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역사

자카르타 역사

네덜란드 식민시대

자카르타는 네덜란드 식민 시대부터 인도네시아의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해양 무역상에서 출발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서부 자바의 작은 항구였던 순다클라바(Sunda Klapa)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은 순다 왕국의 무역항으로 '자야카르타(Jayakarta)'라고도 불리었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지역의 이름을 '바타비아(Batavia)'로 개칭한 후 모국의 암스테르담과 유사한 운하가 있는 항구 도시로 개발하였다.

바타비아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은 운하를 건설하고 네덜란드 양식의 건축과 도시계획을 적용하여 최대한 암스테르담과 유사한 도시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17세기 이후 바타비아는 '열대의 네덜란드'라 불리기도 하였다. 해안가 바타비아 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회사와 창고 등의 무역 시설 뿐 아니라 행정기구들이 집중적으로 건설되면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행정 및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다양한 지역의 이주민들이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들은 집단별로 거주지를 분리하였다. 당시 유럽인들의 생활을 뒷받침하던 중국인들도 항구 지역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차이나타운(Pecinan)에 집중거주하면서 기존의 상업적 활동을 영위하였다.

1800년에 접어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재정난과 부패로 파산에 이르렀고, 이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직할식민지로 경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예속된 상황이어서 이 결정은 프랑스의 후견 속에서 이루어졌다. 1800년대 초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이 심화되며 영국이 자바섬과 자카르타를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의 왕정이 복고되며 바타비아에 대한 지배권한은 네덜란드에 반환되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배가 길어지면서 보다 안정적인 거주지를 찾아 식민시대의 도시개발이 중앙 자카르타의 멘뗑(Menteng)까지 확대되기는 했지만, 그 시절에 도시 중심은 구도심인 코타 투아(Kota Tua)를 벗어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일본의 식민지배도 받았다. 일제는 1942년 이 도시를 점령하고 도시명을 바타비아에서 '자카르타'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주로 외방도서의 자원 약탈과 전쟁에 집중하느라 자카르타의 행정관청은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수카르노 집권기

초대 대통령 아크멧 수카르노(Sukarno, 재임기간 1945~1966)는 반둥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고, 이에 독립 이후 자카르타를 국가의 근대적 수도로 만들기 위해 근대적 도시계획과 다양한 도시 상징물을 곳곳에 배열하였다.

먼저 도시의 남북을 잇는 중심도로의 이름에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부여하였는데, 땀린로(Jalan Tamrin)과 수디르만로(Jalan Sudirman)가 대표적이다. 수카르노는 새로운 독립국가·다종족 다종교의 화합을 상징하는 모나스 국가 기념탑과 메라데카 광장을 조성하였다. 이어서 모나스의 동쪽 찔리웅강변에는 세계 최대의 이스띠끄랄 이슬람 사원(Masjid Istiqlal)을 건설하였다. 모나스와 이스띠크랄 사원은 독립된 통합국가를 상징하는 국가통합 및 근대국가 출범의 상징건축물들이라 할 수 있다.

수카르노 시대 인도네시아는 제3세계 동맹의 맹주로 나서면서 도시의 국제화도 시도하였다. 외국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건설된 최초의 국제급 현대 호텔인 호텔 인도네시아,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인 샤리나 백화점 등이 1960년대에 건설되었다. 또한 1962년 아시안게임과 1963년 신흥국경기대회(GANEFO: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를 유치하면서 주경기장 용도로 스나얀스포츠콤플렉스(현 겔로라 붕카르노, Stadion Gelora Bung Karno)를 건설하였다. 또한 남북 축인 땀린-수디르만로와 남부의 동서 축인 가또수브로또를 연결하는 스망기 인터체인지(Semanggi flyover)를 건설하며 도시의 근대성을 드러내었다.

현재 자카르타 경제의 중심지는 남부 자카르타(Jakarta Selatan)이다. 이 지역의 초기 개발은 1940년대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수카르노 정부는 독립국가의 새로운 공무원들의 신규 주거단지 용도로 끄바요란 바루(Kebayoran Baru)의 개발 계획을 승계하였다. 개발당시 이 지역은 자카르타 도시의 일부라기보다는 도시의 남부 외곽 지대에 위치한 위성도시의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수디르만로를 따라 도시 중심부까지의 접근성과 통근로가 확보되었고, 이로써 끄바요란 바루의 주택가에서 정부 관청과 당시의 주요 상업시설들이 다수 위치한 땀린으로의 통근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이후 인도네시아의 도시성장은 주로 수도인 자카르타의 인구증가의 결과이다. 1961~1971년 자카르타 도시인구는 290만 명에서 460만 명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으며, 연간 성장률은 5.8%에 달한다. 이러한 도시성장에 대응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1965년 《자카르타 마스터플랜, Master Plan of Jakarta of 1965》을 수립하였다.

1970년대 이후

1970년대 초부터 자카르타 마스터플랜에 따른 도시개발이 한계에 이르면서 새로운 개념의 자카르타 대도시권(Jakarta Metropolitan Region, JMR) 개발계획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70년대 이후 외국인 투자를 바탕으로 도시 개발을 추진하던 정부 정책에 의해 도시 외곽 지역에 공단과 주거지를 비롯한 도시개발이 시작되었고, 당시 도시화의 범위는 도시 중심부로부터 15km 이내로 제한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자카르타와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수도권 인구가 1,190만 명에 달하게 되면서, 수도권의 범위는 도시 중심으로부터 20km까지 확장되었다. 이로써 자카르타 수도권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자카르타의 도시 확대는 60~80년대 독립광장을 중심으로 한 남향의 방사형 도로(땀린과 수디르만)를 타고 남향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으나, 1980년대 이후 동서축을 중심으로 한 도시 개발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남향 방향 개발은 주로 양질의 상수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컸는데, 동서 방향의 개발은 산업화와 적극적인 도시계획에 의해 주도되었다. 1980년대에 수립된 《구조계획, Structure Plan 1985~2005》이라는 도시 확대 정책이 수립되면서 자카르타 서부의 땅어랑(Tangerang)과 서부의 버카시(Bekasi)를 향하는 고속도로와 신도시 및 산업단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즈음 인도네시아의 도시화 상황은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 단핵구조에서 다수의 산업도시 중심지를 갖춘 대도시 차원으로 이동하였다. 도시 및 택지 개발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은 줄어들었으나, 21세기 초반 투기성 토지개발과 메가 프로젝트는 여전히 인도네시아의 정치·경제 엘리트들과 중산층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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