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일본 점령기와 혁명기 역사

인도네시아 일본 점령기와 혁명기 역사

일본은 독일 나치스의 침공으로 유럽이 전쟁터가 되고 동남아시아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진주만폭격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쟁(1942~1945)으로 확전을 감행한다. 동시에 소위 '대동아 공영권(the Greater East Asia)'을 내세우며 동남아시아 전역을 침략하였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공업화 및 군수에 필요한 석유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필요분의 55%는 미국으로부터 25%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불리던 현재의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였다. 그 밖에도 인도네시아에는 일본이 필요로 하려는 핵심적 자원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42년 2월 싱가포르수마트라섬을 점령하고, 3월에는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를 포함하는 자바섬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는데, 자바 섬 전체를 함락시키는데 9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네덜란드군은 1942년 3월 동부 자바의 칼리자티(Kalijati)라는 소도시에서 일본군에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350여 년 동안 식민통치 해왔던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1944년 이후 전세는 다시 연합국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의 인도네시아 점령은 3년 6개월의 짧은 시간 안에 끝나게 되었다. 일본의 인도네시아 점령은 3년에 불과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위해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였다.

일본은 동원과 착취를 위한 유화책으로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며 정치활동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식민세력에 의해 원거리 섬에 유배 중이던 아크멧 수카르노하타(Mohammad Hatta, 1902~1980)를 석방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위원회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패망한 일본에 의해 두 민족지도자는 납치되기도 하였으나, 자카르타로 귀환 한 뒤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와 하타는 인도네시아공화국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공화국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늘어갔는데, 인도네시아인들은 이 시기를 외세나 왕과 같은 지배자 없는 '혁명'의 시기로 부른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연합군들이 주요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발생한 곳은 수라바야(Surabaya)로 이 도시는 혁명기의 대표적인 저항도시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재점령과 주둔의 의지를 밝히며 자카르타를 비롯해 주요 도시를 재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혁명 정부는 공화국의 수도를 욕야카르타로 옮기며 저항을 이어갔다.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은 1945년에서 1949년말 까지 4년 5개월 간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군사 4만 5천~10만명, 민간인 2만 5천~1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된다.

1949년 8월부터 헤이그에서 네덜란드 정부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으며, 그 해 말 12월 27일 마침내 네덜란드는 이리안자야(Irian Jaya 현재의 파푸아)를 제외한 전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읻도네시아 연방공화국으로 이양한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연방공화국은 자바인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네덜란드가 만든 각지의 괴뢰국가가 분리된 상태였다. 이후 연방국으로의 편입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마침내 1950년 8월 연방을 해산하고 현재의 인도네시아 전지역을 아우르는 중앙집권국가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출범하였다.