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 전쟁

아시아∙태평양 전쟁

[ Asia∙Pacific War , 亞細亞∙太平洋 戰爭 ]

요약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전쟁의 배경

1920년대 후반 세계 경제는 대공황을 맞았다. 특히 일본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상대적으로 많은 식민지나 풍부한 자원을 갖춘 영국이나 미국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거대한 식민지 시장을 확보하고자 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것은 그 서막이었다. 일본군은 4개월 만에 만주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중국에서 만주를 분리하고자 했다. 일본은 (淸)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황제로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에 불과했고, 일본은 만주 지역에서의 군사적·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일본이 산하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화베이[華北] 지역까지 진출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1933년 3월 국제연맹은 일본의 중국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국 승인을 무효화하였다. 이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중국 내륙으로 진출할 빌미를 찾던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삼아 끝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베이징과 톈진[天津]을 점령하고 전선을 상하이[上海]까지 확대시켰으며, 1937년 12월에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수도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이후 우한[武漢], 광둥[廣東], 산시[山西] 등 중국의 주요 성(省)과 대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주요 도시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중국은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갔다. 일본군이 중국의 넓은 영토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충칭[重慶]으로 옮기고 대항하였고, 공산당도 유격전을 벌이며 강하게 저항했다. 내전을 벌이고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본에 맞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이루고 대일 항전에 함께 나서면서 중일전쟁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내륙을 점령하면서 영‧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조약을 무효화하고, 일본에게 중국에서 철수하고 만주사변 이전으로 돌아가도록 경고했으며, 영국과 함께 일본에 대한 철강·석유 등의 수출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는 전쟁의 장기화에 더해 일본에 큰 타격이 되었다.

전쟁의 전개 과정

1939년 9월 유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독일은 차례로 주변의 여러 나라를 점령해갔다. 1940년 6월에는 이탈리아가 전쟁에 가세했으며, 이 무렵이면 사실상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럽이 전쟁에 휩싸이게 되자, 일본은 열강들이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신경 쓰지 못하는 틈을 타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동아시아를 해방시키고, 일본을 주축으로 한 하나의 경제·문화권을 이루고 번영해 나가자는 ‘대동아(大東亞) 신질서 건설’을 내세웠다. 물론 그것은 명목일 뿐이었고, 실상은 일본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구상이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하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1941년 7월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남부까지 점령하였다. 일본이 동남아시아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였다. 결국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다(진주만 기습). 이와 동시에 필리핀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반도로 진출하여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서막이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미국·영국 등 연합국에 비해 군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었음을 인지하고, 기습적인 선제 공격을 통해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말레이반도와 필리핀에 상륙한 1942년 2월 싱가포르까지 점령하면서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필리핀에서는 1942년 1∼3월 마닐라를 시작으로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또한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하고, 미얀마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중국에 대한 연합국의 지원을 차단하고 인도와 영국을 이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개전 초기 일본은 순식간에 동남아시아 전역과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차지하는 등 순조롭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연합국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면서 서서히 전쟁의 국면이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파푸아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려던 일본군은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에서 미군과 격돌하여 전력에 큰 손실을 입게 되었고, 뒤이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을 미국에게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

연합국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탈환하면서 서서히 일본을 압박해갔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에서 미국과 영국, 중국이 일본의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한 것은 전세가 완전히 연합국으로 기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44년 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인도로 진격하려고 시도했으나, 7월 대패하였다. 같은 달 미군은 사이판섬을 점령하여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였고, 10월에는 레이테섬에 상륙하여 필리핀 탈환을 준비하였다. 중국 내에서도 화베이와 화중[華中]에 ‘해방구(解放區)’가 만들어지는 등 일본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

1944년 11월부터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본격화되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했으며, 4월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하였다. 이 무렵 유럽에서의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이제 일본과의 전쟁만 남게 되었다. 7월 26일 미국과 영국, 중국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한편 소련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8월 10일 일본은 일왕의 국왕으로서 지위를 인정해달라는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였다. 그러자 연합국은 일왕의 지위를 인정하더라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에 복종해야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의 단서를 받아들이고, 다음 날 일왕이 직접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막을 내리고, 한국을 포함한 일본의 식민지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1945년 8월 30일 미군이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미주리호(號)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었다. 패전국 일본은 주권을 상실하고, 대일강화조약이 발효되는 1952년 4월 28일까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통치를 받았다.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침에 따라 1946년 2월 13일 '일본국(日本国)'이라는 새로운 국명을 발표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6년 11월 3일 '일본국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신헌법을 공포하고, 1947년 5월 3일부터 시행하였다. 한편 1951년 9월 4일~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51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강화회의가 열렸다. 1951년 9월 8일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제외한 49개국이 대일강화조약에 서명하고,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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