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

혜경궁 홍씨

惠慶宮 洪氏

궁중문학 한중록의 저자

요약 테이블
출생 1735년 (영조 11)
사망 1815년 (순조 15)
본관 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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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궁중문학의 백미, <한중록>
  2. 열 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다
  3. 영조의 변덕과 급변하는 정세
  4. 친정아버지와 남편 사이
  5.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6. 무너진 약속, 읍혈의 나날

1795년 을묘년, 혜빈 홍씨는 봄빛이 화창한 윤2월 9일 아침,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남편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화성으로 향했다. 아들 정조가 마련한 조선왕조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가 동원된 8일 동안의 을묘원행에 나섰던 것이다.

정조는 새로 축조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와 함께 그해 61세가 된 어머니 혜빈 홍씨의 회갑연을 준비했다. 그것은 등극과 동시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일성을 내뱉었던 그가 영조 이래 강력한 신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입지를 뒤흔들던 노론 세력을 억누르고 진정한 군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는 매우 특별한 이벤트였다.

당시 정조는 노쇠한 혜빈 홍씨의 건강을 염려하여 출궁과 회갑 진찬연과 함께 현지에서 벌일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의 리허설까지 벌였다. 이런 아들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긴 여정이었지만 홍씨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윽고 화성의 현륭원에 당도한 그녀는 28세의 나이로 비명에 죽은 남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어루만지며 오랜 세월 삼켜왔던 눈물을 마음껏 쏟아냈다.

정조는 이런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화성행궁에서 회갑연을 열어주고 혜빈(惠嬪)이었던 그녀의 궁호를 혜경궁(惠慶宮)으로 올려주었다. 아울러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바쳤다. 홍씨가 젊은 날 비정한 정치놀음의 희생양으로 남편을 잃은 뒤 수많은 정적들의 위협 속에서 아들 정조를 지켜내기 위해 살아온 30여 년 간의 고행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화성행행도 (華城行幸圖)
화성행행도 (華城行幸圖)

궁중문학의 백미, <한중록>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은 일종의 회고록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조선시대 궁중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이 책은 그 시대의 치열했던 당쟁의 현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한다.

<한중록>은 한 권의 책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크게 두 차례의 집필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첫 번째 시기는 아들 정조가 조선 최대의 원행인 을묘원행을 통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화성행궁에서 회갑잔치까지 벌여주었던 1795년(정조 19년)경이었다.

‘내가 언제 이렇듯 인생을 한가하게 즐길 때가 있었던가.’

한중록
한중록

당시 혜경궁 홍씨는 이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환갑을 맞이하면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붓을 들었다. 그러기에 이 책의 최초의 제목은 ‘한가한 가운데 썼다.’라는 뜻의 <한중록(閒中錄)>이었다.

여기에서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이 비정상적인 성격을 보이던 영조와 그로 인해 정신질환에 걸린 사도세자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갈등은 바로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만이 풀어낼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 당시 아내로서 남편을 적극적으로 구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아울러 사위의 죽음을 방관한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비호함으로써 최근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심약한 궁중 여인이 아니라 냉혹하고 권력지향적인 정치인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두 번째 집필은 정조가 죽은 지 1년 후인 1801년(순조 1년), 정순왕후에 의해 그녀의 동기인 홍낙임이 죽고 많은 친척들이 유배형에 처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무렵 기대했던 가문의 신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가중되자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 듯 한 비통한 심정이 되어 붓을 들었고, 제목은 <읍혈록(泣血錄)>이 되었다. 그러므로 <한중록(恨中錄)>은 1795년의 <한중록(閒中錄)>과 1801년의 <읍혈록(泣血錄)>이 합쳐진 책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 책을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 박씨에게 맡겼다. 훗날 순조가 친히 정사를 관장하게 되면 정순왕후 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열 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봉한과 시아버지 영조와의 첫 인연은 별로 좋지 않았다. 서울 거평동 출신으로 성균관 유생이었던 홍봉한은 1735년 6월 18일 둘째 딸인 혜경궁 홍씨를 얻고 나서 두 달 뒤인 8월 18일 임금에게 노론의 거두였던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게 한 다음 출석점수가 모자랐던 홍봉한에게 5년 간 유생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로부터 8년 뒤 영조와 홍봉한은 사돈지간으로 만나게 된다.

1743년 봄, 9세가 된 사도세자는 관례(冠禮)를 치른 다음 절차에 따라 3월 23일 성균관을 참배했다. 기쁜 날을 맞아 영조는 성균관에서 활쏘기 행사인 대사례(大射禮)를 실시하고,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알성시(謁聖試)를 실시했다. 그런데 당시 31세의 늙은 유생으로 지금의 학생회장 격인 성균관 장의를 맡고 있던 홍봉한은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관례를 치른 세자의 앞에 혼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간택령이 내리자 한성부에 거주하는 명문대가의 처녀들이 줄지어 입궐했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백여 명의 처녀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일개 성균관 진사의 딸로서 세자빈이 된다는 것은 천운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가장 강력한 세자빈 후보가 되어 있었다.

홍씨는 정식 발표가 내리기도 전에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과 누나 화평옹주에게 불려가서 예절 교육까지 받았다. 그것은 분명 영조의 의중이었다. 생각을 좀 비틀어보면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노론 집안에서 좀 부실한 인물을 찾아낸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혜경궁 홍씨는 불과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어린이였던 혜경궁은 당시의 심정을 <한중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집에 머물 날이 점점 줄어들자 내 마음은 갑갑하고 슬프고 서러워 밤이면 어머니 품에서 잤다. 두 고모와 중모께서도 나를 어루만지면서 이별을 슬퍼하셨다. 부모님은 아침저녁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어여삐 여기시고, 궁으로 들어가는 나를 불쌍히 여겨 여러 날을 못 주무셨다.’

인생의 대사를 앞두고 잠 못 이루는 어린 딸과, 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부모의 마음, 여느 가정에 볼 수 있는 따스한 풍경이다. 하지만 진실은 저 언덕 너머에 있다던가. 당시 홍봉한은 미리 준비해둔 큰딸의 혼수를 둘째 딸의 세자빈 간택에 몽땅 쏟아 부을 정도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봉건시대에 양반이 왕의 사돈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인생 역전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어린 혜경궁 홍씨는 사고무친한 궁중에서 긴장감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궁중에 들어온 후로 어른들께 문안드리기를 감히 게을리 하지 못했다. 궁중의 법도가 지극히 엄하여 예에 맞춰 옷을 입지 않으면 감히 뵐 수 없었고, 날이 늦으면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문안하는 때를 어기지 않으려고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

혼례식은 1744년(영조 20년) 1월 11일에 있었다. 이때 세자나 홍씨 공히 10세에 불과한 미성년자들이었다. 친구 같은 남매 같은 부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 결실은 홍봉한의 몫이었다. 그 동안 9품직인 세자익위사 세마에 머물러 있던 홍봉한은 왕실과 혼인을 맺자마자 문과 전시에 합격하면서 앞날에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영조의 변덕과 급변하는 정세

어린 세자빈 홍씨의 궁궐 생활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이른 아침부터 남편과 함께 궁궐 어른들에게 문안을 드려야 했고, 낯선 궁중예법에 적응하느라 하루 종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 사도세자가 매우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므로 심심할 틈이 없었다.

궁궐에는 시어머니 격인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 이씨를 비롯하여 화평, 화협, 화완, 화순옹주 등 여러 시누이들이 있었다. 그 무렵 영조는 옹주들 가운데 선희궁이 낳은 맏딸 화평옹주를 몹시 편애했다. 사도세자는 그런 누나의 막후 지원을 받으면서 아버지 영조의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평옹주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빠진 영조의 심기가 비틀리면서 그 여파가 세자 부부에게까지 몰려왔다.

1749년(영조 25년) 15세로 성인이 된 세자 부부는 비로소 의식을 치르고 합방을 할 수 있었다. 한데 바로 그날 영조는 세자에게 선위교서를 내림으로써 조정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세자는 물론 신하들이 눈물로 호소했지만 영조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것은 경종의 독살설이 퍼진 이래 수시로 발휘되는 영조의 변덕이자 충성심 테스트였다. 그 사건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세자의 속은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화평옹주의 사망 이후 영조의 사랑은 화완옹주에게 기울어졌다. 그와 동시에 세자와의 사이가 멀어져갔다. 감정기복이 심했던 영조는 이인좌의 난 이래 자신이 결코 경종을 독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42세에 얻은 사도세자를 경종을 모셨던 궁인들에게 맡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들조차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다.

영조는 그해부터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지만 끊임없이 간섭하고 질책하면서 부자간의 사이가 멀어졌다. 변덕스런 아버지의 뒤틀린 시선을 의식한 사도세자는 울화증이 생겨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식사조차 목에 걸렸다. 뛰어난 무예 실력에 자유로운 예술가적 기질까지 갖추었던 세자는 어느 결에 아버지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부터 세자는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세자빈 홍씨가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았지만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난산으로 죽은 화평옹주를 떠올리며 비탄에 잠겼다. 2년 뒤 의소세손이 병으로 죽었지만 사도세자 부부에게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런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1755년(영조 31년) 나주벽서사건이 터졌다. 나주 객사에서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니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란 벽서가 발견된 것이다. 벽서의 주범은 소론 강경파였던 윤취상의 아들 윤지였다. 그로 인해 이듬해 소위 을해옥사가 벌어졌다. 윤지, 윤광철, 박찬신 등 수많은 소론 인사들이 죽음을 당하고 직접 관련이 없던 소론의 영수 조태구, 유봉휘, 이사상 등에게도 역률이 적용되었다. 이미 죽은 이광좌, 조태억의 관적도 삭탈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5월 역도를 토벌한 기념으로 실시한 토역경과(討逆慶科)에서 다시 조정을 비난하는 글이 나왔다. 범인은 이인좌의 난으로 사형당한 심성연의 아우 심정연이었다. 그로 인해 윤취상의 동생 윤혜, 김일경의 종손 김도성 등 몇 남지 않은 소론 인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연이은 두 사건으로 인하여 소론은 붕당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친정아버지와 남편 사이

1756년 가을, 세자빈 홍씨는 둘째 아들인 정조를 낳았다. 그때의 소회를 그녀는 <한중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비록 20세 전의 나이였지만 떳떳하고 흐뭇한 마음이었다. 이 아들에게 훗날 몸을 의탁하리라 생각하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혜경궁 홍씨가 원손을 낳자 아버지 홍봉한은 어영대장, 비변사 당상, 좌참찬 등을 역임했고, 이후에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결과 홍봉한은 노론 외척당인 북당의 영수로 군림하면서 정계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수렴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가 소론의 정치적 견해에 동조함으로써 장인과 척을 지게 된다.

이대로 영조의 치세가 저물고 사도세자가 등극하게 되면 이미 재가 된 소론의 불씨가 살아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복수극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고심하던 노론 일파는 마침내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혜경궁 홍씨는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져버렸다. 아버지를 따르자니 남편이 울고, 남편을 따르자니 아버지가 울게 된 것이다.

결국 혜경궁은 남편 대신 아버지를 선택했다. 가문과 권력이 부부라는 사적인 관계보다 우위에 있던 시대였다. 그로 인해 안팎으로 고립된 사도세자는 죽은 효장세자의 처남인 소론의 영수 조재호에게 의지했다. 그러자 노론 측에서는 나경언 고변사건을 조작해 영조를 몰아세웠다.

그 와중에 세자를 편들어주던 대비 김씨와 왕비 서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세자 곁에는 완충 역할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영조는 급기야 공공연히 세자에게 면박을 주었고, 울화증이 깊어진 세자의 상태는 악화되어갔다.

이때의 상황을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세자가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평양을 왕래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당시 세자는 내시 김한채를 밀고자로 의심하여 목을 베어 버리기까지 했다.

평소 멀쩡하던 세자는 발작이 시작되면 혜경궁 홍씨는 물론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렇듯 세자의 상태가 극에 치닫자 생모인 선희궁 이씨는 저간의 일을 영조에게 고함으로써 파국을 몰고 왔다. 평소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영조는 그런 비정상적인 행태를 알게 되자 크게 노했다. 결국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폐서인한 다음 휘령전 앞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무더위와 기갈 속에서 세자는 8일을 버티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때 혜경궁 홍씨의 심사는 <한중록>에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서글프고도 서글프도다. 모 년 모 월일의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하늘과 땅이 맞붙고, 해와 땅이 어두운 변을 만났으니 내가 어찌 잠깐이라도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겠는가.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옆에 있던 사람이 빼앗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고 참아 모진 목숨을 보전하며 하늘만 부르짖었다.’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사도세자가 폐서인되고 죽음을 당하자 홍씨는 자동적으로 세자빈의 지위에서 밀려났다. 그녀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친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이 28세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름 뒤 자신의 조치를 후회한 영조가 죽은 세자에게 사도(思悼)란 시호를 내리고 복권시키자 세자빈의 지위를 되찾고 궁궐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홍씨의 희망은 아들 정조를 잘 키우고 정적들의 위협에서 지켜내 보위를 잇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조라는 소용돌이를 우선 넘어서야 한다. 변덕스런 영조의 성정을 뼈저리게 경험한 그녀로서는 또 다른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하여 재입궁한 뒤 만난 영조에게 이렇듯 원망 대신 감사의 예를 바쳤던 것이다.

“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이로소이다.”

이런 며느리의 태도에 영조는 몹시 감격했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와 세손 사이에 깊은 유대감을 맺어주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내가 너를 볼 마음이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아름답구나.”

그렇지만 가시밭길은 끝이 없었다. 사도세자 사후 노론의 화살은 그의 아들 세손을 겨냥하고 있었다. 세손과 그들은 이미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혜경궁과 영조는 노론으로부터 세손을 보호해야 했다. 홍인한을 필두로 하는 노론이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혜경궁은 이전의 약속을 지키라며 강력하게 저항했고, 영조 역시 노론 일파에 강력하게 맞섰다. 자식을 죽였는데 손자까지 죽일 수 없었던 영조, 남편을 죽였는데 아들까지 죽일 수 없었던 혜경궁, 두 사람은 그렇게 한 마음으로 세손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7월, 그 동안 홍씨를 후원해주던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혜경궁은 노론의 사주를 받은 궁녀와 환관들을 경계하며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때맞춰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았다. 효장세자는 열 살의 나이로 죽은 영조의 장남이었다. 그것은 세손을 사도세자의 너울에서 벗겨주려는 영조의 배려였다. 하지만 졸지에 아들을 빼앗긴 격이 되어버린 혜경궁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소식이었다.

‘위에서 하시는 일을 아랫사람이 감히 이렇다 하겠냐마는 그때 내 심정은 망극할 따름이었다. 내가 임오년 화변 때 모진 목숨을 결단치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그와 같은 간난신고를 거친 끝에 세손은 1776년 3월 조선의 제22대 국왕 정조로 거듭 태어났다. 어머니의 인고의 세월을 지켜보았던 정조는 지성으로 효도를 바쳤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 외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칼을 휘둘렀다. 심복인 홍국영의 사주에 따라 동부승지 정이환이 홍봉한과 홍인한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가세했다.

“홍봉한의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군신상하가 편히 먹고 잘 수 없습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모든 것이 정상화될 줄 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친정이 위기에 몰리자 수라를 물리고 잠을 자지 않는 등 온갖 방법으로 정조를 추궁했다. 그러나 정조는 강골이었다. 어머니의 애달픈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외가 일족에게 모조리 사약을 내렸다. 앞장서서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홍인한도 이때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노쇠한 외조부 홍봉한과 처남 홍낙인 정도였다.

무너진 약속, 읍혈의 나날

참담한 아들의 복수극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기대처럼 정조는 뛰어난 학문과 정치력을 발휘하여 당쟁으로 얼룩진 조정을 아울렀다. 더불어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장용영을 세워 무력까지 장악한 정조의 치세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이윽고 자신의 개혁정책이 구체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정조는 어머니의 평생소원을 이루어주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는 어머니가 칠순이 되고 아들 순조가 성인이 되는 갑자년이 오면 수원에서 함께 살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신원시킴과 동시에 외가를 복원시켜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리하여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숨겨왔던 아들 정조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부푼 기대감을 표출했던 것이다.

‘이런 고로 선왕은 이를 데 없이 미워하며 후일을 별렀다. 중부를 여산으로 귀양 보낼 때에 전교하시기를 여러 가지 죄목으로 논란하여 다시는 세상에서 사람 노릇을 못하게 죄어 매었다. 선왕은 본래 외가에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한 번 풀고자 하셨지만, 차마 노모를 두고 어찌 외가를 망하게 하실 뜻이 있었겠는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정조가 말년에 왜 그토록 수시로 경모궁에 가서 통곡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이중적인 행태, 그러나 자식만은 끝내 지켜주려 했던 지극한 모성애 사이에서 그의 가슴이 갈가리 찢겨졌던 것이다.

이런 효자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그녀의 기대감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뒤이어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국왕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면서 다시 노론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은 뒤 병인경화로 노론이 일시에 괴멸되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혜경궁 홍씨는 그렇듯 혼란스런 정국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일희일비의 나날을 보내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 창경궁에서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저승에서 남편 사도세자와 아들 정조를 만났다면 사연 많았던 자신의 세월을 무엇이라 표현했을까?

혜경궁
혜경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