질환의 심화

사서에 전하는 세자의 정신질환은 1755년(영조 3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18세 무렵 장인 홍봉한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원래 내게 울화증이 있는데, 최근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미칠 듯이 답답합니다. 이런 증세를 어찌 의관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비방을 알고 있다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십시오.’

그해 4월 28일 영조를 배알한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다음과 같이 세자의 증세를 아뢨다.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는데,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답니다.”

그 무렵 혜경궁 홍씨는 세자가 옷을 입기 싫어하는 의대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중록]에서 밝혔다. 그것은 물론 세자가 부왕을 만나기 싫어서 생겨난 증세였다. 그 후 세자는 수시로 정신질환이 발작했고,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는 몹시 후회했다. 한데 그때마다 부왕이 엄히 책망하니 두려움에 빠지면서 증세가 더욱 깊어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대리청정을 놓지 않았던 세자는 홍봉한에게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한데 이런 세자의 관심은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 노론 당료와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 왕실 세력의 무고로 인해 영조의 비위만 뒤틀리게 했다.

그렇듯 안팎으로 고립된 세자는 광증에 걸린 천재들이 그렇듯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1760년경부터 그는 여러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761년에는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기에 이른다. 그쯤 되니 생모인 영빈 이씨나 아내 혜경궁 홍씨는 도저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임오화변의 전개

세자의 극심한 병증은 정권을 쥐고 있던 노론 일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다가왔다. 그들은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수시로 난행을 일삼던 세자를 빌미로 소론과 남인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노쇠한 영조의 후사조차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바꾸려 획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적들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1761년(영조 37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세자는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넉 달 후 영조가 그 사실에 대하여 추궁하자 세자는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잘못을 빌었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세자의 행동이 소론 잔존세력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던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노론에서는 특단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나경언이라는 자를 내세워 영조에게 그간 떠돌던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고발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영조는 입시해 있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의 과실을 알게 했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비로소 세자가 그 동안 저지른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그를 죽임으로써 궁중은 물론 정계의 모든 불화 요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임오화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 이틀 뒤인 5월 24일, 영조는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로서 어찌 아들을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번민하던 영조는 며칠 뒤 건명문에서 밤을 지새운 영조는 새벽 나절 드디어 단안을 내리고 영의정과 우의정을 불렀다. 부리나케 입궐한 신료들은 세자가 뉘우치고 있다고 위로했지만 영조는 세자에게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고 탄식하면서 바른 말을 고한 나경언은 역적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아울러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 때문에 여러 당이 생겼으니 모두가 역적이라고 꾸짖었다.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드디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가두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 뒤주의 빈 틈으로 죽과 물을 넣어주었다는 것을 알고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았다. 결국 8일 뒤인 윤5월 21일 세자는 뒤주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4일에는 세자를 모셨던 환관 박필수, 여승 가선 등이 처형되었다.

세자가 갇혀 있는 동안 영조는 일상적인 국무를 처리했다. 그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하고 문을 지키는 군사를 위로했으며, 주강에 참석하고 인사를 처리했다.

윤5월 21일, 이윽고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세자의 위호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7월 23일에는 장례를 치르고, 시신은 양주군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에 안장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그해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했다. 8월 1일에는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했다. 실로 냉철한 뒤처리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갑신처분을 내렸다. 그렇지만 아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던 정조는 훗날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효자였던 아들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집권 노론 대신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이런 정조의 애타는 소망은 고종 때 이루어졌다.

1899년(광무 3년), 고종황제는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했고, 1901년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높였다.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비극의 실상

사도세자의 비극을 몰고온 심리적 갈등은 기실 아버지 영조의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조는 일찍이 소론의 거센 공세 속에서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경종의 강력한 비호에 힘입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위 내내 소론 일파로부터 경종 독살설의 당사자로 거론되었고,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한 무수리였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등극했지만 곧 급진적인 소론 일파인 준소가 남인과 함께 일으킨 이인좌의 난, 소위 무신란으로 인하여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불의의 반란은 다행이 소론 온건파인 완소의 도움으로 수습했지만, 준소의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무신란이 진압되고 2년 뒤인 경술년에 영조는 남인과 소론일파가 궁녀와 무당을 동원하여 창덕궁의 양화당과 세자궁, 빈궁의 침실 근처에 사람의 뼈가루와 저주물을 묻어놓은 매흉(埋兇)과 세자, 옹주에게 타 먹이는 화흉(和凶)을 당했다.

그로 인해 영조는 맏아들인 효장세자를 잃었다고 믿게 되었고, 소론이나 남인에 대한 경계심과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소론 정파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붕괴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탕평의 기준은 무너지고 영조 재위 내내 노론 일파가 앙앙불락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영조는 뒤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과거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에게 맡김으로써 이미지 쇄신을 노렸지만, 오히려 스스로 자식이 소론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재위 초기부터 정적들의 완강한 저항과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아버지 영조에게 뿌리내린 깊은 트라우마는 어린 사도세자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로 전이되었고, 세월이 가면서 수시로 제기되는 부왕의 의심과 질책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